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으신 홀어머니를 고향에 두고 군에 입대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 때문에 마음 졸이느라 힘든 군대생활 더더욱 힘들게 견디는 안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에게 고향에서 보내온 편지 한 통을 소대장이 전해 주었는데, 그 편지를 받아 몇 줄 읽기 시작하자마자 이 청년이 갑자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대장을 비롯해서 영문을 모르는 부대원들은, 한창 나이의 건장한 청년이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진 채 동료들의 제지에도 아랑곳 않고 엉엉 우는 모습에 불길한 지레짐작만으로 너나없이 나서서 그 청년을 위로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이 청년의 마음이 약간 진정된 후 소대장이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청년이 소대장에게 겨우 겨우 털어놓는 이유는 참으로 엉뚱했습니다. 청년의 어머니는 일자무식이어서 글을 전혀 쓰지 못했다는 것, 그런데 자기가 군대에 온 뒤, 아랫집에 사는 코흘리개 초등학생을 불러다가 그 어린것한테서 자기 어머니가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셨다는 것, 그리고 조금 전에 받은 바로 그 편지가 어머니께서 손수 써보낸 첫 번째 편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연을 들은 소대장이 청년의 손에서 그 편지를 넘겨받아 읽어보니, 초등학생용 공책 한 장을 대충 뜯어서 연필에 침을 듬뿍 발라가며 “내 아들 아무개야 잘 있느냐? 에미도 잘 있으니 밥 잘 먹고 건강히 잘 지내라”며 꾹꾹 눌러쓴 내용이 전부였는데, 그나마도 맞춤법도 엉망, 글씨 또한 삐뚤 빼툴 몹시 어지러웠습니다. 그런데도 그 어설픈 편지가 억센 청년을 그만 엉엉 울게 만든 것입니다.
예쁜 디자인의 향내나는 고급 편지지에 쓴 것도 아닙니다. 얼마나 예쁘게 쓰인 글씨도 아니었습니다. 편지 내용에 무슨 심오한 철학이나 사상이 담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전문작가들이 써낸 시나 수필처럼 문학적 기교가 탁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늙으신 어머니가 어찌어찌 글을 배워 군인이 된 아들에게 손수 써 보낸 편지 한 통이 사람을 울게 만든 것입니다.
솔직하면 손해보고, 진실하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이비 진리가 판치는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거짓 웃음과 입에 발린 거짓말로 가슴속 살벌한 증오의 칼날을 숨긴 채 고공 줄타기하듯 피곤한 관계 속에 숨막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청년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서 보듯이, 진실보다 더 감동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은 없습니다. 비록 빛나는 모양이 없고 눈부신 내용이 없을지라도, 마음과 마음, 가슴과 가슴이 정직하게 부딪히는 것보다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거짓과 위선, 부질없이 세련된 기교와 능란한 처세술의 추악한 가면을 모두 벗고, 이 어머니의 편지처럼, 있는 그대로의 소박하고 솔직한 모습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따스한 감동을 주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 CBS 라디오 에세이(2004. 5. 31. 밤 11:55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라디오 에세이] 방송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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