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교우들과 함께 전주 근교의 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저는, 산을 타기에는 아직 힘이 부치는 몇몇 어린아이들을 앞세우고 대열의 선두에 섰습니다.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은 까닭인지, 산 중턱에서부터 아이들의 숨소리가 뜻밖에 거칠게 들려 오기 시작했습니다. 끊임없이 보채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계속 산을 오른 끝에 간신히 정상 바로 아래 비탈에까지 다다랐습니다만, 유난히 가파라 보이는 마지막 비탈 앞에서 이미 많이 지친 아이들은 그만 몹시 낙심한 눈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아이들의 손을 붙잡아 끌며 마지막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정상을 20여 미터쯤 남겨둔 지점에서, 유난히 힘들어하는 어느 아이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네가 맨 먼저 저 봉우리에 올라가 볼래?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네가 충분히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자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박차고 나서서 마침내 제일 먼저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아이들보다 몇 걸음 늦게 정상에 오른 저는 그 아이를 열심히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신이 난 그 아이는, 숨이 턱에 차서 뒤이어 올라오는 우리 일행을 죄다 붙들고 자기가 "목사님보다 먼저 1등으로 올라 왔다"고 연신 자랑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한껏 부풀어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는 아이를 보며, 약한 아이를 앞세워 맨 먼저 정상에 오르게 한 제 마음이 얼마나 푸근하고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1953년, 세계 최초로 해발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뉴질랜드 출신의 등반가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자신의 80회 생일잔치에,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던 네팔 출신 짐꾼대장 텐징 노르가이를 초청하여 각별한 감사의 정을 표했다 합니다. 당시 힐러리보다 등반 경험이 훨씬 많았던 텐징 노르가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기가 먼저 정상에 오를 수 있었는데도, 정상 바로 앞에서 길을 비켜서서 힐러리가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도록 배려해 주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남보다 앞서갈 능력과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발 비켜서서 약한 이들에게 길을 열어 줌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힘을 북돋아 험한 세상 느긋하게 함께 걷는 여유와 아량이 있는 멋진 사람들, 1등의 기쁨 못지 않은 2등(꼴찌)의 보람으로 한껏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이들의 삶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살벌한 이 세상에서, 나보다 약한 내 이웃이 나보다 앞서가며 삶의 보람과 기쁨을 누리도록 큰사랑으로 섬기는 여유와 아량을 지님으로, 우리 모두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그처럼 아름답고 멋지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 CBS 라디오 에세이(2004. 05. 24. 밤 11:55 방송)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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