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높이나 모양이 제각각이듯이, 산에 오르는 사람들의 산행 자세나 습관 또한 천차만별입니다. 산에 오르는 옷차림에서부터, 산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정말 있는 그대로 배어납니다. 등산복과 등산화 그리고 등산모자와 배낭 지팡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격식 있게 갖추어 산을 찾아 나선 이가 있는가 하면, 아예 양복 정장 차림에 뾰족구두 그리고 양산까지 곱게 받쳐들고 갖은 모양을 낸 채 수줍게 산비탈을 올라서는 연인들도 더러 있습니다. 어떤 이는 한겨울에도 반소매 속옷만 덜렁 입고 철 이른 객기를 부리며 으스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 험한 산골짜기 자갈길을 아예 맨발로 위험하게 징검징검 걸어다니기도 합니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는 시간에 땅거미 유난히 빨리 지는 산길을 전등도 없이 정말 겁없이 어슬렁거리며 오르기 시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타고난 시골뜨기인 저는 어려서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산이나 물과 친하게 지내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틈만 나면 산을 자주 찾고 물을 사랑하는 축에 들지만 마음 한 쪽에는 산과 물에 대한 두려움 또한 항시 있습니다. 산과 물을 좋아하면서도 그 산과 물을 많이 두려워하는 마음은 군복무기간에 좀더 강화되었습니다. 몹시 고단한 공수특전단원 생활을 하며, 지도와 나침반 하나만 달랑 들고 난생 처음 가보는 태백 준령의 칠흑 같은 야간 산악행군을 밥먹듯 하면서 산과 물에 대한 친근감이 커 가는 한편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 또한 무한대로 커졌습니다. 팀 리더로서, 한 순간 방심하는 사이 소중한 생명이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는 위태위태한 상황을 숱하게 겪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특전단에서는 10km 구보를 할 때도 ‘폭풍구보’라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100m 단거리경주를 하듯이 내달립니다.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중도에 쉬는 법은 아예 없습니다. 산악행군도 마찬가지, 30-40kg 무게의 배낭을 짊어지고 일단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 제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중간에 쉬는 법은 없습니다. 부득이 쉬어야 할 때는 배낭을 내려놓고 편히 앉아 쉬지 않고 반드시 서서 쉽니다. 그런 까닭에, 산을 오르기 전에 지도를 놓고 미리 그 산의 높이와 산행의 코스를 치밀하게 분석한 다음 아예 처음부터 체력을 충분히 안배한 속도로 산행을 시작합니다. 그리해도 숨이 턱에 닿을 듯 힘든 순간이 끊임없이 찾아오지만 끝까지 인내합니다. 이런 특전단 생활을 통해 제 가슴과 뼈에 새긴 삶의 큰 원칙이 있습니다. 곧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산을 오르다보면 산비탈에서부터 냅다 내달리며 열심히 앞질러 가는 사람들을 더러 만납니다. 얼마쯤 올라가다 보면 완전히 맛이 간 얼굴로 소나무 그늘 밑에 주저앉아 있습니다. 조금 더 지나쳐 가다보면 아까 그 사람이 또 쏜살같이 씩씩대며 앞질러 올라갑니다. 다시 얼마쯤 올라가 보면 숨을 할딱이며 또 널브러져 있습니다. 결국 산 정상에는, 쉬지 않고 서서히 산을 오른 제가 먼저 올라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진하게 배어 있는 산을 오를 때마다, 삶의 호흡을 묵묵히 조절하며 겸손히 인내하는 법, 꾸준히 걸으면서 쉬는 법을 다시 익히고 또 배웁니다. (2005. 3. 7.)
* CBS 라디오 에세이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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