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에 갔다가 제13회 전국주부 편지쓰기대회 안내를 보았습니다. 문득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싶은 마음에 설레였습니다. 열애 4년간 하루가 멀다 주고 받던 편지를 생각하며, 당신에게 편지를 쓴지 너무나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정 아버지가 오셨었지요. 침통한 아버지 얼굴을 감히 마주칠 수가 없 었습니다. 죄인처럼 아버지 앞에 주저 앉았죠. "네 남편은 어디 갔느냐?" "모릅니다." "이야기 해보렴! 이혼한단 말은 무슨 말이냐?" 사무적으로 묻는 아버지께 되도록 간단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가족부양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 둘째, 믿을 수 없다는 것, 셋째, 빚이 한계상황이라서 정리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등등.
아버지는 결론을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 가문에 이혼은 없다. 듣고보니 네 남편은 전혀 다른 사람이로구나, 본래 그 사람이 아니야, 전혀 다른 사람을 두고 실망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으니, 제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말만 남기고 훌훌 그 밤에 떠나버리셨습니다. 빚을 안겨준 채, 자기의 삶을 추스르지 못하는 당신이 너무나 원망스러 웠습니다. 몽땅 정리한다면 남의 빚을 가릴 수 있을까 계산해 보았죠, 퇴직금과 가재도구를 팔아 정리하면, 제로! 빚 떼어먹는 죄인만은 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입힐 수는 없질 않겠습니까?
당신이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내 곁을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무기한, 무작정, 별거인 셈이죠. 팔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팔고, 학교 앞으로 이사했습니다. 단칸 방에 세살짜리 딸 은혜와 은혜를 보아줄 사람을 데리고 살게 되었죠. 밤마다 당신을 기다릴 일이나,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히느라 힘겨울 일이 없으니 홀가분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구마구 벼갯잇을 적시는 눈물을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출근할려면 퉁퉁 부은 얼굴로는 안된다는 생각에 독하게 마음먹어도, 항변없이 별거 의향에 동의하고 떠난 당신이 자꾸자꾸 생각나서 울었습니다.
혹시나 내 삶이 남에게 알려질까봐 애써 명랑한척 하며 살았습니다. 아이가 독감에 걸렸습니다. 몹시 보채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빠~, 아빠~" 아빠를 부르며 우는겁니다. 엄마를 곁에 두고 아빠를 부르며 울다니. 엉덩이를 따끔하게 때려주었죠. 막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피가 거 꾸로 솟을 지경으로 오간장을 찢는 은혜의 울음소리 '아빠~ 아빠~'
노을이 질 때면 자유공원에 올라 아장아장 걷는 은혜에게 비둘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공원에 올라온 노부부가 내 눈에 들 어 찼습니다. 많이 배운것 같지도, 많이 가진것 처럼 보이지도 않는 노부부는 개선장군 같았습니다. '저 나이가 되도록 어떻게 함께 살아왔을까? 위대하다!' 유모차에 탄 은혜가 그 날따라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습 니다.
별거 4개월만에 부산에 전화를 했습니다. 반가워 떠는 당신의 음성이 전선을 타고 귓전에 내려 앉을 때, 냉정하게 먹었던 내 마음에 파장이 일고 있었습니다. 나는 부산에 내려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내심, 보고싶기도 했지만, 어찌 살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 간의 변신을 보면서 가능성을 진단해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항해사였던 시숙은 오랫동안 집을 비우셨죠. 큰 동서는 남자가 할 일을 시동생이 도와주니 무척 좋은 모양입니다. 우리 가정의 내용을 잘 몰랐겠지요? 하지만 나는 조급했습니다. 이러다간 정말 당신이 큰 집 머슴으로 전락하고 말 것 같았죠.
인천으로 올라 온 1주일 후에 나는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퇴직하고 함께 살고싶다고, '가족부양의 책임을 지겠는가?' 물었죠. 당신은 자신있게 '내려오라' 고 했습니다. 나는 직장에 사표를 냈죠.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을 먼저 배우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남들은 잘들만 사는데...왜 나는 안 되는걸까?' '한 남자의 아내도 못되는 내가 교단에서 무엇을 가르친단 말인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했는데..' 내가 감히 은혜에게 아비 없는 자식을 만들 자격이 있단 말인가?
나는 비교적 단순하게 생각할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분명히 사랑하고 있었나 봅니다. 당신만 없으면, 속 썩을 일도 없고, 살 맛이 날 것 같았는데, 내 삶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퇴직금을 받아 빚잔치를 하고 트렁크 하나에 나의 전 재산인 은혜만 데리고 부산행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얻어 놓은 방은 부엌도 없는 집이었습니다. 저녁에 우리 세식구는 오랫만에 너무나 단촐한 행복에 훌쩍이며 울다가 웃다가 했었지요.
당신은 단 벌 신사였습니다. 밤에 들어오면, 양복을 부지런히 빨아 바람 좋은 곳에 말려 아침에 입도록 해야했습니다. 연탄을 살 돈이 없었죠. 주인 할머니가 연탄을 안 쓰실 때, 잠시 빌려 쓰기로 하고 한달에 절 반의 연탄 값을 드리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타산 빠른 할머니는 쾌히 승락을 해 주셨죠. 물론 냉방에서 자며, 쌀은 한되씩 사다 먹었죠. 쌀집에서 '웬 단술을 그리 자주 하는가' 묻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많던 당신의 친구들은 그림자도 드리우질 않았던 것 당신도 기억나죠?"
이른 아침 수제비를 뜰 때가 당신에게 미안했습니다. 건더기만 건져서 당신 먹여 출근시키고, 은혜를 먹인 후, 나는 뿌연 국물로 허기진 배를 채운 적도 있었죠. 은혜는 내가 마시는 국물을 좋다고 따라 마시며 웃기도 했습니다. 빨래를 하고 있을려면 은혜는 이쪽, 저쪽 문으로 삐죽이 들여다 보았습 니다. "엄마 있네?" 그리고는 방에 다시 와서 들여다 보며 "엄마 있네?" 늘 엄마가 출근해서 없다가 집에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하루 종일 문을 열어보며 엄마를 확인했습니다. . 행복한가 보더군요,
당신은 종종 말했죠. "미안하다, 고생시켜서..." 하지만, '여보! 행복했답니다. 은혜랑 당신을 기다리며, 알뜰하게 살림하는 것도 제법 재미가 솔솔 났었답니 다." 그런데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림을 파는 일이나, 도자기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날품팔이가 된 것이죠, 눈물겨워 다시 울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생기를 찾았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맞춰 살아 온지 금년 11월28일이면 결혼 29주년이 되는군요. 지난 9월19일 맞은 예쁜 며느리 당신 마음에 꼭 드시죠? 새봄이면 우리 은혜 휘앙세와 새둥지를 틀것 같구요. 옛 이야기 할 날이 올 것이라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당신은 말했습니다. "그 때 당신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산에 내려오 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영 페인이 되었을꺼요! 당신이 어떻게 천직처럼 알던 직업을 버릴 용기가 생겼을까? 어떻게! 한조각 희망도 없던 나에게 기댈 모험을 할 수 있었을까? 감사하고 있소! 진심으로..."
나두 할말이 있답니다. "여보! 난 당신 없인 못살겠더라! 당신! 장하오! 당신은 우리 집의 황제요!"
재단법인 우정사업진흥회 주최
제13회 전국 주부편지쓰기대회
대상 수상작입니다.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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