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닿을 듯한 하늘,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 이열종대로 늘어선 가로수들의 하늘거림, 차를 타고 달리는 우리의 가을 들녘은 소름끼치도록 아름답다. 차창 밖에서 논들을 가득 메우고 맘껏 고개 숙여 인사하는 노란 벼이삭들을 보면서, 가진 자의 겸손함을 배우는 것도 가을 들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정취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노란 물결로 아름답던 들판이 갑자기 꺼뭇꺼뭇하다. 자세히 보니 피가 노란 벼이삭들 사이로 삐죽삐죽 나와 있다. 주인이 바쁜가 보다 하고 지나가려는데 마냥 속이 편치가 않다. 곁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한 마디 했다. “저 논은 누가 농사를 짓는데 저렇게 버려뒀을까?” 물론 답을 기대해서 한 말은 아니다.
아내도 농부의 아들, 아니 어렸을 때 농부였던 남편의 물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글쎄요, 보기가 안 좋네요.” 아내의 그 대답을 들으며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고른 벼이삭들의 여물음 가운데서 빈둥거리며 서서 키 자랑을 하는 피가 분명 보기 안 좋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 피가 보이는 게 아니라, 그 농사꾼이 보였다. 아니 보다 엄밀히 말하면 내 게으름이 보였다. 그런데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다. 이미 지혜자가 똑 같은 광경을 보고, 성경 잠언 24장 30절에서 32절까지에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우리는 지혜자가 그 농사꾼을 탓하고 있지 않다는 데 놀라야 한다. “내가 훈계를 받았노라”고 말한다. 사람의 눈은 보이는 것을 본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같은 것을 보아도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그것은 눈은 같지만 눈이 가진 생각은 다르기 때문이다. 성도는 적어도 눈은 같을지 모르지만 눈의 생각은 달라야 한다. 그래야만 성도라 할 수 있다.
노란 벼이삭 사이로 뻗어 키를 자랑하는 피의 원인은 그 논의 주인에게 있다. 농사에 대한 무지든, 피가 나는 것에 대한 무신경이든, 너무 바쁘다는 핑계든, 하여튼 일차적인 책임을 질 사람은 그 주인이다. 그러나 주인의 탓만 한다면 그런 사물을 보는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사물이나 사건, 역사는 이미 나의 역사는 아니다.
우리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다. 내 역사인데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적어도 우리는-그가 성도라면- 피로 가득한 논을 보며 자신은 게으르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아니면, 자신을 향하여 호된 꾸지람을 하고 돌이킬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남의 게으름을 탓할 것이 아니고 자신의 게으름을 보아야 한다. 남을 보면서 나를 못 보면 본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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