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십여년전,신혼 초에,정읍↔전주 간 왕복 200리 넘는 길을 6년 가까이 통근한 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통근해 보신 분들은 다 공감하시듯이,장거리 통근은 언제나 몸보다는 마음을 더 곤하게 합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나오는 첫마디는 으레, "아, 또 가야하는구나"
이며,하루 해가 기우는 오후가 되면,직장 동료들과 퇴근 후의 아기자기한 여유를 누릴 틈도 없이 역시 또 "가야만 한다"
는 생각으로 마음이 옥죕니다. 한두 달도 아니고 적어도 수 년간씩 이런 생활을 하다보면,아무리 무쇠청년이라도,점차 몸도 처지고 마음도 소금절인 배추처럼 되어,느느니,붐비는 통근길 직행버스에서 자리잡는 요령밖엔 없습니다.
……그 지겨운 통근생활에 이골이 나던 어느 해 늦봄. 그 날따라 아침이 좀(평소보다 한 5분 정도) 늦어져서,등에 땀이 날 정도로 정신없이 뛰어 마악 출발하려던 전주행 버스에 매달렸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러시아워이기 때문에 버스 통로에도 사람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거의 본능적으로, 한 시간 동안 몸을 기댈 공간을 잽싸게 확보하고 잠시 숨을 돌리는 순간,우와!,웬일로 운전석 바로 다음 다음의 '로얄석' 하나가 멀쩡하게 비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앞뒤 잴 것 없이 수년간 다져진 놀라운 순발력으로 몸을 날리다시피 그 자리에 더럭 앉았습니다. 승리의 휘파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그런데 잠시 후,사람들의 뜨뜻한 시선이 느껴져서 주변을 휘 올려봤더니,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묘하게 저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잘못됐다' 는 생각에 잽싸게 제 몸을 훑어보았지만 별 이상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제 옆자리 창문쪽 좌석에 잔뜩 웅크린 채 얼굴을 모로 돌려 앉아 있는 어떤 노인을 보게 됐는데,바로 그 순간,그 노인의 몸에서 도무지 형언할 수 없는 역겨운 냄새가 휘몰아왔고,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울러,제 뒤꼭지 쪽으로는 아까보다 더 따가운 사람들의 시선이 비수처럼 날아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진퇴유곡. 그렇습니다. 정말 진퇴유곡이었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통근에 베테랑인 사람들이 그 로얄석을 마다하고 통로에 서 있었던 이유가 너무 늦게야 분명해지고 있었습니다.
'어떻한다?' 너무나 날래게 그 자리로 "돌진"하던 제 모습을 이미 사람들이 다 본 터라,슬그머니 다시 일어서자니,한 시간 내내 또 다시 사람들의 조소를,서서 받아낼 자신이 없고, 더더군다나,'예수 믿는 사람'의 그날 따라 달갑잖은 양심이 더욱 큰 무게로 제 몸을 그 역겨운 자리에 계속 잡아 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속뒤집어지는 냄새를 계속 맡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정말 죽을 맛이고…….
……마침내 저는 그 자리에 계속 앉아 한번 버텨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차가 한번 흔들릴 때마다 쏟아져오는 악취는 도무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기도를 그리 열심히 하던 편이 아니었음에도,할 수 없이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제발 제 코신경을 한 시간만 죽여주세요."
곧이 듣기지 않겠지만,저의 그 눈물어린 간청(?)이 받아들여져서 신통하게도 저는 이내 그 냄새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그 러자 저는 서서히 그 로얄석을 손쉽게 점령(?)한 환희를 얄궂게 다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악취에 어느 정도 무덤덤해 지자,슬그머니 창가의 그 할아버지를 찬찬히 뜯어볼 마음의 여유까지 생겼습니다.
……손가락이 세개나 없는 주먹손, 흐르는 진물, 허옇게 곯아버린 한쪽 눈, 몽그라져버린 머리털……. '무슨 병일까, 무슨 병이기에 이토록 처참할까' 열심히 생각하다가,웬일로 "전도"하고 싶은 생각이 갑자기 나서 그 노인께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저 쪽으로 눈길 한번도 주지 않은 채 묵묵부답이었으나,저의 태도나 말투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지,얼마쯤 후에야 여전히 고개는 창쪽으로 고정시킨 채,노인은 제 물음에 조금씩 답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향이 우리고장 고창 어디라는 것,처자식 거느리고 잘 살다가 느닷없이 나이 40에 문둥병이 발병,고향을 떠나 경남 산청 어느 골짝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나환자 수용소에 들어간 지 벌써 17년째(당시로서)라는 것,날마다 아내와 자식이 보고싶어 미칠 지경이라는 것,
세월이 흐르면 그리움이 잠잘 듯도 한데,시간이 갈수록 그 그리움은 더 심해진다는 것, 더 슬픈 것은,처자식들까지도 자신을 꺼리기 때문에 17 년 세월 동안 식구들을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는 것. 그 동안 자식들에게 누가 될까봐 고향에 한번도 안 왔지만 (사실은 눈이 멀어가고 있어서 버스를 제대로 골라 탈 수 없기 때문에 못 온 것임),
이번에 막내아들 결혼식이 있다는 소식을 어찌어찌 듣고 간신히 허락을 얻어 외출을 시도했고,이제 내일이면 결혼식인데,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한 이틀 앞당겨 와서 밤시간을 틈타 처자식을 동구 밖에서 잠시 본 후,되짚어 산청 수용소로 가는 길이라는 것… ….
서정주 시인의 말마따나,정말 '해와 하늘빛이 서러운 세월, 꽃처럼 붉은 울음의 세월'이었습니다.
……얘기를 들으며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고,엉성하나마 저는 노인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이미 인간에게서는 소망의 줄이 철저히 끊겨버린 그 할아버지는 순순히 그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버스가 전주시내에 들어설 무렵,마침내 그 분의 손을 붙들고 간절히 눈물로 함께 기도했습니다. 터미널에 닿자,손가락 발가락도 별로 없이 뒤뚱거리는 그 분을 부축하여 터미널 안으로 인도,산청방면 표를 끊어드렸습니다.
내친 김에,남원방면 승강장까지 모시고 갔더니,마침 산청까지 직행하는 버스가 있어 자리를 잡아드린 후 아침식사도 안하신 것 같아 우유 한 병과 빵 한 개를 사드렸습니다. 덕분에 그날 왕창 지각했고,온종일,'조교가 교수보다 출근이 늦다'는 군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묘하게도 믿노라하면서도 사실은 문둥병 걸려 하릴없이 진물 나던 저의 '나이롱신앙'을 탓하지 않고 사랑으로 받아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날, 주 예수님은, 나병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제 곁에 오셨던 것입니다. 저처럼 추악한 죄인에게 말입니다.
이광우목사
전주열린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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