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이른 바 ‘행운의 상징’이라는 ‘네 잎 클로버’를 선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네 잎 클로버는, 흔한 세 잎 클로버의 변종으로서 찾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에 ‘아주 귀한 것’이라는 뜻에서 자연스레 ‘행운의 상징’이 되었을 것입니다. 며칠 후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좀 장난스럽게 “네가 준 네 잎 토끼풀 잘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평소 ‘네 잎 클로버’나 ‘네 잎 토끼풀’이나 그게 그건데 왜 꼭 ‘네 잎 클로버’라고만 해야 하는지 의아해 하던 터여서 짐짓 그리 말해 본 것뿐인데,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친구의 얼굴에 갑자기 섭섭한 빛이 뚜렷이 내비치고 있었습니다.
요즘 길거리에 나가 보면, 내가 해외여행을 온 것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로 만들어진 간판이 많습니다. 물론 길거리 여기 저기에 어지럽게 붙어 있는 우리 말 광고판 가운데 바른 우리말로 된 것을 찾아내기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요즘 신세대 가수들의 이름은 아예 외국어로 된 것이 대부분이어서, 영어를 꽤 오래 공부한 저 같은 사람조차 부르기도 기억하기도 어려운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한 3-40년 전의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철수’ ‘영이’같은 판박이 이름만을 써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의 노랫말 속에 영어 문장 한두 구절이 들어가는 것 또한 아주 자연스런 흐름이 되었습니다. 이젠 아예 고위 공직자들이 앞장서서 “영어를 공용화하거나 상용화하자”는 이해하기 힘든 주장을 서슴지 않는 오늘입니다.
하기야 이러한 ‘언어사대주의’의 경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시내버스나 지하철에서 서 계시는 어르신들을 향해 “노인장(老人丈), 여기 앉으십시오.”하고 자리를 양보하면, “젊은 사람이 예절도 바르다”며 호탕한 웃음과 함께 그 자리에 앉으실 어르신들이 많지만, “늙은이,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하면 그 자리에 앉으시기는커녕 대뜸 불호령이 떨어지며 험한 욕을 먹게 될 것이 뻔합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높여 주기 위해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신 것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늙은이’라는 말 또한 어르신들을 높이는 틀로 짜인 말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노인장’이라는 한자어는 환영받고, ‘늙은이’라는 순 우리말은 불쾌하게 여겨지는 뿌리깊은 언어사대주의가 오늘은 ‘셈족 언어 사대주의’로 분칠하고 나타난 것뿐입니다. 우리민족문화 유산 중에 가장 자랑스러운 보배 하나를 뽑으라면 주저 없이 한글을 꼽을 텐데, 쓰기 좋고 듣기 좋은 제 나라말도 제대로 못다 쓰면서, 어설프기 그지없는 남의 나라말을 제 나라말로 삼고 싶어 안달인 낯뜨거운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지성인들은 “가장 향토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습니다. 정말 맛깔스런 우리 말, 우리가 아껴 쓰지 않으면 어느 민족이 써 줄 것이며,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켜 주겠습니까? “네 잎 토끼풀 주어서 고맙다”는 말에 얼굴빛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 친구들의 모습을 볼 수는 정말 없는 것일까요? (2004. 7. 5.)
* CBS 라디오 에세이(2004. 6. 21. 밤 11:55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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