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도무지 잊지못하는 시절,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게는 1977년 7월이 바로 그런 시절입니다.
그해 2월, 저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R.O.T.C. 제 15 기로 임관,빛나는 육군소위가 됐습니다.
전공이 어문계열인 덕분에 모두가 꺼리는 보병장교가 된 저는, 상무대 육군보병학교에 입소, 그토록 힘들다는 2주간의 유격훈련을 포함한 16주간의 훈련을 무난히 마쳤습니다.
다소 느긋한 마음으로 전방 소대장노릇할 꿈에 잔뜩 부풀어 있을 즈음, 저는 느닷없이 공수특전단 차출명령을 받게 됐습니다.
몹시 착잡한 마음을 삭히며 마지못해 제3공수특전여단 공수교육대에 입소한 때가 그 해 6월말…….
입소 즉시,그 빛나는 장교 계급장도 떼버리고 피교육생 번호 하나 달랑 붙인 채,날마다 숨가쁜 인간개조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제 이름은 '대한민국 육군 소위 이광우'가 아니라 '128번 독수리'였습니다. 지옥의 1977년 7월은,정말 지독한 무더위였습니다.
땡볕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매 시간마다 소금을 한줌씩 입속에 털어 넣으면서 우리들은 비오기만 고대했습니다.
어차피 몸은 시궁창물, 똥물로 더럽혀지는 것, 비가 오면 시원하기라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패 죽이고 싶게 미운 조교들보다도, 바라는 비는 안 내리고 뙤약볕만 지겹게 퍼붓는 하나님이 더 야속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이러다 죽지……'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드는 지긋지긋한 훈련,정말 죽지 못해 사는 나날. 한 시간이 몇십 년씩으로 느껴지는 생지옥(?)이었습니다.
아득하기만 한 하루 하루, 모진 목숨 용케 부지되는 걸 보며, '사람 목숨 참 질기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훈련은 지독해도,특전단답게 일과후의 휴식만은 화끈하게 보장됐습니다.
일과 후엔 아예 교관 조교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였지요. 몹시 짧은 시간이나마 일과 후는 천국이었습니다.
그 시간을 이용해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연세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동기생이 주축이 되어 "다니엘회"라는 모임을 조직하게 됐습니다.
대학 2학년 겨울부터 간간이 교회당 문턱을 넘나든 '굉장한 사실'이 우연히 발각(?)돼 저도 거기 끼게 됐습니다.
매일 저녁 식사 후 휴식시간마다,우린 막사 16개를 차례로 돌며 기도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때마다,각 막사에서 철침대에 널브러져 쉬고 있던 동료들의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다소곳이 기도회에 동참하는 사람. 담배를 꼬나 문 채 아니꼬운 표정으로 슬며시 밖으로 나가버리는 사람. 고래고래 악을 쓰며 '제발 좀 조용히 쉬자'고 외치는 사람…….
하나님에 대한 매우 추상적인 생각 뿐,진실한 신자는 결코 아닌 '나이롱'이면서도,웬일로 저는 그 모임에 거의 빠짐없이 동참했습니다.
여하튼 저의 그런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아주 진실한 신자로 보이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이렇게 몇 주가 흘렀습니다.
드디어 첫 낙하 하루 전, '주일'날. 부대 내에 있는 교회에 다녀왔습니다. 왠일인지 그 날은 거의 대부분의 훈련생이 몰려들어 비좁은 교회당 안은 터질 듯했습니다.
그런데,그날 점심 후,우리들의 낙하예정지역에서 낙하훈련을 하던 베테랑 특전요원 하나가 그만 낙하산고장으로 추락, 사망했다는 겁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모두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고, 전 느닷없이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갑자기,몹시 심란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제 팔을 누가 나꿔챘습니다. 누군가 했더니,국가대표 레슬링선수였다는,경상도에서 온 체육과 출신의 제 동기생이었습니다.
예의 그 기도회 시간 마다, "예수 믿으라꼬? 퉤,야 이눔아들아,예수 믿을라모,내 주먹을 믿으락하이"하며 주먹을 내두르던 골치 아픈 친구였습니다.
이 친구가 다짜 고짜 제 팔을 잡아끄는 겁니다. 끌려가며 저는, '녀석에게 내가 뭘 잘못했나'를 열심히 생각했습니다.
힘에 밀려 끌려간 곳은 뜻밖에도 16번 막사 끝 쓰레기 소각장 뒤였습니다. 잔뜩 긴장해 섰는 제게 이 친구,씩 웃더니만 솥뚜껑 만한 손을 쑥 내밀며 악수를 청합니다.
"야 이눔아야,그간 쪼매 미안했데이. 용서하그라. 그라고,니 내 손잡고 기도 좀 안 해주겠나?" 팽팽하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며 두부자루 터지듯 픽 웃음이 나왔습니다.
"나,기도 잘 못하는데……" "이눔아야,그라지 말고 지발 한번만 좀 해주그라 고마!" 너무나도 순수한 표정,진지한 눈빛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쓰레기 소각장 뒤에 쪼그리고 앉아 거북등같은 손을 맞잡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당시 저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나이롱 신자였기 때문에 무슨 기도를 어찌했는진 잘 모릅니다. 아마 낙하훈련 무사히 마치기를 기도했겠지요.
삶이 힘겨울 적마다 1977년 7월이 생각나고,그 때마다 그 고릴라 같던 친구가 생각납니다. 절박한 공포 앞에서는,인간은 누구나 별수없이 약한 존재라는 것,
죽음의 그림자가 비칠 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게 된다는 것을 '가장 명확하게' 가르쳐준 나의 동기 '고릴라 선생님'은 지금 무얼 하는지…….
이 '나이롱'이 목사가 되는 사이 혹 교회 집사님이라도 되어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가끔씩 이 '나이롱'을 생각하지는 않는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신약성경 사도행전 16장 31절)
이광우목사
전주열린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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