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 휴가 기간에, 약간 나빠졌던 건강이 얼추 회복된 틈을 타서 작은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무작정 길을 나서 한 이틀 동안 남쪽 바닷가에 다녀왔습니다. 누가 오라는 곳도 전혀 없고, 딱히 어디를 가보고 싶은 곳도 별로 없는데 제깐에 큰 용기를 내어 용감히 일상탈출의 대모험을 감행, 말 그대로 방랑(?)의 길을 한 번 나서본 것입니다. 휴가 기간에 계속 집안에만 처박혀 빌빌대는 한심한 남편을 보다 못한 나머지, “단 며칠만이라도 조용한 곳에 가서 바람이나 좀 쐬고 오라”며 등 떠미는 속 좋은 아내의 권유와 격려가 큰 힘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내의 따스한 권유에 “어느 날 눈에 띄지 않으면 바람 쐬러 나간 줄 알고 찾지 마시라”는 허세로 그렁저렁 대꾸만 하다가, 어느 날 오후 작은 배낭 하나 챙겨 들고 슬그머니 집을 나서긴 했는데, 막상 나서니 정말 어디 갈 데가 없었습니다. 속마음으로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20대 초반 공수특전단 시절의 실력을 살려 그냥 걸어서 남원을 거쳐 섬진강 변을 따라 한려수도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싶은 생각도 꿀떡같았지만, 몇 년 전 장딴지 근육이 파열되는 큰 부상을 당한 뒤로 흐린 날이면 만만찮은 통증으로 여전히 저를 괴롭히는 한심한 다리에 대한 확신이 끝내 서질 않아 도보 배낭여행은 머릿속으로만 끝내고 한반도 남해안을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때로는 그냥 걷다가, 조금 다리 아프면 지나가는 버스도 조금 타다가, 어릴 적 읍내에 나가는 소달구지를 슬금슬금 얻어 타고 학교에 다니던 재주로 짐 실은 트럭도 한두 번 얻어 타며, 참으로 아기자기하게 아름다운 우리 한반도 남녘 바닷가를 슬쩍 둘러보았습니다.
작은 어촌이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어느 바닷가 작은 산봉우리에 올라가 좀 반반한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은근히 따가운 봄볕에 얼굴이 까맣게 탈 정도로 죽은 듯이 앉아 멀리 연회색으로 가물거리는 수평선을 한 나절 동안 지켜보았습니다. 몹시 시끄럽던 방안에서 누군가가 텔레비전 스위치를 갑자기 끈 뒤에야 그동안 몹시 시끄러웠음을 한꺼번에 깨닫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너울대는 파도와 잔물결이 부대끼며 일렁이는 하얀 물거품이 연이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바다, 속 시원히 활짝 트인 수평선을 거의 온종일 지켜보면서, 비로소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좁은 공간에만 갇혀 지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미 쳇바퀴 돌 듯 지내며 시야가 한없이 좁아지는 사이, 거미줄처럼 뒤엉킨 세상살이의 잔물결에 함부로 집착하다가 스스로 늪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도 했습니다.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해류의 복잡한 흐름 속에 수많은 생물들이 살기 위해 또한 어지럽게 몸부림칠 터이지만, 거인처럼 말없이 버티고 서서 긴 세월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다를 보며 배운 것이 참 많았습니다. 한낮을 지나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갈 무렵, 마침내 ‘파도가 없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는 아주 평범한 결론을 얻고 저려오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우리 삶의 바다에 마냥 파도가 없기만을 헛되이 바라며 우리 모두가 부질없이 허우적거리는 것은 아닌가를 되물어 보면서…… (2005. 4. 4.)
* CBS 라디오 에세이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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