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저녁 7시면 금족령을 내리셨다. 나의 사춘기시절 모이면 즐거웠고 가랑잎 굴러가는 것만 보아도 폭소를 금치 못했던 때 내 소원은 밤거리를 활보해보는 것이었고 친구집에서 하룻밤만 자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변칙도 타협도 없는 보수이다 못해 근본주의를 고수하셨다. "저녁 7시 넘어 돌아다녀서 계집애들에게 유익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는 말씀에 틈새가 없었다.
친구들에게 왕따 아닌 왕따의 세월이 야속하기만했다. 때로 너무 답답해서 할아버지의 연세를 꼽아 본 적도 있었다. 할버지가 돌아가시면 저절로 자유의 날이 내게 오는 것이 아닐까 하고...얼마나 마음으로 범죄하고 있었던가?
그런데 어느새 내가 자식 키우면서 똑같은 굴레를 돌고 있었다. 오히려 한 수 더 떠서 남편은 극보수 정통파니 내 아이들은 숨통이 막혔을게다. 저녁 10시까지 귀가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드디어 올게 오고 말았다. 저녁 10시까지 금방이라도 들어올듯 기다리고 있던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여기 학교 앞인데 친구 하숙집이예요. 자고 가면 안될까요?" "안되! 지금 많이 늦었다. 곧장 집으로 오너라" "아빠! 저 오늘 자고 내일 곧 바로 등교할게요 허락해 주세요" 친구집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단호하게 자기 주장을 세웠다.
아버지의 근본주의가 무너지는 날이었다. 어미의 원칙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가정의 전통이 무색해지는 찰라였다.
내외는 몹시 화를 내며 득달같이 이대앞으로 갔다. 이때 많이 놀랬다. 대낮처럼 흥청거리는 신촌은 괴물 같았다. 이런 곳에서 밤늦게 흐느적거릴 딸이 금방이라도 잘못될 것 같아 두려웠다.
딸에게 계속 추적하는 전화를 해도 막무가내 고집을 피웠다. "엄마 아빠의 말씀을 오늘은 제가 어기고 싶어요" 딸의 반란이었다.
우리는 마치 딸에게 나쁜 세상을 물들여 주기라도 할 것처럼, 딸이 무서운 물줄기에 휩쓸려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것을 한꺼번에 상실한 것처럼, 겁이 털컥 났다. 드디어 딸에게 참패하고 내외는 비통한 마음으로 인천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훗날 딸이 대학 졸업반일 때 아들마저 대학 입학을 하자 둘이는 합세해서 엄마 아빠에게 귀가 시간을 수정하도록 부탁했다.
저녁 10시까지 인천 집에 귀가할려면 8시에는 서울서 출발해야 하는데 8시면 친구들과 차 한잔도 나눌 수가 없고, 친구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은 자기들의 삶에 큰 지장을 준다고 호소했다.
어쩔수 없이 내외는 자정을 귀가 시간으로 수정한 후 이런저런 이유로 전화만 미리하면 귀가 시간을 통제하는 것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품안의 자식"이란 말을 씁쓸하게 뇌까리며 '자식은 다섯살 전에 평생할 효도를 다 한다'는 사실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아이들을 외국으로, 세상 속으로, 놓아 보내면서 내외는 얼마나 초조했던가? 원칙을 개방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보수주의가 그토록 힘없이 무너져서 얼마나 허탈했던가?
아이들은 늦된 아이들처럼 세상을 접하며 놀라고 또 두려워하며 자기를 가누느라 몹시도 힘겨운 눈치였다. 지금은 비교적 자기들의 주장을 건설적으로 피력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도 아이들의 진실을 알아차리기 위해 경청하며, 삶의 본질과 원칙들을 전수해 가고 한다. 세상이 온통 시들고 변해버렸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진실과 감당키 어려운 과감한 진보를 합리적으로 교환하면서 아이들의 희망을 수용하며 부추겨주며 내외는 노추인 고집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이제는 가정을 이룬 아이들에게 귀가 시간을 정하는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스스로 알아서 귀가하고 귀가 시간을 엄중히 경고하던 부모의 마음을 이제 알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리...
개방된 보수주의와 합리적 진보주의가 만나서 조화를 이루는게 가정이련가? 너무 말이 거창한가?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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