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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의 딸,유관순



3. 1 운동 84주년을 맞으면서 신앙의 선배 한 분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 분은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으로 꽃다운 청춘을 몽땅 제물로 바친 순교자요 순국 열사인 유관순입니다. 유관순은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으로 불탔던 신앙의 딸이었고 민족 사랑과 나라 사랑으로 불탔던 애국의 딸이었습니다. 그를 가리켜 한국의 잔 다크라고 합니다. 유관순은 한경직 목사님이 태어나신 해인 1902년 11월 17일 천안군 병천 마을(아우네 마을)에서 유중권씨와 이소제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유씨 가문은 문예의 가문이었고 의병장의 가문이었고 효도의 가문이었고 교육가의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가문은 신앙의 가문이었습니다.  

첫째 유관순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 신앙의 딸이었습니다.  
유관순의 외모는 넓은 이마와 미간, 약간 큰 눈은 광채가 나고, 곧게 선 코가 남자다운 영특한 기상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장난을 좋아해서 여자 아이면서도 늘 대장 노릇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시원한 외모와 활달한 성품을 지녔고 아버지는 내성적인 성품을 지녔는데 아버지가 친척 유빈기씨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였던 조병옥 박사의 부친인 조인원씨 그리고 유빈기씨와 함께 1908년에 마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매봉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매봉교회와 아버지로부터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의 신앙을 배웠는데 나라를 구원하는 길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길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배웠습니다. 마치 한경직 목사님이 어려서부터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이승훈 선생과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영특한 유관순은 선교사들의 눈에 띄어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신앙을 키워갔습니다. 당시 공주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사 애리사(Alise H. Sharp) 선교사의 지도를 받아 공주 영명 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다시 사 애리사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6년 14살의 나이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하며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의 신앙을 더욱 더 굳건하게 키워갔습니다. 유관순은 공부를 열심히 했을 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이 잠들었을 때 기도실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는 신앙이 독실한 학생이었습니다. 가난한 친구에게 자기가 먹을 점심을 주고 자기는 점심을 먹지 않고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매사에 적극적이며 친구들과 좋은 교우관계를 가졌고 봉사정신이 강했습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때 두 사람으로부터 큰 감화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누군가를 만나 감화와 감동을 받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너무나 중요합니다. 유관순은 정동교회의 손정도 목사와 이화학당의 박인덕 선생을 만나 그분들로부터 많은 감화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손정도 목사는 숭실 중학교와 협성 신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 하얼빈지방에 가서 선교사역을 하다가 1915년부터 정동제일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던 분이었습니다. 손정도 목사는 정동 강단에서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늘 강조하였는데, 유관순은 2년 동안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의 가슴이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으로 불타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에게 영향을 준 또 한 사람은 이화학당의 박인덕 선생이었습니다. 박인덕 선생은 이화학당에서 기하, 체육, 음악을 가르치면서 애국애족의 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던 분이었는데 박인덕 선생은 동생과 같은 유관순을 극진히 사랑하고 격려했습니다. 박인덕 선생은 유관순이 살았을 때는 물론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을 때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도 유관순을 너무나 사랑하고 귀하게 여긴 분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사랑과 격려를 받는 것은 인생을 바로 살아가는데 너무나 큰 힘이 됩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한국의 잔 다크가 되어서 나라를 구할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착한 마음씨를 갖기를 소원하고 있었습니다. 높고 귀한 소원을 품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둘째 유관순은 나라를 사랑한 애국의 딸이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신앙인의 당연한 삶입니다. 모세가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고 사도 바울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동족을 향한 그의 뜨거운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유관순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다가 무참하게 짓밟혀죽은 민족의 꽃이었습니다. 일본 군인들이 온 나라를 장악하고 있던 때 누가 감히 길거리에 나가서 나라를 사랑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무참하게 짓밟혀 죽기를 원하겠습니까? 유관순은 그것을 원했습니다. 유관순은 숨거나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길거리에 나가서 나라 사랑을 힘있게 외치다가 짓밟혀 죽고 말았습니다.

유관순이 정동교회의 손정도 목사와 이화학당의 박인덕 선생의 영향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워져 불타고 있을 무렵 이화학당에는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학생들의 비밀 결사 모임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비밀결사 모임인 이문회는 1919년 2월 28일 정기모임에서 3. 1 운동 때 전교생이 소복을 입고 대한문으로 가서 만세운동에 합세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학교측에서 사전에 눈치를 채고 교문을 잠그고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학생들이 다칠까봐 염려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15명의 학생들은 교문을 밀치고 나가 남대문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고 유관순은 6명의 학우들과 함께 기숙사 뒷담을 넘어 파고다 공원으로 달려가서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학생들까지 만세 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일제는 3월 10일 임시 휴교령을 내려 서울시내 학교들은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유관순은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유관순은 3월 13일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병천 아우네 마을에 내려와 보니 시골은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유관순은 서울 만세운동 소식을 온 동네를 뛰어 다니며 전했습니다. 나라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독립만세를 불러야 된다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야기를 했지만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유관순은 어린 조카 유지하를 데리고 매봉산으로 올라가서 살을 에이는 추운 날씨였지만 3일간 하나님께 나라를 위하여 통곡을 하면서 몸부림치며 방언으로 기도하고 내려 왔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올 때 유관순의 얼굴에는 확신이 차 있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잃은 나라를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때 듣는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유관순의 말에 동의를 하고 음력 3월 1일 (양력4월 1일) 병천 장날 정오에 만세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유관순은 기뻤습니다. 여우와 범을 만난다고 장정도 꺼리는 높은 산들을 밤에 몇 개나 넘어 발이 짓물러 시골길을 걷기가 어려웠지만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면서 천안,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 여섯 고을을 다니며 연락을 했습니다. 드디어 음력 2월 그믐날 밤 매봉산에 올라가 거사를 알리는 봉화를 높이 들었습니다. 여섯 고을의 산봉우리 24곳에서도 만세운동에 참여한다는 봉화가 타올랐습니다.

음력 3월 1일 (양력 4월 1일) 병천 장날 정오에 아우네 장터에 모인 농민들이 힘을 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놀란 일본 헌병들이 주재소에서 뛰어 나와 해산 시키려고 했지만 흥분한 주민들의 만세소리가 점점 커지고 참아왔던 울분이 터져 나왔습니다. 헌병들은 총을 쏘며 진압을 했지만 총탄에 맞아 쓸어지면서도 군중은 계속해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5-6백 명이 모였으나 오후 4시경에는 3천명이나 모였습니다. 유관순은 자신이 밤새 만든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며 목이 터져라 힘차게 만세를 불렀습니다. 헌병이 총을 쏘려 하자 헌병에게 달려들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부친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유관순은 계속해서 헌병에게 달려들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것을 본 농민들은 더욱더 힘을 다해서 천지가 뒤흔들릴 정도의 함성을 지르며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아우네 장터의 만세였습니다.  

셋째 유관순은 하나님 사랑과 나라사랑으로 목숨을 바친 순국열사였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손동인군과 손동신 군은 주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다가 죽었고 손양원 목사님은 나환자들을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있다가 죽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에 걸려 있는 사진 한 장을 바라보면서 뜨거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수 해변에 떠 있는 조그만 배의 사진이었습니다. 6.25 사변이 일어난 후 선교사들이 배를 준비하고 손양원 목사님과 가족으로 하여금 피난을 가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그 배를 타기를 거절했습니다. 미리 실어 놓았던 짐을 다 내려 놓게 했습니다. 그리고 애양원의 나환자들과 함께 있다가 그 해 9월 28일 밤 11시 경 인민군들에게 끌려가다가 미평에서 총살을 당해 죽었습니다.

유관순은 나라를 사랑하다가 형무소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해 죽었습니다. 아우네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던 유관순은 체포되어 천안 헌병부대 유치장에 10여 일을 갇혀 있다가 공주 법원으로 송치되었습니다. 1919년 5월 9일 공주 지방법원에서 7년 구형에 3년 언도를 받았으나 나중에 법정 모독 죄가 추가되어 7년형을 받아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복역하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유명한 애국 지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특히 박인덕 선생을 그곳에서 만나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박인덕 선생은 유관순의 비장한 각오를 듣고 우리에게 능력과 힘을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자고 격려하며 기도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느 듯 시간이 흘러 유관순은 옥중에서 3. 1 운동 일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대문 감옥 8호실에서 다시 만세운동을 부를 것을 계획했습니다. 만세를 부르다가 끌려온 사람들이 그대로 주저 앉지 않고 계속해서 만세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어윤희 전도사를 통해 감화를 받은 여 죄수 하나가 이방 저 방으로 밥을 날랐는데 그녀를 시켜 은밀히 죄수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즉 3월 1일 사무실 괘종 시계가 두 번 울릴 때 만세를 부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920년 3월 1일이 되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 안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만세 소리가 함성처럼 울러 퍼졌습니다. 절도, 강도 사기범들도 모두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습니다. 감방에서 터져 나온 만세소리를 길 가던 사람들이 듣고 서소문 일대의 군중들이 삽시간에 모여들어 전차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수라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주범을 찾으려고 혈안이 된 일경은 감방을 구석구석 수색하다가 각 방에 전달되었던 쪽지를 찾았습니다. 이 일로 극심한 고문을 당한 유관순은 방광이 터지고, 이신애는 유방이 파열되었다고 합니다. 유관순은 매를 맞아 성하지 않은 몸이지만 매일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럴수록 유관순은 잔악한 일경에 의해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박인덕 선생은 사랑하는 어린 제자가 걱정이 되어 밥을 나르는 여인을 통해 "만세 부른다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몸만 상할 뿐 아니라 감옥에 있는 동지들에게도 해를 끼치게 되니 부디 참고 기다리자" 는 부탁을 했습니다. 존경하는 박인덕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만세만 부르던 유관순은 옥중에 있는 동료들을 돕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한 번은 만삭의 몸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옥에 갇힌 노영애가 출산으로 잠시 보석되었다가 아기를 낳은 후 재 수감이 되어 감옥에서 아기를 키우는데 유관순과 한방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은 산모에게 자기 밥을 덜어주고, 미처 기저귀가 마르지 않으면 오줌을 싼 기저귀를 손으로 짜서 허리에 감아 말려서 채워 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은 3. 1 운동 후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하거나 회유하여 감형으로 출옥을 시켜 주었으나 유관순은 매수도 회유도 되지 않았습니다. 유관순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일본의 갖은 잔악한 술책에 저항하다 마침내 1920년 10월 12일 18살의 꽃다운 생을 마쳤습니다. 그는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순교자였고 나라의 독립을 이루려다가 죽은 순국자였습니다.

유관순이 죽자 감옥의 책임자들은 만신창이가 된 시신을 비밀리에 처리하려고 하였으나, 이화학당의 교장인 프라이 선생과 월터 선생이 달려와서 시신을 인계 받았습니다. 유관순을 사랑하고 아끼던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던진 그녀를 위해 수의를 만들어 입혀 주었고, 이화학당 프라이 교장은 성경 책 한 권을 사랑했던 제자의 가슴에 안겨 주었고, 친구들은 양손에 꽃을 쥐어준 뒤 입관을 하고 이튿날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장례식을 치른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습니다.

유관순은 나라를 사랑하다가 꽃 다운 청춘을 조국 독립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홍창석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관순은 교회를 사랑하다가 교회를 위해서 그의 생애를 제물로 바쳤다. 유관순은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교회를 떠나본 일이 없었다. 유관순은 교회에서 나서 교회에서 자랐고, 교회에서 배웠으며, 교회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죽어 교회가 그녀를 장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유관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맑은 마음과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던 뜨거운 마음을 남겨두고 하늘로 갔습니다. 비석이 없어 무덤을 찾을 수 없고, 유품하나 남겨 두지 않은 채, 오직 수의를 입은 사진 한 장만을 남겨두고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자기 자신들보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했고 나라를 먼저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자기 자신을 순교와 순국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1층 로비에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묘지의 사진들이 걸려 있습니다. 지난 주에 제가 순교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분들 때문에 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제일 먼저 사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 나라를  사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순교적, 순국적 삶을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변교회 김명혁목사 주일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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