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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한국교회와 순교신앙"-주광조 장로(주기철 목사 아들)



한국교회와 순교신앙
시련의 달 고난의 달 6월을 맞이하여

주 광 조 장로

한국교회 120년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오늘의 한국교회의 이 엄청난 발전은 순교자의 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 순교자 중의 한사람인 주기철목사는 우리에겐 너무나 잘 알려진 순교자입니다. 그러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비참하게 죽어간 순교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이달 6월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6.25의 전쟁 와중에서 많은 순교자가 배출되었음을 알기는 하나, 그들의 이름도, 행적도 제대로 기억도 못한 채, 역사속에 사라져 버린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주제의 본론 발표에 앞서서,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사람의 순교자를 소개함으로서, 본 주제의 서론으로 삼고자 합니다. 주기철목사님 맏아들인 주영진 전도사의 순교 이야기 입니다.


6월이 오면 생각나는 것이 6.25 동란이고, 또 6.25 동란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6.25때 순교당한 큰 형 주영진(朱寧震) 전도사(고 주기철목사의 장남)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니까, 벌써 53년전이다. 내 나이 열 일곱...한참 꿈이 많던 그 시절, 나는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평양을 떠날 결심을 했다. 신앙의 자유가 없는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살수 없다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현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던 큰 형님...주영진 전도사를 찾아갔다

당시, 팔순이 넘으신 할머님을 모시고 있던 큰 형님은 함께 월남하자는 내 말에 전혀 머뭇거림이 없이 이렇게 말했다.
" 다 평양을 떠나면 누가 아버님이 순교하신 이 곳을 지키겠냐? 가라. 난 여기서 교회를 지키겠다." 그것이 큰 형님과의 마지막이었다. 울먹이며 막내 손자의 손을 놓지 못하시던 할머니에게 방학때 찾아오겠노라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긴 채 버스에 올라탔다. 1947년 5월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 월남해서 3년이 지난후, 6.25 전쟁이 발발했다. 형님 주영진 전도사가 순교했다는 소식과 그리고 형수님이 두 젖먹이를 끌어안고 88세된 할머니를 모시고 월남 피난을 기도하다가 실패하고 북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 정확한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이....그렇게 53년을 보냈다.

그리고, 작년 4월, 오랜 노력끝에 나는 일본 조총련에서 팩스 한 장을 받았다. 형님과 형수님에 대한 북한측 공식 문서였다. 북한 당국의 기록에 의하면, 형님 주영진 전도사는 악질 종교인에 수교목사로 1950년 반동 단체에 가담, 악질적으로 만행하다 체포, 처단되었고, 형수님 김덕성(金德聲) 사모는 당과 정부 정책에 반국가적 선전행위를 감행하다가 1970년 10월 26일 체포, 다음해 1월 15일.... 형님이 순교하신지 21년후인 51세 나이로 처단되었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주영진 전도사는 8.15 해방 다음해, 북한 공산당에 의해 두 번 구속당했다. 첫 번째는 교회안에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을 붙일 수 없다고 한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교회를 투표장소로 개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수주일을 위해 교인들로 하여금 투포에 참여하도록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후, 6.25 동란이 발발한 후, 다시 검거되어 서른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교의 길을 간 것이다.

그리고, 형님이 가시고, 이십여년간 처참하게 생활을 해 왔을 형수님 역시, 쉰을 넘긴 나이에, 반국가적 악질 선전행위를 한 죄목으로 처단되었다. 목사의 사모였던 아녀자가 무슨 반국가적 악질 선전을 했겠는가?...바로, 남편의 뒤를 따라 복음을 전하다 순교당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57세가 된 조카 주수현은 평양에서 추방당하고 함경북도 험준한 산골짜기에서 유배당하여 노동을 하며 두 살 밑인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잃고 25세때 어머니마저 처참하게 잃어버렸던, 소위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의 자손인 수현 조카의 그간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을지는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형님과 헤어진지 50여년만에 접한 이 북한의 소식에 나는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해가 갈수록 우리 뇌리속에서 6.25 전쟁과 분단 조국의 아픔이 잊혀져가고 있다. 더구나, 요즘, 6.25를 모르는 세대가 득세하면서 6.25가 더욱더 멀어져가는 느낌이요, 그와중에 피흘려 돌아간 수많은 순교자의 행적을 한국교회마저 잊고 있을 뿐 아니라, "봉수"요 "칠골"이요 하면서 북쪽에 짝사랑의 추파를 열심히 보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이다.
북녘땅에서의 종교적 탄압은 53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을. 오늘도...그곳에서는 수많은 믿음의 권속들이 순교를 각오한 채 고난중에 있음을 말이다. 아녀자의 몸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발각되면 비참하게 처단당하는 현실이 지금 북한의 모습이다. 한참 젊은 서른 나이에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목회자의 양심을 지키려다가 순교당한 이 땅의 젊은이가....백년 전 일이 아니고, ...바로 오늘도..여전히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차로 겨우 1시간정도 달려가면 닿는 그곳....바로 그곳에서...누군가 또 외롭게 신앙을 지키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순교..분명..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일이다. 그러나..그러나...일제치하에서 7년간의 옥살이와 고문 끝에 평양 형무소에서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돌아가신 아버님, 공산 치하에서 목회자의 양심을 지키려다 젊은 아내와 핏덩이 두 아이를 놓고 먼저 가야했던 형님, 그리고 목회자의 아내로서 남편을 따라 복음 전하다가 악질 선전을 한 죄목으로 처단당한 형수님...그리고, 불쌍한 조카와 그 가족을 생각하면서, 도대체 순교자의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반문하고 싶은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주영진 전도사가 1945년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목회자가 되어 1950년 6.25때 순교하기까지는 불과 5년이란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순교의 역사는 이미 그의 선친 주기철목사의 순교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본다면, 1939년 그가 일본 동경에 있는 신학교에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진학했던 때로 소급하여 볼 때, 11년이라는 짧지 않은 고난의 역사를 가진 것이 된다.

따라서, 그의 순교는 일회적인 순교가 아닌 사실상 계속적인 순교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순교자의 가족으로서 당할 수 있는 고난과 일본 유학시절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또한 북한의 공산 정권하에서의 신앙투쟁 등의 지속적이며, 초지일관적인 신앙적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운 산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히 12:4)


뿐만 아니라, 그의 순교21년이 지난후, 그의 아내였던 김덕성 사모까지 순교하였으니, 부자가 대를 이어 그리고, 부부가 같이, 즉, 한가족이 순교한 것이라 할수 있겠다. 그러기에 그의 두 자녀마저 "산 순교"라는 고난의 길을 현재도 계속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주전도사의 순교는 전가족의 순교라고 말할수 있겠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순교신앙은 왜 필요하며, 주목사와 주전도사의 순교가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 예수를 너무나 사랑했다. 예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도 기꺼이 받쳐야 한다는 "오직 예수"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이런저런 상황윤리나 시대형편을 접목시키지 않았다. 예수를 향한 사랑이 부모보다, 처자식보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기에 그것을 위해 그 나머지를 포기했다. 다시 생각해보지도 않았도, 뒤돌아 후회하지도 않았다. 예수 사랑은 곧 교회 사랑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교회를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영진 전도사가 생명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월남을 했거나, 혹은 공산정권과 타협을 했더라면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친 주목사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는 6.25 발발하기 1년 전에 자신의 심경의 일단을 교인들에게 이렇게 피력했다.

' 우리 약속합시다. 어떠한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우리는 교회를 버리고 가서는 안됩니다. 목숨 다하는 날까지 말씀 전파하다가, 말씀 지키다가 순교까지도 각오해야 합니다. '

두 번째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란 신조앞에서는 명예도, 평안도, 가정도, 자신의 생명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기 개인의 영광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이기주의, 개교회주의 그리고 감투에 너무 민감한 오늘의 한국교회에 시사하는바가 크다고 하겠다.

8.15 해방이후, 평양 산정현 교회는 출옥 성도인 한상동 목사를 주목사의 후임 담임목사로 결정하고, 주영진전도사를 동사 사역자로 시무하게 했다. 주전도사는 주로 주일저녁예배와 수요예배 때 강단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의 설교가 너무나 은혜스러워 온 교인들이 주목사의 설교를 다시 듣는 것 같다고 기뻐하며 감격해 하곤 했다.

산정현교회가 다시 문을 연후, 당회는 주목사 추모기념관과 동상을 교회부지내에 건립하기로 결의했었다. 오정모 사모는 이 결정에 완강히 불복했다. 주목사의 순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 것으로 그 자신의 생명을 다하신 것이라고 하면서, 그가 가신 발자취에는 하나님의 영광만이 남아야지 주목사의 그 어떤 형태의 모습이나 공적이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오사모는 교인들이 주일날, 예배 드리러 교회에 왔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만을 찬양, 경배해야지 주목사가 그것을 가리우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결국 교회는 주목사 추모기념관 짓고 동상세우는 것을 취소했다.

같은 맥락에서 어머니 오정모 사모는 주목사의 맏아들이 산정현교회의 교역자로 시무하는 것을 별로 반겨하지 않았다. 주영진 전도사가 주목사의 후광을 입어 주목사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주목사의 아들 행세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교회의 주인되시며 머리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 또한, 교회에서도 영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뿐이다." 이것이 오정모사모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유로, 결국 주전도사는 산정현교회를 떠나, 평양에서 약 20Km 떨어진 출석교인 100여명의 장현교회에 담임 전도사로 부임했고, 3년후 그 교회를 500여명의 교회로 부흥시키고, 결국 그곳에서 순교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이 영광을 위해서 주목사도 흔적 없이 사라져야했고, 그 아들 주전도사도 설교 한편도 이 세상에 남겨놓지 못한 채, 역사 속에 파묻혀 버린 것이다.

주전도사는 그의 짧은 생애와 목회기간을 통하여 오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목회 현장에서 본받아야 할 몇가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첫째, 하나님 말씀 중심의 철저한 목회
둘째,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아니요"를 담대하 외친 불굴의 리더쉽
셋째, 교회와 양떼를 죽기까지 사랑한 목자로서의 신앙
넷째, 자신을 가해하는 원수까지도 사랑으로 포용했던 참사랑의 실천
(* 제8회 주기철 목사 기념강좌 논문 2003. 4월 발간 참조)

그는 끝까지 불의한 공산정권과 타협하지 않았고, 교회 안에 불순한 세력들이 들어오는 것을 몸으로 막았다. 교회 안에 성수주일을 방해하는 어둠의 세력들이 들어오는 것을 단호하게 막고 나섰고, 공산주의의 귀신이 들어오는 것을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의 각오로 막고 나섰다. 그는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오늘 물질과 타협하고, 명예와 타협하고, 권력과 타협하고,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타협하므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본질적인 사명을 잃어버려가고 있는 한국교회 안에서 우리는 불의를 향해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아니요"를 담대히 외친 참된 지도자들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주목사나 주전도사는 우리 한국교회에 참된 목회자상을 보여 주었다. 그들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았으며,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받친 것이다. 아마도 오늘 한국교회가 요구하는 목회자상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격려할 수 있는 그런 목회자가 아닐까!

한국교회가 천만성도, 4만 교회, 5만 교역자로 양적으로 발전한 것이 바로 순교자의 피의 값으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면서 안일에 도취하고 있을 동안, 그들 순교자의 역사적 흔적은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다. 그리고, 순교자의 자녀들은 천하의 고아로 떠돌면서 굶주림에 떨며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사회에서 도퇴 되어갔고, 영적으로는 선진의 믿음을 이어받지 못한 채, 교회 울타리 밖으로 배회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는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교회 크기를 키우고, 성도 수를 늘리기 위해 전도와 선교라는 아름다운 말을 함부로 쓰고 있다.
교회는 분명 전도를 통해 부흥한다. 그러기에 교회의 생명력은 전도에 있다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전도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바로, 순교신앙이라고 말할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그 순교신앙은 소홀한 채 외형의 양적 팽창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순교신앙하면 너무 거창하게 들려서 마치 총칼 앞에서 죽음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전도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오늘에 있어서 순교정신은 무엇인가? 자신의 것을 희생하는 것이고, 포기하는 것이며, 우선순위에 따라 양보하는 것이기도 하다. 복음을 위해 나를 포기하는 것이며,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겸손히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원수까지도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이다. 마치, 주기철목사와 주영진전도사가 복음 그 자체의 존립을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순교했던 것처럼 말이다.

한국교회는 이 순교신앙을 다시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순교신앙이 회복될 때,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체에서 벗어나 다시 비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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