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tv

(전주열린문교회 담임목사. 시인. 수필가. 생명평화전북기독인연대 공동대표. 전북학복협 공동대표)

제목 : 파편화된 제자도(영성)를 넘어서

--- 십자가 정신의 회복·보수와 진보의 하나됨을 위하여 ---
<뉴스앤조이> 제 60 호(2003-05-08)에 발표된 '한국 근현대 100년 속의 개신교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의 약 70%가 "개신교인이 자기중심적"이라는 지적을 했다는 낯뜨거운 중간 결과가 나왔다.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는커녕 세상의 천덕꾸러기가 되고 만 것 같아 하나님 아버지께 몹시 죄송하고 가슴 아프다. 예전엔 "밖에 나가 돌을 던지면 김씨·박씨·이씨가 맞는다"했는데 요즘은 "길바닥에서 돌을 던지면 목사·장로·집사가 맞는다"고 할 만큼 여기저기 교회당도 아주 많고 기독교인이라 자부하는 이들도 곳곳에 참 많다. 듣기에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출입하는 의원들의 45% 정도가 기독교인이라는데, 정치권을 포함해서 우리사회는 도무지 거룩해지지 않고 교회는 나날이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가고 있으니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복음서(마 22:34-40, 참조 : 막 12:28-34, 눅 10:25-37)에 기대어 그 원인을 잠시 짚어 보도록 하자.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율법 중에 어느 것이 큰가"하는 아주 꾀까다로운 질문으로 예수님을 시험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절대시하던 유대인들 앞에서, 수많은 율법 가운데 한두 가지를 크다고 할 경우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질문은 예수님께 꽤 껄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아주 지혜로운 말로 이 가시 돋친 분위기를 가볍게 헤쳐 나가셨다.

  예수님은 이렇듯, 수많은 율법조항의 눈부신 요약인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제1계명∼제4계명)과 '이웃 사랑'(나머지 여섯 계명)의 두 축으로 압축하심으로써, 그 대상이 하나님이건 이웃이건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언약백성의 본질임을 밝혀 주셨다.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을 생각할 때, 여기 예수님의 답변 가운데 "이 두 계명"이라는 말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의 "<두 계명>이 율법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셨다. 곧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유기적으로 엮여 있어서, 나눠 생각할 수도 없고 또 그리해서도 안 된다는 뜻일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임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이웃 사랑'의 뿌리가 반드시 '하나님 사랑'에 있어야만 함을 강조함과 동시에,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함으로써 이웃사랑의 수준은 하나님 사랑에 걸맞아야 하며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검증되어야 함을 강조하셨다. 곧, 하나님과 언약백성의 '수직관계의 축', 언약백성과 이웃과의 '수평관계의 축'이 한데 어우러진 '십자가의 삶'을 신앙생활의 절대적 표준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영생의 길을 묻는 부자 청년과 진지하게 대화하실 때도 예수님은, 십계명의 후반부 '이웃에 관한 계명'을 끈질기게 다룸으로써 그 청년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의 진정성을 확인시켜 주고자 애쓰셨던 것이다.(마 19:16-22, 막 10:17-31, 눅 18:18-30)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나라밖 어느 신학자가 한국교회의 어지러운 분열상을 꼬집어 비아냥거렸듯이,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와 '그리스도'를 싸움 붙이는 일밖에 한 것이 거의 없다. 한국교회에 크고 작은 장로교 교단의 숫자만 150을 넘는다니 그런 욕을 먹어도 싸다. 교단·교파의 분열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그 분열의 심각한 후유증으로 한국 기독교인들의 '파편화된 제자도(영성)' 역시 세월 따라 참으로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이른 바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그동안 대체로 하나님과 신자와의 수직 관계에만 온 정신을 쏟다시피 했다. 한편 진보주의 진영에서는 대체로 이웃(세상)과의 수평 관계에 더 많은 정성을 기울여 왔다. 그런 과정에서 보수 진영은 아주 자연스럽게, '뒤틀린 경건주의'와 '기복주의'의 틀에 갇힌 나머지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개교회주의'에 휘말려 참으로 '불건전한 성장주의'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반면 '사회복음'을 외치며 나선 일부 진보 진영은, 참으로 투박한 운동논리의 앙상한 뼈대만 붙들고 있다가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고백이 아주 허약해지고 말았다. '보수' '진보'를 가릴 것 없이 이른 바 제자도(영성)의 파편화 현상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굳어지고 만 것이고,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우주적인 영광을 가려버림으로써 한국교회를 민족으로부터 스스로 소외시키고 배척 당하게 만든 탓에 그처럼 낯뜨거운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족(세상)의 역사적 현실에 눈길을 주지 못하게 만드는, 일부 보수 진영에 두루 퍼진 뒤틀린 경건주의의 뿌리는 무엇일까. 어느 한국기독교 역사학자의 적절한 지적처럼, 무엇보다도 이른바 신사참배로 상징되는 한국교회의 참으로 부끄러운 친일행적의 죄를 뿌리뽑지 못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해방 후, 기독교계의 친일인사들이 공식적으로 회개하지 않은 채 한국교계의 지도자로 눌러 앉으면서 교회의 역사적 결단이 필요한 결정적인 순간마다, '정·교 분리'의 구호 아래 껄끄러운 '역사적 현실' 문제를 애써 외면하는 흐름을 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역사적 현실에 돌려야할 관심을 '뒤틀린 경건주의의 틀'로 교묘하게 위장하는 작업을 내내 해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국 보수주의 교인들처럼 하나님과의 수직관계(새벽기도회, 주일성수, 헌금, 성경공부, 묵상, 기도, 봉사 등등)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이들도 드물다. 하나님과의 수직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만큼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또 아주 잘 하는 일이지만, 문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데 있다. 곧 하나님과의 수직관계는 신앙생활의 시작일 뿐 끝이 아니며, 하나님 앞에 예배공동체로 모이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임과 동시에 '흩어진 교회'로서의 소명(부르심)을 확인하고 새 힘을 얻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으로 흩어지기 위한 결정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망각한 데에 보수 진영의 아픔이 있다. 물론 꽁생원 취급을 당하면서도 보수 진영이 한국교회 제자도(영성)의 수직적 축을 그간 잘 간직해 준 공로는 대단히 높게 평가해야만 한다.

  진보 진영의 사회개혁 운동은 또 어떤가. 이들은, 일부 보수 진영이 하나님과의 수직관계에 주로 매달리면서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을 교회당 안에만 가두고 세상의 역사적 현실에 거의 눈을 돌리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을 '조무래기 지역신'으로 격하시키려는 듯 비좁은 시야를 지닌 모습에 속상한 나머지, '사회복음 운동'을 외치며 온 몸으로 세상을 향해 내달려 왔다. 그 결과 진보 진영이, 이 땅의 민주화를 비롯해서 어두운 역사적 현실을 바로잡는 데 크게 기여한 면이 많지만, 문제는 그 사회 개혁적 열매들이 복음전파의 거룩한 열매로 효율적으로 이어지지 못함은 물론 그것들이 '신국(神國)적인 가치'를 획득하도록 이끌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는, 사회개혁운동에 마냥 몰두하는 세월이 이어지면서 차츰 강화되는 운동논리 아래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우주적 영광과 능력에 대한 신뢰가 시나브로 약화된 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상당수의 정직하고 의식 있는 진보주의자들이 대체로 이 점에 공감하고 있는 바, 좀 늦은 느낌은 있지만 그나마 이를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를 막론하고, 영광스런 십자가(복음)를 두 토막 낸 신성모독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오직 가슴을 찢는 통회 자복이 필요할 뿐이다.

  솔직히 예수님은 보수주의자들에게 '하나님 사랑'을 모두 맡기신 적 없다. 진보주의자들에게만 '이웃 사랑'을 맡기지도 않으셨다. 어쩌면 예수님은 '진보'니 '보수'니 하는 낯선 용어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 관계에만 매달려 이른 바 '은혜 받는 일'에만 골몰한 나머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은혜를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나눠주는 일'은 등한시한 죄, '이웃 사랑'에만 마음을 쏟은 나머지 정작 하나님과 자신의 수직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일을 가벼이 여긴 죄, 반 토막 낸 십자가의 각기 한 축만을 붙들고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전부인 양 착각하여 서로를 무참히 정죄하며 자신도 모르게 '환원주의'의 오류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던 죄가 있으므로 감히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한국교회의 복음 이해는 얼마나 얄팍하고 파편적(부분적)이었는가.

  이대로는 안 된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도 안 된다.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이 둔화되고 교인수가 줄어든다 하여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다. 살 많이 찐 사람이 반드시 건강한 것은 아니듯이, 지 교회의 몸집을 키우고 아등바등 그것을 유지하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교회의 물량적 성장을 위해 매우 비복음적인 잡다한 방법론에 마음 쓸 일이 아니라, 진보와 보수를 아우름으로써 <파편화된 제자도(영성)를 회복하는 것>이 훨씬 더 급하다. 영광스런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가지를 아주 자연스럽게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십자가 은혜 아래 있는 교회공동체가 십자가 복음의 본래 정신을 따라 예배당 안팎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아름답게 펼쳐낼 수 있을 때 복음의 영광은 저절로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분명한 말씀처럼,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한 참 신앙인이라면 하나님과 신앙인의 수직관계와 신자와 이웃(세상)과의 수평관계를 나누는 일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만일 그리되면 십자가가 쪼개지는 것이고 토막 난 십자가는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 복음은 이 세상(이웃·열방)을 위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주적인 복음은 더 이상 우리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진보'니 '보수'니 하는 속 좁고 비생산적인 용어(이름) 자체가 사라지고, 십자가 복음의 우주적인 영광 아래 진보와 보수가 온전히 융합되어 성령께서 이루신 본래의 하나됨을 회복할 때 비로소 하늘 영광이 이 땅에 찬란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받은 수직적 은혜는 수평적 나눔을 통해 비로소 빛을 내기 때문이며, 개인적으로 부름 받은 우리의 구원은 반드시 공동체적으로 완성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낯뜨겁고 어두운 지난날을 거울삼아, 우리의 연약함과 탐욕과 무지 탓에 무참히 파편화된 제자도(영성)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서 십자가 복음 본래의 우주적인 영광을 회복하기만 하면 한국인의 70% 이상이 "기독교인이 가장 멋지다"는 데 선뜻 동의하는 날이 오지 말란 법이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