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년에 한두 번 모이는 대학동기생 모임에 나갔습니다. 동기생들을 볼 때마다 30여년 전 대학시절의 순수와 객기가 바로 어젯일인 듯 또렷하게 되살아나는데, 자식들 결혼 이야기가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선뜻 받아들이기 싫은 세월의 무게를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했습니다. 어설픈 더벅머리와 검정 뽀쪽구두의 촌티를 도무지 감출 수 없었던 가난한 국립사범대학생들이 이제는 사회의 중견 대열에 올라서서 누구는 교육청의 장학사로 또 누구는 교감후보로 또 누구는 대학의 고참 교수로 주어진 자리에서 갈 길을 열심히 가는 당당한 모습을 확인하는 것으로 훌쩍 날아가 버린 30여 년 세월의 아쉬움을 그나마 달랠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어린 시절 죽어도 되기 싫다던 선생이 되어 10여 년을 살다가 뜻밖에 목회자의 길로 접어든 탓에 사범대학 동기생 모임에서는 그냥 ‘별종’에 속하지만 대학시절과 똑같이 속 편히 어우러지는 술좌석에서도 제 몫의 청량음료를 따로 시켜 주며 살뜰히 배려해 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대학시절처럼 함께 어우러지는 데 스스럼은 별로 없습니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멀리 서울서 달려 내려온 여자 동기생은 사위 될 총각이 장모 후보인 자기에게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따스하게 대해주는 지를 자랑하느라 열을 내고, 그 곁의 동기생 역시 엇비슷한 자식 이야기로 장단을 맞추며 분위기가 어우러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인생이 참 짧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을 하나나 둘 정도 둔 동기생들이 대부분인 까닭에, 셋째와 넷째가 아직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저에게 “아무튼 늦게까지 젊게 사니 참 좋겠다”며 반농담조로 걸어오는 친구들의 말을 들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았습니다. 아무튼, 자식들 결혼시킬 때 동기회에서 주는 축의금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우리 셋째와 넷째가 결혼할 때쯤이면 우리 모두 다 70대 늙은이가 되어 있을 터이니 그 아이들 몫은 좀 당겨서 지급해 주는 게 어떠냐”는 으지짠한 농담으로 새삼 묵직하게 다가오는 아비의 짐을 마음 속으로 추슬렀습니다.
밤늦게까지 교회당에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딴엔 열심히 산다고 바지런히 꼼지락거리다 지친 몸으로 곤히 잠들어 있는 4남매의 얼굴을 한참씩 들여다 볼 때가 있습니다. 좀 피곤해 보이기는 해도 헤아릴 수 없는 평안과 안식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네 아이들의 얼굴에 깃들어 있는 모습을 보며 마지막 순간까지 부끄럼 없는 아비가 될 것을 다짐 또 다짐합니다. 사실, 어미 아비가 없으면 한순간에 길거리로 나앉아 천덕꾸러기가 될 아무 대책 없는 아이들은 어설픈 제 부모를 철석같이 믿고 그토록 태평한데, 다소간의 경제능력이 손에 쥐어진 어른들이 늘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러니입니다.
성경에,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준다는 약속(요 1:12)이 들어 있습니다. 정말 대책 없는 우리 아이들이 믿음으로 부모의 권세를 똑같이 누리며 당당하게 사는 것처럼, 믿음으로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받은 이들이 헤아릴 수 없는 평안과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역설은 제발 없어야 할 것입니다. (2005. 3. 21.)
* CBS 라디오 에세이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