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텅빈 집엔 남편과 단둘이 밥상을 맞게된다. 딸 시집보내고, 아들은 군대가고, 며느리는 손녀를 데리고 일이 있어 친정에 갔다.
썰렁한 식탁에 내외는 싸운 사람들처럼 말이 없다. 그 옛날 32년전 첫번 부부싸움의 광경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간단한 문화 충격이었건만 왜 그리 심각했던가? 하긴 싸울때가 좋았지. 싸우지도 귀찮아지면 나이가 든 증거이다. 서로에게 길들여진건가! 성숙해진건가!
값 비싼 밥상에 초대받아 잘 대접받고 들어와서도 습관처럼 하는 말 "밥은 집에서 먹어야 해!" 무슨 말일까? 외식이 번거롭고 집에서 먹는 밥이 편안할 때 쯤이면 낙엽지는 인생의 가을을 맞게 되는건가? 첫번 부부싸움하던 날이 기억나서 피식 웃음이 난다. 여기 그때의 일기를 옮겨본다.
그날은 따끈한 호박찌게를 할 요량이었다. 연두빛 조선 애호박을 사고 개끗한 추젓(새우젓)을 조금, 파 마늘이랑, 두부 ,깨소금 조미료, 머릿속은 벌써 보글보글 끓는 찌게 냄비를 상상하고 있었다.
조그만 밥상에 main dish는 물론 애호박찌게! 소꼽장난 같은 저녁상에 둘이 마주 앉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남편은 아주 불쾌한 얼굴로 밥상에 앉는 순간 끼게냄비 뚜껑을 곧장 닫아 버리고 얼핏 상밑으로 내려 놓는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손을 델까봐 걱정했지만,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 볼 겨를도 없이 기가 딱 질려버렸다.
천연스럽게 남편은 텅빈 밥상에서 김치랑 밑반찬 약간과 밥을 먹어치웠다. 날보고 " 왜 밥을 먹지 않느냐" 고 하면서? 난 울화가 치밀다 못해 까물어칠 지경인데...
밥을 먹으라구? 머릿 속엔 요란한 탱크가 지나가고 있었다.
한판 붙어? 아니야 조금 참아? 아니야 따져? 아이고! 나는 그만 제일 나쁜 쪽을 선택한 것이다. "한번 말해 봐요! 이 밥상에 우리 단둘인데...당신이 먹기 싫으면 상밑에 음식을 내려 놓는거예요? 앞으로 계속 반찬을 상밑에 내려 놓을거냐구요? 난 사람두 아니야? 그리고 정성드려 만든 애호박 찌게가 어때서?"
남편은 그 자리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같으면 1절만 했을텐데...나는 2절을 진행하고 말았다. "내가 묻는 말에 아직 답을 안했자나요? (이게 바로 되지못한 훈장기질이란 것을 알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남편은 얼굴색이 달라졌다.
이렇게 나의 인생 결혼 첫장면은 시작되었다. 3일간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물론 이렇게 여자를 무시하는 경상도 문딩이 하고는 열애 4년의 속임수를 보탠 분노에 더욱 용납할 수가 없다. "문디이 같으니라구"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가? 냉전은 계속되었다.
단순한 밥상시비가 인권유린, 남녀평등, 문화갈등, 성격차이, 무성한 이혼조건으로 발전되고 울컥이는 분노를 작은 어깨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겨웠다.
이 전쟁만은 내가 기선을 꼭 잡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사과할 줄 아는 멋진 남편을 제조하고야 말겠다는 의기양양한 깃발을 들고 시퍼런 칼날을 갈면서 논리정연한 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게 웬말인가? 전혀 내가 얻어내려는 해답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지면서 감당할 길이 없는 상황까지 몰려가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은 명확하다.
1. 밥상에서 음식을 내려놓는 인권모독의 만행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을 것
2. 만약에 그래도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때는 부드러운 완곡의표현으로 아내를 가르치고 설득할 것
3. 무단가출을 하여 아내를 약올리는 비겁한 행동은 이혼요구에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4. 그리고 이 번 전쟁은 무조건 미안하다는 말로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 보상하라...
하지만 태산준령이다. 날로 일은 커지고 묵비권! '따지는 여자는 딱 질색이니 지금도 늦지 않으리... 집에가서 더 배워가지고 오라나?' 이럴수가 있어?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너의 어머니가 아버지께 하는거 배워가지고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 다시 오라나?' 아이고! 자존심 상해! 나의 인권투쟁은 비참지경에 이르렀다. 죽음 그 자체였다. 정말 그 날 이후로 호박만 쳐다보면, 나는 두드러기가 난다.
실은 아주 훗날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경상도에서는 호박찌게를 새우젓을 넣는 법이 없다. 더구나 새우젓을 익혀먹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단순한 음식문화 갈등이었다. 얼굴이 샛노래진 여자가 자꾸 무슨 답을 달라니까... 그는 울화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새우젓 호박찌게를 별미라면서 맛있게 먹는다. 결국은 내가 이긴 셈이지만...
지금도 이 일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그이는 자기가 변했다는 사실도 모른다. 아니다, 내가 이긴게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인권유린, 자존모독, 성차별, 건진게 하나도 없다. 다만 극복된 것은 성격차와 문화갈등 뿐,
그런데 하나!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 좋은 친구다! 그럼 무승부인 셈인가?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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