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리 목련 복사꽃에 철 늦은 매화까지 흐드러지게 피는 봄철이 숨가쁘게 지나가고 언뜻 초여름이 느껴지는 계절이 되면서 등산객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이즈음에는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도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제법 가파른 산비탈을 종종걸음으로 예쁘장하게 오르내리는 모습을 더러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김새만큼이나 산을 오르내리는 모습도 가지가지, 때로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숨소리나 내딛는 발걸음의 여운 속에서 그 사람의 성품이나 기질 또는 근황을 얼추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산이지만 산을 오르는 이의 체력이나 건강상태 또는 훈련량에 따라 산길을 헤쳐 나아가는 방식이나 속도 역시 제각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은 청년대로, 나이 지긋한 중장년은 또 그대로,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은 어르신대로, 산과 만나 산과 사귀는 모양새 역시 봄동산의 꽃빛깔만큼이나 다양합니다.
제법 오랜 세월을 산과 친근히 지내는 사이 저도 저 나름의 등산요령이 몸에 뱄습니다. 인간이 기계가 아닌 까닭에 매번 기계처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속도로 산행을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됐다 싶게 몸에 익은 산행의 흐름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몸은 단 한 순간도 멈춤이 없이 끊임없이 성장과 쇠퇴를 반복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어제의 내 몸이 오늘의 내 몸이 아니듯이 오늘의 내 몸 또한 내일의 몸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그 점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사람마다 오랜 세월 해묵은 습관처럼 몸에 밴 나름대로의 기술과 지혜는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입니다. 웬만하면 그렇게 몸에 익은 자연스런 흐름을 깨지 않고 원만히 산행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습니다.
그런데, 혼자이든 동행이 있든, 산행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공연한 경쟁심이 발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산을 오르내리는 수많은 등산객들이 이름도 성도 모른 채 물 흐르듯 숱하게 스쳐 지나가고 나 역시 그들 곁을 그저 그렇게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건만, 때로는 저만치 앞서 가는 어떤 이를 훌쩍 앞지르고 싶은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때로는 얼마쯤 뒤쳐져 산을 오르는 이에게 행여 따라잡힐세라 가뜩이나 차오르는 숨을 이를 앙당물고 참아가며 발걸음을 재촉할 때가 있습니다. 앞서 가는 이나 뒤따라오는 이는 그저 그냥 그 나름의 산행을 즐기고 있을 터인데도 나 혼자서 그들을 어떻게든 극복해야만 할 경쟁자로 생각한 탓에 가뜩이나 숨가쁜 산행길이 참으로 고달플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래봤자 정상에 올라 시간을 재보면 괜한 힘만 썼지 걸린 시간은 그저 거기서 거기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어쩌면 참으로 소중한 동행이 될 수도 있었을 사람들과 속마음으로 내내 경쟁하며 혼자 가쁜 숨을 부질없이 몰아쉬느라 여유로와야 할 산행을 스스로 망친 안타까움에 정상에서 혼자 부끄러워 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의 꿈과 야망이란 것 또한 바로 그처럼 허망한 도깨비 같은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만 내려놓을 수 있다면, 아무리 가파른 인생의 고비도 얼마든지 여유 있고 멋스럽게 타고 넘을 수 있을 것을, 그 소박한 깨달음을 얻기까지 무에 그리 긴 시간이 필요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2005. 4. 11.)
* CBS 라디오 에세이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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