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다 잠깐씩 숨을 돌릴 때 중요무형문화재 45호 대금산조 인간문화재인 죽향 이생강 명인의 대금산조를 즐겨 듣습니다. 산조 자체가, 지나칠 정도로 격식을 강조하는 정악장단이 아닌 민속악장단을 채택한 까닭에 비교적 편안하게 다가오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는 것에 관한 한 신선"으로 추앙 받는 이생강 명인의 신들린 듯한 대금 소리에 붙들린 까닭이기도 하고, 젊은 시절 한동안 넋을 빼앗긴 적이 있던 소리북에 대한 짙은 향수 때문에 지금은 고인이 된 소리북 분야의 인간문화재 김득수 선생님의 장고 가락에 귀 기울이며 세월 속에 많이 무뎌진 우리 장단에 대한 감각을 아주 잃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날씨가 좀 우중충할 때는 좀 빠르고 경쾌한 중중머리와 잦은머리 부분을, 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을 때는 진양조와 중머리 부분을 골라 듣습니다. 요즘은 멀티미디어 기능이 탁월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많아 윈앰프 프로그램을 구동시킨 다음 되풀이 기능을 활용하여 어떤 때는 꽤 긴 시간 동안 같은 대목을 듣고 또 들으며 주어진 일을 처리하기도 합니다.
전라북도지정 인간문화재인 명창 홍정택 선생님으로부터 소리북을 전수 받던 시절, 매번 소리꾼의 소리에 맞춰 북가락을 연습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때는 판소리 주요 대목의 공연실황을 녹음한 테이프를 녹음기에 걸어 두고 이웃집 사람들에게 욕먹지 않기 위해 북통에 이불을 둘둘 감아 놓고 북을 연습하는데 어느 순간 북 한배가 영 맞지 않아 당황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엔 내 북가락의 한배에 문제가 있어 그런가 했는데 국악계의 거봉으로 손꼽히는 이들도 비슷한 고백을 하는 것을 들으며 조금 마음이 놓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판소리 공연현장에서 고수와 소리꾼 그리고 청중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들썩거리는 현장의 분위기와 상황에 따라 순간순간 요령껏 박을 밀었다 느꿨다 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임을 꽤 오랜 수련을 거친 뒤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공연도중 장단의 한배가 아주 조금씩 빨라져 가는 것을 판소리 전문 용어로 "몰려간다"고 합니다. 컴퓨터 멀티미디어 프로그램에 녹음파일을 걸어놓고 같은 대목을 되풀이시키다보면, 곡의 끝부분 다음에 바로 그 곡의 첫 부분이 뒤따라 나오는 순간이 있는데 놀랍게도 그 분야의 신선으로 추앙 받는 이들의 연주에서조차 바로 그 대목에서 장단이 정말 머리카락 한 올만큼씩 '몰리는' 현상이 또렷이 확인됩니다. 연주자나 반주자 어느 한 쪽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긴 연주시간 내내 서로에게 서로를 맞춰 보듬으려는 노력이 공연과정에 배어든 결과가 그렇게 나타났을 것입니다. 이생강 명인의 대금과 김득수 명인의 장고가 어우러져 세계적인 음악작품으로 극찬을 받는 '명작 중의 명작'에서조차 한배의 처음과 끝이 약간 다른 것을 느낄 때마다 세상만사 '초심(初心)'을 줄기차게 유지하는 일이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님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하기야 이생강 김득수 선생님 같은 불세출의 명인들이 함께 어우러졌기에 망정이지, 그저 그렇고 그런 쟁이들이 만났다면 처음과 끝의 차이는 차마 말을 끄집어내기조차 어려웠을 터, 아무튼 처음 마음을 끝까지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게 바로 빛나는 명품 인생 아니겠습니까? (2005. 3. 28.)
* CBS 라디오 에세이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