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갯불에 콩튀듯,한 해가 가고 또 입시철입니다. 대학졸업자들이 흔해진 요즘은, 대졸예정자들의 취업시험난까지 가세, 사회 전체가 가히 입시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가뜩이나 어수선한 연말연시 분위기를 한결더 을씨년스럽게 만듭니다.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문화풍속이 아무리 많이 달라져도,맹자 어머니, 한석봉 어머니, 신사임당 등으로 대차게 이어져 오는,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모심(母心)'만은 내내 한결같은 듯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 제 고향 동네와 외가 동네 사이엔 '영당고개'라는 예쁜 이름의 작은 재가 하나 있었습니다. 일찍 혼자되셔서 제 어머니와 외숙, 이렇게 두 남매와 함께 퍽 고단하게 사신 외할머니는,비록 외손이지만 첫 손자인 저를 끔찍이도 아껴주셨고,덕분에 어린 시절 저는 어머니보다는 외할머니의 사랑 품에서 더 오랜 시간을 지냈습니다.
이미 40년이 넘게 흘러버린 지난 일. 외할머니께서 세상을 뜨신 지도 벌써 20년이 가까와오는데도 고향동네 앞산,외할머니 손잡고 타박 타박 넘어 다니던 영당고개를 생각하면 괜스레 가슴이 설레고 눈시울이 젖어옵니다. 무척 바지런하고 인정 많으셨던 외할머니가 몹시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번씩 외동딸네집에 다녀가실 때마다,영당고개 고갯마루가 가까와오면 외할머니는 늘 잔솔가지 두 개를 꺾으셔서 그 중 한 가지는 당신이 갖고,또 한 가지는 제 조막손에 들려 주시곤 했습니다.
조금 더 가다가는,좀 고와 보이는 돌멩이 두 개를 집어서 그 중 하나를 또 제 손에 쥐어주십니다. 어린 손에,할머니께서 마련해 주신 솔가지와 돌멩이를 고이 들고 허위 더듬 고갯마루에 다다르면,거기엔 늘 기다린 듯 성황당이 있었습니다. 우리 말고도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는지, 성황당엔 언제나 자잘한 솔가지와 돌멩이들이 수북했습니다.
"할미 따라 하거라!" 할머니 따라 돌멩이와 솔가지를 성황당에 정성껏 던지고 나면, 할머니는 그 큰(당시에는 매우 크게 느껴졌지요) 손으로 제 머리를 꾸욱 눌러서 성황당에 대고 크게 인사를 시키고는 지극정성으로 손을 비비며 "우리 광우 제발 크게 잘되게 해줍소사" 축원해 주시곤 했습니다.
먹을 것이 그토록 귀하던 시절에도 외할머닌 '큰일 할 사람이 어려서부터 찬밥덩이나 먹으면 안된다'고,할 수 있는 대로 외손자 녀석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려 늘 애를 쓰셨지요.
외할머니의 그 "성황당 믿음(?)"이 오늘 제 삶의 방향을 표나게 달라지게 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여하튼 그런 외할머니의 따스한 사랑만은 지금도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 어머니께서 예수 믿기 전, 어머니 역시 그 어머니에 그 딸 답게 장남인 제가 잘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해주셨습 니다.
어느 고명한(?) 이에게 물으니, '큰아들 사주(팔자)가 아주 좋은데,아무 데나 절간에 팔아주면 훨씬 더 잘될 거'라는 충고(?)를 따라,저를 어느 암자에 거하는 어느 비구니에게 팔아주었고, 일정 기간마다 우리 집에 들르는 그 비구니를 저더러 꼬박 꼬박 "어머니"라고 부르게 하시며,그 분이 오갈 때마다 어려운 형편을 돌보지 않고 지극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또,시험 볼 때면, '배냇저고리(갓난아이가 태어나서 맨 처음 입은 옷)'를 품고 가면 좋은 성적이 나온다고,손수 광목을 누벼만든 제 배냇저고리를 똘똘 말아 바지춤에 채워주시곤 했습니다. 저 역시 예수 믿기 전이었는지라, 으레 그러는 것인 양 그 저고리를 품고 시험장에 나가곤 했습니다.
……방식(처방?)은 조금씩 달라도 자식의 앞길을 진심으로 축원하는 어르신들의 정성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변함없는 듯합니다. 특히 대학입학 수학능력 시험을 전후한 무렵이면,입시가 치열해지는 만큼 오히려 더 극성스러워진 모정(母情)의 일단을 거듭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험을 앞두고는 일정기간 동안 손톱 발톱을 못 깎게 한다든지, 시험 당일에는 아무리 생일날이래도 미역국을 안 끓인다든지, 척척 달라붙고 늘어붙으라고 엿과 찰떡을 턱이 뻑뻑할 정도로 물려준다든지, 그 아까운 엿을 지원 대학 정문에 목판떨이로 갖다 붙여놓아 추운 날씨에 애꿎은 수위아저씨를 엿먹인다든지, 시험 100일 전 술을 먹으면 점수 잘나온다고 백일주 먹고 해롱거리게 만든다든지…….
엊그제,어떤 형제를 만나 '입시철 찰떡' 얘기를 했더니, 저더러 구세대도 한참 구세대라며 반쯤 놀리는 겁니다.
"그럼 요즘은 찰떡 대신 무엇을 주느냐" 물었더니,요즘은 술술 풀리라고 너나없이 "화장지"를 선물하는 바람에 입시 철이면 화장지 장수들이 신바람 난다는 겁니다. 얘기를 들으며,'아하,그러다가 혹 입시결과가 나쁘면 남은 화장지로 눈물 닦으면 되겠다'는 알뜰히도 경제적인(?)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사주보고,관상(수상 골상 심지어 족상까지) 보고,신수보고, 일진보고, 집터보고, 묏자리보고, 연말연시 식구들끼리 모여 앉으면 그저 재미 삼아 토정비결보고, "8월에 물가에 가지 마라", "7월에 남방에서 귀인이 온다"는 빤한 거짓말에 괜히 허망한 마음이 들뜨고…….
요즘 같은 문명한 세상에도 고속터미널에서 그저 재미 삼아 컴퓨터 사주나 보며 해죽거리고,스포츠신문에 실린 각 띠별 "오늘의 운세" 나 점성술의 점괘를 눈 빠지게 검토하고,거국적인 무슨 행사를 할 때마다 "전통문화"를 빙자하여 죽은 돼지머리에 절하는 장면을 TV로 생중계하고…….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그 위하는 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요 공장(기술자)의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요동치 않게 하나니,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너희는 두려워 말라(구약성경 예레미야 10장 3-5절).
너희는 우상을……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구약성경 레위기 26장 1절)
……내 자식이 공부를 어찌했건,그저 영험 있다는 바위를 수소문하여, 어디라도 달려가 요즘 같은 추위에 무심한 바윗돌 아래서 몇 날 며칠 자식을 위해 철야하며 빌어대는 우리네 인정 많은 어머니들…….
허나,하나님 앞에 밉보이는 이 무지한 "헛 정성"으로 "천국 입시"(?)에 모자(母子) 함께 아득히 낙방하고 있음을 과연 언제나 아실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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