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언간 또 단풍 철이 되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만 해도,도무지 시들지 않을 듯이 짙푸르던 이파리들이,앞다투어 슬그머니 각기 다른 채도의 브라운 가을빛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 가을빛을 행여 놓칠세라,빨강 노랑 등산조끼에 배낭을 메고 산행을 나서는 사람들의 모습이 몹시도 부러워보이는 계절입니다. 학창시절 같으면야 학사일정에 따라서 가을마다 꼬박꼬박 소풍 한번씩은 다녔는데,그 설레던 학창시절도 다 흘러버리고, 혼자 소풍 챙겨 나서기도 왠지 조금은 멋쩍은 나이가 슬그머니 돼버렸습니다.
어느덧 제 머리에도 흰머리가 듬성거리고,어쩌다 군대시절 검은 베레모를 쓴 사진 속의 제 모습과 지금의 얼굴을 견주어보면,도둑맞은 듯 달아나버린 한 움큼 세월의 뭉치를 별 수 없이 확인하게 됩니다.
특히 요즘처럼,단풍 소식이 도처에서 전해져오는,조금은 스산한 계절이 되면,그런 느낌은 더욱더 가중되어옴을 느낍니다. 제 고향은 전라도 정읍입니다. 정읍을 잘 모르시는 이들도 어쩌면 '내장산'만은 꽤 잘 아시겠지요. 바로 그 내장산이 있는 샘고을(井邑)에서 저는 유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그 좋다는 내장 산이 지척에 있어서인지,소풍 때마다 정말 지겨울 정도로 찾아 다닌 곳이 내장산입니다.
……선생님 따라,까마득한 비포장 신작로를 줄서서 걸어갔다가,서둘러 도시락 까먹고,노래자랑 한 바탕하고,다시 빈 도시락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벗삼아 터덜거리며 돌아오는 것이 우리들의 학교 소풍이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은 언제나 그 소중한 가치를 잘 모르는 것인지, 단풍잎보다 더 많은 외지 사람들이 가을마다 구름떼처럼 몰려와서 "좋다 좋아"를 연발할 때마다, 뭐가 그리 좋다는 건지 내심 무던히 의아스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 고향 정읍 사람들은,"단풍"에 대해서 만은 거의 다 나름대로의 일가견을 갖고 있습니다. 내장산 단풍이 유명한 것은 사실이지만,내장산 단풍이라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가을단풍이 해마다 똑같은 것도 물론 아니지요.
단풍이 정말 단풍답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후적인 요건들이 잘 맞아떨어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단풍빛깔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늦가을 '서리'입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워내는 마지막 채근으로 '무서리'를 말했지만,국화에게만 서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단풍 역시 무서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느닷없이 된서리가 내리면 안됩니다. 그럴 경우, 단풍 빛이 전혀 나지 않은 채,단풍잎이 그냥 갈색으로 낙엽져 버리기 때문입니 다. 상당한 기간 동안 매우 약한 서리(무서리)부터 점차로 강한 서리(된서리)가 순서대로 꾸준히 내릴 때, 단풍 빛이 제대로 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서리만 잘 내리면 무조건 단풍빛깔이 제대로 나는 것도 아닙니다. 서리와 함께 적당량의 가을비가 제 때 제 때 내려야 합니다. 금년 가을처럼 가을 가뭄이 지속될 경우, 아무리 서리가 서서히 잘 내린다 할지라도, 적당한 강수량 이 없으면 역시 단풍잎이 찬란한 빛깔을 준비할 틈도 없이 갈색의 낙엽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서리와 가을비가 정말 적당히 내리는, 모처럼의 어느 가을날의 내장산 단풍. 그것은 그 어떤 화학염료로도 흉내낼 수 없는 정말 신비로운 빛깔로 우리네 무뎌진 가슴을 두들깁니다. 제 아무리 미당 선생이라도 그 빛깔을 함부로 시(詩)로 담아낼 수 없는, 장엄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한 눈부신 선홍빛깔이 나오게 됩니다.
이파리 하나 하나가 그럴진대,그런 황홀한 단풍이 온 산 "안에 가득 감추어져 있는(內藏)" 모습은 가히 천하의 비경(秘境)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그러나, 고희(古稀)를 훌쩍 넘기고도 동안(童顔)에 순은백의 머리칼을 지닌 노인들을 보면 까닭 모를 신비로움이 느껴지듯, 황홀한 가을 단풍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그 감격 역시 솔직히 좀 처연(凄然)한 데가 있습니다.
단풍은 서쪽 하늘을 눈부신 황금빛으로 장식하고 떨어지는 석양과 너무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석양의 노을 빛이,일출의 싱싱한 황금햇살이 주는 감격에는 비길 수 없듯, 단풍 빛이 아무리 곱단들,초봄의 신록이 주는, 좀은 여려보이는 연녹의 물결이 주는 잔잔한 감동과 결코 같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보편적인 것'은 응당 '필연적인 것'으로 쉽게 용납하는 매우 잘못된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너나없이 단풍들고 낙엽지기 때문에,가을되면 단풍들다 낙엽 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듯, 너나없이 세월 따라 흰머리 나고,주름잡히고,허리 굽다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그 "죽음"이란 것이 우리 인생에게 매우 필연적인 일이라고 쉽게 체념하며 수긍해 버립니다.
잘못됐습니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지요. 인간이 범죄함으로 어쩌다 육체의 사망을 너나없이 맛보게 됐지만,원래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셨을 때,"사망"은 이름도 없었습니다. 곧이 듣기지 않으시겠지만,그게 엄연한 사실(구약성경 창세기 1-2장 참조)입니다.
생각건대,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단풍]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자기 뜻이 아니요,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신약성경 로마서 8장 18-22절)
푸르른 이파리가 단풍들고 낙엽 지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인생이 단풍드는 것 역시 결코 정상이 아닙니다. 단지,예수님이 재림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일시적으로 "허무한 데 굴복하고,썩어짐에게 종노릇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모든 슬픈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 가을, 만산에 가득한 단풍의 처연한 빛깔에서,피조물의 탄식소리와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이 다시 오시기를 갈망하는,가슴 설레는 무언의 함성을 꼭 들으셔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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