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처참한 후유증으로 온 나라가 헐벗고 굶주리던 저의 어린 시절은 늘 춥고 배고팠습니다. 거리마다, 고무팔 고무다리의 상이군인들과 폐병환자들과 각설이패가 넘쳐나던 그 참혹한 시절, 제 또래의 어린아이들이 갖고 놀 수 있는 변변한 장난감도 없었고, 그러기에 ‘놀이 문화’니 뭐니 하는 사치스런 낱말 또한 아예 없었습니다. 그저 헌 철사를 둥그렇게 엮어 만든 굴렁쇠나 수숫대를 기역자로 꺾어 만든 장난감을 굴리고 밀며 마을 앞 방천길을 냅다 내달리거나, 마을 어귀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 모래밭에서 고무신 한 짝을 쭈그려 다른 한 쪽 고무신에 끼워 박아 얼추 자동차 모양을 만든 다음 그것을 손에 잡고 입으로 자동차 엔진소리를 흉내내며 흙을 뒤집어쓰고 혼자 놀거나, 누군가의 왕골 밭에서 왕골 대 하나를 뽑아 끝 부분을 살짝 쪼개 한 쪽을 꺾어 딱딱이를 만든 다음 팔이 뻑뻑할 정도로 딱딱이 소리를 내며 온종일 싸돌아다니거나, 학교에 오가는 길에 아무 개울에나 첨벙첨벙 들어가 멱을 감고 미꾸라지나 송사리를 잡고 노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단발머리의 여자아이들은 모였다하면 고무줄놀이를 하고, 까까머리 남자아이들은 짓궂게 살금살금 달려가 면도칼로 그 고무줄을 사정없이 끊고는 도망질 치고, 그렇게 울고 웃으며 지내던 어린 시절에 저 같은 사내아이들이 즐겨 하는 놀이로는 자치기나 비석치기 딱지치기 구슬치기 정도가 그래도 제법 고급스런(?) 놀이였습니다. 딱지치기 구슬치기 얘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입니다만, 비교적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던 제가, 놀랍게도 딱지치기 구슬치기에는 유난히 눈부신 재주가 있었습니다. 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구슬을 얼마나 정통으로 잘도 맞히는지, 어떤 땐 너무 정통으로 맞힌 나머지 그 아까운 구슬이 그만 산산조각 나버리는 때도 많았습니다. 요즘 신세대들이 즐겨 보는 영화 ‘반지의 제왕’ 제목을 좀 슬쩍해서 말하자면 가히 ‘딱지의 제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저는 구슬치기를 잘 했습니다. 한 번은,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집 근처 중학교의 담벼락 아래 양지쪽에서 구슬치기하던 친구 녀석의 구슬 몇 개를 빌어서 그 놀이판에 슬며시 끼어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아이들의 구슬을 모조리 다 따버린 다음 그것을 그 아이들에게 되팔아 다섯 살 아래 동생에게 보아란 듯이 그토록 먹고 싶어하던 풍선껌도 사 먹이며 어엿이 형님 노릇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 무렵, 제 앉은뱅이 책상 밑에는 늘 딱지상자 구슬상자가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아무리 나무래도, 제 재산목록 1호인 그 보물상자만은 정말 목숨처럼 소중하게 간직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까마득 멀어진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니, 지금은 흔적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딱지상자와 구슬상자를 목숨처럼 여기며 지내던 그 시절이 마냥 우습게만 느껴집니다. 마찬가지로, 얼마 후 이 땅의 삶을 다 마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 지금 내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어린 시절의 딱지 상자 구슬 상자처럼 또 다시 버려지는 일은 없도록 살자고, 손에 넣어보았자 되돌아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을 얻기 위해 금쪽 같은 세월을 허비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딱지’ 맞지는 말자고, ‘딱지의 제왕’으로 지내던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마다 다짐 또 다짐합니다. (2004. 7. 12.)
* CBS 라디오 에세이(2004. 7. 12. 밤 11:55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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