통일과정과 통일국가의 이념
                                                    이 만 열 장로(국사 편찬 위원회)


1. 정부의 공식적 통일방안과 통일국가 이념

대한민국 정부가 지향하는 통일에 대해서는 국민적 합의과정을 거쳐 마련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나타나 있다. 정부는 80년대 말 수많은 국민 의견수렴 과정과 국회공청회 등을 통해 89년 9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확정했으며 그 후 이를 일관되게 견지해 왔다. 국민의 정부도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계승 견지함을 확인했고 (99.10.26. 국회본회의 통일부장관 답변)참여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역시 국민의 정부 시절 화해협력 정책의 기조와 성과를 계승, 발전시킨 대북정책임을 천명했다.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자주, 평화, 민주를 통일원칙으로 하여 화해협력-남북연합-통일국가라는 단계적, 점진적 통일방안이며, 통일국가의 궁극적 형태는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1체제 1정부 1국가>이지만 남북간 체제의 차이와 이질성을 감안, <남북연합>이라는 과도적 중간과정(통일 준비단계)을 갖도록 상정하고 있다. 이 <남북연합>은 현존 2체제 2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남북 정부간 협력기구를 구성 운영하는 체제이자 그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평화공존을 전제로 하여 제 분야의 교류협력이 활성화되는 단계이다.
  <남북연합>에서는 남북정상회의. 남북각료회의. 남북평의회, 공동사무처 등 남북협력기구가 설치 운영되면서 분단 상황의 평화적 관리, 경제. 사회. 문화 분야의 민족공동체 형성, 통일국가의 법과 제도 마련 등이 진행된다. 이러한 상황은 먼저 민족사회 통합이라는 “사실상의 통일(de facto unification)상황”이 되며 남북한 주민들의 정치적 합의에 따라 “법적 통일(de jure unification)”을 실현한다는 단계적 접근과정을 의미한다. 정부는 통일국가상을 <1>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 <2>시장경제체제로 번영, 발전하는 국가 <3>정의로운 복지국가로 상정하고 있는데 이는 공산주의의 이념과 체제는 이미 존립가치를 상실했으며 탈냉전시대를 벗어난 통일의 길은 있을 수 없다는 전제를 달고 있다. (통일부 자료종합, www.unikorea.go.kr)
  2000년 6.15공동선언에서 남북의 두 정상은 서로의 통일방안에 공통점이 있다고 천명했는데 앞으로의 통일과정은 그 몇가지 공통점 이외에 수많은 차이점들을 접근시키는 과정이 될 것이다. 법적 통일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최종적으로 이념의 문제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데 남북은 이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 체제와 이념에 관한 합의가 가능한 관계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된다.

2. 통일을 위한 조건들

  남북이 어떤 형태의 통일국가를 이루든지 간에 그 체제와 이념에서 간과될 수 없는 조건들이 있다.
  먼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은 철저히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체제마다 달리 해석되고 있는 인권은 세계인권선언(1948.12.10)에 천명한 보편적 인권개념을 기준이 되어야 하고 이를 충족시켜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국가의 주민동원을 당연시하고 개인의 자유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앞세워 왔으며 주민들을 출신성분별로 나눠 사회경제적 권리에 차별정책을 시행해 온 북한체제에 많은 변화가 요구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과거 남한 정부도 주민들을 자의적으로 동원하거나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침해하거나 심지어 생존권을 위협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오늘날은 북측의 인권상황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개인의 정치적 권리가 보장되는 정치체제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적 국가라면 당연히 국민 개개인의 정치적 의사 표출과 정치 참여의 경로가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 문화 또한 이념에 의한 체제 분단의 아픔을 넘어선 국민답게 다양한 생각과 집단을 포용하고 기꺼이 타협하고 승복하는 수준을 회복해야 한다.
셋째는 인간의 생존에 적합하고 인간존중의 가치가 살아있는 효율적 경제체제가 자리 잡아야 한다. 공산주의 계획경제가 실패한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인간관의 오류”라고 볼 수 있다.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간과하여 집단의 비효율성을 정치적 구호와 잘 짜여진 조직에 의해 통제,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은 일시적으로 통할 수는 있어도 한 세대를 채 견디지 못하는 허약한 구조였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사회의 무한경쟁을 방임하거나 세계화(북한에서는 “미국화”로 번역)로 상징되는 글로벌 경제체제에 무비판적으로 적응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갈등을 불러 올 우려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넷째는 “복지국가”의 실현이다. “복지의 과잉”이라는 성급한 우려가 나온 적이 있지만 기실 대한민국은 아직 “복지국가” 단계에 도달했다고 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더구나 통일국가가 남북간 격차와 국제정세의 혼란을 수습하고 복지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름대로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하고 나아가서 개개인의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의료, 교육, 고용, 노후보장 등의 각 분야에서 안정적 삶의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사회복지는 통일 이후 남북간의 진정한 통합을 위해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탈북 난민들의 남한사회 적응과정에서 보이는 시행착오들은 본격적인 남북교류의 시대에 어떠한 문제가 우리 앞에 벌어질 것인지를 미리 보여준다. 그들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수준은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로 남한 사회에 적응할 것을 요구받는다. 더구나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회와 비용이 함께 주어진다. 정부와 민간이 안간힘을 써서 그들을 정착시키려고 지원하고 있지만 그 숫자가 사회복지 시스템 안에 들어갈 만한 숫자는 아니어서 만족스러운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매우 이질적으로 몇 세대를 살아온 두 거대집단이 본격적으로 교류하고 삶을 공유하게 될 때 수많은 갈등 상황에 부닥칠 것으로 예측된다. 때문에 구조적으로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체계와 개개인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는 것은 혼란을 막는 기능과 함께 진정한 남북간의 통합의 내용도 될 수 있다.
  다섯째로 항구적인 평화를 위한 정치, 외교적 구조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는 많은 전쟁과 많은 고난을 겪은 우리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논하는 통일이라는 것도 넓게 보면 하나의 “평화체제”를 목표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에는 극단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을 이루어 나가는 국가들이 다수 존재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극심한 인종갈등, 북아일랜드는 민족과 종교분쟁, 베트남은 체제갈등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통일국가는 과거와 현재의 갈등 요소들을 해소하고 화해와 협력을 이루어내는 상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국제관계에서도 한반도의 평화가 아시아와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변국에 심어줌으로써 그들이 한반도의 평화를 강력하게 지지하도록 해야 한다.
3.통일국가의 이념적 비젼

지난 세기의 “이념”은 어느 정도 맹목적 추종을 내용으로 하는, 그래서 우상성을 내포한 이데올로기로서 역사에 역기능적 요소를 가져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또한 공화정으로의 이행, 저개발국가의 발전전략 등 그 표방하는 것 이외의 실용적 목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최근에 와서는 과거에 금과옥조로 여기던 이념적 요소들이 경제성장과 국가이익에 반할 때에는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경향도 보인다. 가까운 중국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일당독재의 공산주의 국가이면서도 이미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자본주의적인 시장을 갖고 있다. 홍콩과 마카오에 대해서는 일국양제를 실시할 뿐 아니라 대만에 대해서도 기꺼이 일국양제의 제안을 내놓는 등 “국가 이익” 외에는 어떠한 일관성도 찾아보기 힘든 행보를 지속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가 중국에 대하여 비정상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 스스로 갈등 요소를 줄이기 위한 구조적 변화를 지속할 따름이다.
  우리가 통일국가를 건설한다면 통일된 독일과 같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경험이 공존하는 국가가 될 것이며, 단계에 따라서는 중국의 예와 같이 일국양제의 국가형태를 띠는 시기도 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반도의 영구 중립국화를 위한 논의도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우리에게 먼저 “이념적으로 열린국가” 의 체제를 염두에 두도록 요구하고 있다. 예전처럼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면 공산주의라는 이분법적 사고일 수 있다. 지금 돌아보면 이러한 이분법은 진지한 고민이라기보다는 전쟁이라는 극단적 갈등을 겪은 뒤에 나오는 후유증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열린 국가체제는 그 이념적 측면에서 우파적 정책과 좌파적 정책이 장점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시장 경제적 측면에서는 공정한 경쟁 환경이 보장되어야 하고, 사회 복지면에서는 평등이 실현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북한이 경험한 의료체계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북한의 의료체계는 예방의학 중심의 가정의 제도였다. 군 단위의 병원과 호 담당 의사가 정기적으로 주민들의 건강상태를 점검하고 그 결과에 따라서 상급 병원을 활용하는 식이었다. 물론 사회주의 특유의 무상 의료체계였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주민들은 건강하게 노동하고 휴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비효율의 덫에 걸린 경제는 의료장비와 의약품을 위시한 의료체계 유지에 필요한 자원들을 원활하게 공급하지 못했고 의료인들은 죽어가는 주민들 앞에서 무력했다. 2004년 4월의 룡천역 폭팔사고 당시에도 구호물자로 들어간 의약품이 도착하기 전까지 병원은 환자들의 집합소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외부에도 널리 알려진 바 있다. 만약 예방의학 중심의 비영리적인 의료체계에 사명감 있는 의료인들과 의료자원이 충분히 공급된다며 어떨까.
  앞서 언급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서 공산주의의 이념과 체제는 이미 존립가치를 상실했다고 선언한 부분은 지금 북한이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남북의 정상이 확인한 것은 “통일방안”의 유사성 수준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아직도 “우리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사회주의 이념만이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선전한다. 그렇다면 통일의 첫 단계로 “국가연합”의 단계에 들어선 뒤에도 이 태도에 변화가 없을 것인가. 표면적으로는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 체제는 건국 초기부터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 공산당과도 독립적인 노선을 걸어왔다는 것과 남측과의 협력사업, 장마당 등 사회주의 내에 자본주의적 요소를 가미해 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수였지만 학자들을 서방에 보내 경영학을 공부하게 하다가 2005년 독일 기업인이 학장인 “평양경영대학원”에서 국제상거래법, 경영전략 등 자본주의 경영학을 배운 30명의 MBA를 배출하기도 했다. 다른 국립대학들도 경제관련 교과목들이 늘어나고 있다. (헤럴드경제 2005.8.19. 파이낸셜타임즈 재인용) 이는 북한을 이념적으로 열린 장으로 견인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체제위협요소를 제거해 주면서 지속적으로 실용주의적 정책을 생산할 수 있는 명분과 시간을 제공한다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정도로 폐쇄적인 북한의 입장에서는 개혁개방의 방향 외에 다른 방향을 선택할 여지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자면 통일국가의 이념은 타협할 수 없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확고히 하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다양한 이념적 분화 속에서 선택 가능한 모든 가치에 대해 열려 있는 민주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향점을 목표로 두고 통일국가의 실현과정이 현재 우리 사회가 합의하고 있는 점진적 방안대로 남북연합 혹은 일국양제의 시기를 지내게 된다면 남과 북은 이와 같은 열린 이념체제로 수렴되기 위해 상호 신뢰 속에서 지속적인 노력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주변 국가들이 우리의 통일 방향을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는 환경도 필요하다. 이 일을 주도적으로 해 나갈 수 있을 때, 비로소 민족사의 숙원인 통일을 이룩할 뿐만 아니라 분단의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된 고통을 세계 평화를 위한 자원으로 활용하면서 세계사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봉사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