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기린봉이나 완산칠봉 혹은 전주 근교의 모악산이나 오봉산을 찾아갑니다. 늘 책상 앞에 고부라져서 성경이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가르치는 일을 주로 하는 저로서는 나름대로 신체활동의 균형을 맞추는 시간이기도 하고, 사방이 시멘트벽으로 둘러싸인 사무공간에서 벗어나 신선한 바깥바람을 쐬며 일상으로부터 한두 발짝 물러서서 제 삶의 테두리를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스스로의 자세를 바로잡는 즐거움도 쏠쏠하게 누릴 수 있는 기회여서 꾸준히 산행을 하는 편입니다. 때로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산길을 걷다 돌아와도 그 또한 그대로 상큼한 맛이 느껴지는 걸 보면 제 본바탕이 시골뜨기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기야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집에서 학교까지의 시오리 남짓한 길을 그 무거운 책보따리를 들쳐 맨 채 날마다 걷고 뛰면서 자랐으니, 풋고추 된장 고추장 맛만큼이나 푸근한 흙 냄새에 익숙해 있는 제 본바탕을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는 없을 터입니다. 책상 앞에서 책을 읽으면서는 앞서가신 여러 선배 어르신들의 속 깊은 생각을 배우는 것이 많은 반면, 혼자 산행을 하면서는 때로 가슴 속 여기저기에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제 생각의 갈피를 하나씩 챙겨 들고 때로는 몹시 유치한 생각이나마 그 벼리를 간추리는 재미가 있어 좋습니다. 몇 사람이 되든 동행이 있으면 그 또한 그 분들의 세상사는 이야기를 엿들으며 자잘한 삶의 지혜를 배우는 재미 또한 작은 것은 아닐 터이지요.
산을 오르내릴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네 인생은 산길을 걷는 것과 참 많이도 닮아 있습니다. 산 정상을 향하는 갈래길이 수없이 많은 것도 그렇고, 한 번 산행에 오직 한 개의 길밖에 걷지 못하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한 동안 마냥 오르막길만 있을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뜻밖에 내리막길이 더 많을 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꾸준히 산길을 걷다보면 오르막 내리막이 그래도 비교적 고르게 나타나는 것도 그렇고, 오르막길보다 무심코 만만하게 여긴 내리막길에서 발을 헛디뎌 다칠 가능성이 더 큰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숨이 턱에 닿을 듯 힘든 코앞의 오르막에서 ‘그저 이 봉우리 하나만 넘으면 바라던 정상이 나타나겠거니’ 생각하고 모든 힘을 다 썼는데 막상 올라서서 보면 엉뚱하게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봉우리들이 또 나타나 한 순간에 그만 맥이 완전히 풀리고 마는 것이나, 아무튼지 이를 악물고 한 발짝 두 발짝 기어오르다보면 마침내 정상에 서서 끝 모를 환희에 가슴이 터져 나갈 듯한 감격을 누리는 것이나, 어느 누군가는 정상아래 어느 산비탈에서 지친 발길을 아쉽게 돌이키기도 더러 하는 것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언젠가, 지친 나머지 중도에 허망하게 포기하고 아쉽게 돌아서야만 했던 그 길을, 몸을 열심히 담금질한 얼마쯤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거뜬히 완주하여 정상에 어엿이 올라 챌 수 있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아무튼 산은, 사시사철 각기 다른 모습과 호흡으로 어수선한 우리 삶의 자세를 꾸준히 가다듬을 수 있도록 창조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참으로 귀한 인생 교과서입니다. (2005. 2. 28.)
* CBS 라디오 에세이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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