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신문에서 점차 증가하는 3-40대 한국인의 "돌연사"에 관한 특집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땐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지요.
그런데 정말 "돌연히" 저의 모 (母)교회 1년 후배인 박집사의 돌연사 소식을 추석 전날 오후에 듣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서둘러 전북대병원 영안실에 다녀오면서 목사로서 극심한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후배이지만 친구 못지 않게 절친했던 믿음의 동지. 겨우 마흔한 살. 그 친구의 말없는 시신 앞에서 목사인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면서 유족들에게 전할 무슨 위로의 말 한 마디를 변변히 찾지 못한 채 지척지척 빈소를 물러 나왔습니다.
20여년 전, 박집사와 저는 제 모교회인 전주동인교회 청년부에서 만났습니다. 개척 초기였던 정말 어설프기 그지없는 천막 교회였지만, 이상스레 활기찬 청년들이 많이 모인 교회였습니다.
청년회가 나서지 않고는 교회 일을 어느 것 하나 변변히 치를 수 없을 만큼 청년회가 강한 교회였습니다. 신실한 인재들도 정말 많았었습니다. 교회당 안팎을 청소하는 일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거의 모든 일들이 청년들의 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는 현재 서 있는 교회당 건물 직전의 예배당 건물을 청년들이 손수 짓기도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때 함께 교회를 섬기던 우리 교회 청년회 핵심 멤버의 대부분이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박집사를 비롯한 한두사람만 목회자가 되지 않았지만 그 역시, 순창 어느 교회의 찬양지휘자로, 안수집사로 주님을 뜨겁게 섬기는 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4남매의 장남인 박집사. 성악을 전공한 아주 유능한 테너. 백 미터를 11초대에 주파하는 건강체. 풍부한 재능. 멀리 순창에 있는 어느 중학교의 음악교사로 봉직하느라, 수년전 아버님이 그만 허망히 소천하신 후 혼자 계시는 어머니 권사님을 모시지 못해 늘 마음 아파하던 친구.
그 친구가 10월 8일 있을 전라북도 관악제(경연대회) 준비를 하느라 과로한 탓인지 그만 허망히 소천하고 말았습니다.
이번 추석 전날 곧 그가 소천하던 날, 전날 밤 늦게 처자식을 거느리고 어머님 계시는 집에 와서 잠시 눈을 붙인 뒤, 집 근처 교회당에 새벽기도회를 다녀온 박집사는, 방에서 찬송가를 한 곡 뜨겁게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명절인지라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 또 홀로 계신 어머니 때문에 마음이 좀 울적했는지, 아침 일찍 일어나 반가움으로 주방에서 음식을 챙기고 있는 노모님 등 뒤로 다가와 모친을 꼬옥 끌어안고 "어머니, 건강하셔야 해요. 엄마 제발 아프지 마세요"라며 당뇨합병증으로 고생하시는 모친의 등을 한 번 쓰다듬고 돌아서는가 싶더니, 그만 그 자리에 통나무처럼 거꾸러졌습니다.
이미 호흡이 멎은 박집사를 어찌어찌 전북대병원 응급센터로 옮겼으나 의사들은 한결같이 이미 사망한 지 오래라는 싸늘한 대답 뿐이었습니다.
"우리 아빠 죽었다"고 노래 부르며 아파트 계단에서 즐겁게 뛰놀던 다섯 살 여섯 살박이 철부지 남매, 제 애비의 발인예배가 진행 중인데도 넋이 반쯤 나가 버린 젊은 엄마의 품에서 열심히 재롱을 부리는 어린 남매와, 이제 삼십대 중반의 꽃다운 아내, 마흔 한 살 몹시도 꿈 많은 나이에 돌연사한 아들의 시신 앞에서 "우리 큰아들 대답하는가 한 번만 더 불러 봐라"만을 연발하는 예순일곱의 고독한 어머니를 이 풍랑 많은 세상에 덩그마니 남긴 채 친구는 병든 어머니보다 먼저 주님 품으로 갔습니다.
제가 이토록 친구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가족들은 더 말할 것이 없겠지요. 발인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숨죽이며 펑펑 울었습니다.
'도대체 죽음이 뭐길래' '도대체 죽음이 뭐길래' 이토록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피눈물을 쏟게 하는 것인지, 죽음이 손에 잡힌다면 정말 '죽여 버리고' 싶었습니다.
또 한차례 뼛속 깊이 스며드는 극심한 무력감과 분노…… 친구의 부음을 듣던 순간부터 너무도 간절히, 숨진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시던 예수님이 친구가 누워 있는 싸늘한 영안실에 찾아오시는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간절했는지, 지난 밤에는 실제로 꿈도 꾸었습니다. 정말 얼마나 얼마나 좋던지요. 그러나…… 발인예배가 끝나가도 그런 황홀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집례하시는 목사님의 "부활 소망을 갖자"는 목메인 외침만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것을 거듭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천만 다행히도 당찬 믿음으로 집례 목사님의 설교에 계속 "아멘 아멘"으로 화답하는 젊은 미망인의 모습 덕분에 마음 한 편에 무한히 감사했지만, 장례가 끝나고 서러운 조문객마저 돌아간 후 사랑하던 남편의 빈자리가 도처에서 발견될 때마다 아이들 몰래 돌아서서 닦아야 할 청상의 서러운 눈물을 생각할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사망신고를 하면서, 당신을 빼 닮은 막내의 출생신고를 아울러 하였습니다." "당신 떠난 지 퍽 오랜데, 오늘도 당신 앞으로 우편물이 왔습니다"라고, 사랑하던 남편과의 영별(永別)의 아픔을 토하던 어느 청상 과부 시인 못지 않게 서러운 가슴을 쓰다듬을 미망인의 처절한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같이 애통해하는 저의 어머님 앞에서 "어이구 어쩔꼬, 어이구 어쩔꼬"만을 내내 되뇌었습니다.
친구가 땅에 묻히는 모습만은 어떻게든 보고 싶지 않아, 영구차가 장지로 출발한 뒤, 제 어머니 권사님과 모교회의 몇 분 권사님들을 모시고 박집사의 모친이 계신 송천동의 17평 아파트를 방문했습니다. '아들이나 진배없는 젊은 목사의 등장에 더 애달파하시지나 않을까' 아파트 현관 앞에서 많이 망설였지만, 주님의 위로를 믿고 함께 들어갔습니다.
……퍽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황공하옵게도 받은 직분이 목사인지라, 함께 예배하자는 말씀을 드리고 요한복음 14장 27절과 마태복음 28장 20절 하반절 말씀으로 어머니나 다름없는 이 권사님을 간곡히 위로했습니다.
예배가 끝나면서 조심스럽게 "언제든 박집사 보고 싶거든, 저를 아들로 알고 찾아오십시오" 말씀드리면서 떨리는 손으로 제 명함을 한 장 내드렸습니다.
……너무 충격이 컸는지 맥이 풀려서 아무 일도 못한 채 토요일 오후가 하염없이 갔습니다. 밀린 일이 태산같은데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몇 시간 마냥 누웠다 일어나니, 아내는 제가 몹시 앓더라고 했습니다.
친구를 먼저 보내면서, 아침 이슬같고 안개같은 인생, 결코 내일이 있다고 자신할 수 없는 인생길에 하루하루 좀더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목사의 직분을 감당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리라 재다짐했습니다. 영광스런 부활의 그 날, 내 친구 박집사와의 "돌연한 재회"의 감격을 위해……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구약성경 잠언 27장 1절 말씀)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구약성경 전도서 12장 1절 말씀)
이광우목사
전주열린문교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