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바쁘냐? 내 말 좀 들어 봐라, 자문 좀 얻자" 서울 작은어머니의 전화였다. 평생을 교직에 계신 작은 아버지는 지난해 8월에 정년퇴임 하셨다. 평생 집 없이 사시다가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하고 이사를 하신다.
작은 어머니는 이사 갈 아파트에 요즘 유행하는 붙박이장을 하고싶은 것이고 작은 아버지는 기존의 장을 그대로 가져가야 한다는 의견대립이었다. 큰 조카인 나에게 작은 아버지를 설득시켜 보라는거다.
돈은 이미 장만되었으며 허락만 떨어지면 된단다. 작은 아버지는 '쓸 수 있는 물건을 버리는 것은 죄!' 라고 이사하는 아파트에 낡은 옷장을 고집 하신단다. 나는 물론 작은 어머니 편이다. 나 같으면 지원요청을 할 것도 없이 대판 싸움을 해서라도 내 고집대로 할게다.
그러나 작은 어머니는 속이 뒤집어져 터져도 결국은 장을 바꿀 분이 못된다. 한평생 매사에 그런식으로 밀리셨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면서 남편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난을 극복해 오신 것을 안다.
두 분은 가난을 자랑하진 않으셨으나, 가난의 불편조차도 감사하면서 살아오셨다.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얼마나 여자에게 힘겨운가?. 어떤 때는 뵙는 나도 딱한데... 남이 버린 물건을 아쉬워서가 아니라, 버린 사람의 죄를 대신 지는 심정으로 자기 집안에 들여다 말끔히 고쳐쓰셨다.
작은 어머니는 못난 남편 자랑을 수필로 써서 많은 사람을 울리기도 하셨다. 작은 아버지의 교육과 사상의 열매는 그 자녀들이다. 큰 딸은 서울대에서 분자생물학을 전공하고 미국 하바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하바드 연구원으로 있다.
사위는 MIT공학박사로 훌로리다 주립대학 교수다. 장남은 고려대학과 대학원을 나와 동창생과 결혼하여 지금 영국에서 컨설팅회사에 촉망받는 엘리트로 성장하고 있다.
막내 아들은 현재 의사이다. 명문의 재원들로 키웠다는 것이 자랑이기도 하겠지만, 실은 세 자녀는 너무나 반듯하게 자랐고 이 시대에 보기 힘든 신실한 인격자 들이라는 말을 하고싶다.
이 어른이 내 믿음의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중학교 교감선생님셨던 작은 아버지는 3남매를 키우며 무척 가난하셨다. 세금 한 푼 안 떼먹은 모범시민이며, 교회에 평생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면서 살아온 장로님이다.
언젠가 시골 중학교 교장으로 계시다가 서울의 모 고등학교로 스카웃 되어 오셨다가 수학여행비를 떼어 나눠 먹는 것을 거부하고 속수무책 그 학교를 사임하셨던 적이 있다.
당장 끼니가 걱정인데 한달 월급을 몽땅 졸업앨범을 못사는 담임반 아이들에게 주고 빈털털이로 들어와서 작은 어머니를 울리던 일도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도 작은 아버지 스토리를 다 열거하기 어렵다.
그의 자녀들은 가난을 무서워하거나 혐오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너무나 강인하고 건실한 구김살 없는 자신만만한 자녀들로 잘 자라서 건전한 사회인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
퇴임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여쭈어 본 적이 있었다. 청소년 상담실에서 무료 상담원으로 봉사하고 싶고, 남은 시간은 길바닥에서 담배꽁초를 줍는 것을 실천하여 사회정화에 일조하고 싶다고 하신 적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어느날 안암동 길바닥에 꽁초를 줍는 내 작은 아버지의 모습과 만나실 날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작은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오늘 아침! 내겐 얼마간의 충격이 또 한 번 내 영혼을 정화시켜 준다.
내게는 이 시대에 예언자인 작은 아버지의 삶이 늘 정신을 번쩍 들게한다. 이 시대의 살아있는 참 교육자이셨다고 생각한다. 남의 자식도 가르치는 입장이었지만, 자기 자녀들에게 성공한 교육자이기 때문이다.
아래 글은 재직당시를 추억하며 내 홈페이지에 남겨주신 작은 아버지의 글 한편이다.
<상선벌악 인과응보는 복음이 아니다.>
1980 년대 중반 어느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생님 저 이×× 에요" 군에 갔다가 월여 전에 제대했단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내 변동된 주소를 알아내서 하는 전화다.
간단한 인사 후 본론에 들어가서 "선생님 저한테 약속하신 것 있죠?" 하며 시작한 내용인즉 졸업 무렵 자기 결혼 때 주례를 맡아주기로 했단다. 까맣게 잊은 일이지만 이제 새로운 부탁이라도 할 만한 일에 기억을 되찾느라고 시간 보낼 겨를 없고 "그래 그랬었지" 하며 이어간 대화 끝에 "그런데요, 한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에게 네 살된 딸이 있어요. 하는 것이다.
게면적게 꺼낸 말에 반응을 주시하는 눈치다. 워낙 거칠게 살아온 그에게 그 정도는 흠도 안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풋사랑에 실패하고 상처만 안은 사람이 허다한데 첫사랑이 영글어 결혼에 도달한 것 자체가 축하해주고 싶은 심정이였다. 그 말을 듣고 신나는 사람처럼 주례를 쾌히 승낙하고 사전에 만날 날을 약속하고 끊었다.
그와의 인연은 이러하다. 1970 년대 말 나의 청년교사 시절, 서울 시내 모 상업고등학교 3 학년 담임을 맡고, 사무분장은 생활지도부(현 학생부)에 배속되었다.
개학을 한 날, 해마다 반복되는 스케쥴대로 개학식이 끝난 뒤 교실에서 자리배정, 학번배정, 청소당번 배정 등을 하고 난 다음. 이어 담임교사의 지도 방침을 일장 연설한 뒤 종례를 마치고 파한 뒤였다.
금 후 한 학생이 교무실로 찾아와 따로 인사를 하는 것이다. 말인 즉 "[선생님 제가 2 학년 때는 말썽도 많이 부렸는데 3 학년 되어서는 선생님 속 안썩이도록 노력할테니 저를 이전의 저로 보지 말아주십시오" 하는 것이다.
당시 학생 상담에 관심이 크던 터이라 이 말을 예사로 듣지 않을 수 있었던 나를 지금도 감사한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헤어날 수 없는 굴레가 이전의 비행과 연관시켜 나무라는 일이고, 우수아와 비교하여 자기 노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다.
사실 나는 그 학생이 생활지도부에 단골로 불려오는 사고뭉치인 줄도 몰랐고, 그 얼굴도 처음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대도 대답은 같았을 것이다.
나는 그 학생이 자신을 파악하고 있는 대로 알고 있는 양 "그럼 ! 그렇구말구 사람은 언제나 새출발이 중요한 거야. 너와 나는 처음 만난 거야. 이전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만난 거야. 노력하자 도와줄게" 아마 이렇게 말했을꺼라 기억된다.
학생의 눈빛에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이틀 후 그 학생이 생활지도부에 불려왔다. 사안인 즉 학교 밖에서 패싸움에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지도교사에게 조사를 받고 모지게 맞고, 반성문을 쓰고 돌아가라는 허락을 받은 다음 내 앞으로 와서 "선생님 죄종합니다." 했다. 그 한마디 속에 "정말 새학년 들어서 담임선생님만은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이일만으로 쉽게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라는 말을 읽을 수 있는 한마디였다.
나는 그 때 그 학생에 대한 반응이 지금 생각해도 적절하였다고 생각한다. 내게 그만한 신앙과 소양이 있었던가 싶도록…
"지도부 선생님께 매를 많이 맞았으니 나는 매를 들지 않겠다. 그러나 먼저 맞은 매보다 더 많은 매를 나에게 맞은 느낌이어야 해 알겠니 ? 친구가 맞았다는데 시나이로서 참지 못한 점은 이해해, 그러나 그것을 참아야 네가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거야 ! 다음에 또 사고를 저질러도 또 용서할 거야 , 노력해 !"
또 사고를 칠 수 있는 그를 받아드릴 때 그가 설 자리가 있는 것이지 다시는 안하리라는 보장 하에 용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계속해 죄짓고 있는 그를 받아드리는 것이 진정한 받아드림이라 믿는다.
미래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 예수가 지금도 계속 죄짓고 있는 나를 이런 방법으로 용서하지 않았다면, 2000 년 전 아니 태초에 지금의 나를 용서할 방책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예수의 공로를 노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죄는 짓기 전에 용서하는 것이고 예수(하나님) 앞에 죄는 처음부터 없는 것이 아닐까 ? 상선벌악 인과응보는 복음이 아니다.
붙임 ; 그 학생은 졸업 후 훌륭한 직업인으로 발전했다.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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