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공부하기 전,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한국고전시가를 전공하게 되면서, 세계적인 소리예술인 판소리의 사설의 시가(詩歌)적 성격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판소리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판소리에 마음이 쏠리면서 마음 야무지게 먹고 전라북도 지정 무형문화재이자 명고수이신 홍정택 선생님으로부터 소리북을 전수 받았습니다. 난생 처음 북을 잡았지만 홍 선생님으로부터 '천재'라는 과찬(過讚)까지 자주 들을 만큼 북을 다루는 제 솜씨가 말 그대로 일취월장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가다듬은 소리북 가락으로, 생전의 박동진 명창과 함께 전북예술회관에서 잠시나마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럴 듯한 고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북가락을 연습하는 동안, 장정이 올라가서 굴러도 부서지는 법이 없는 북을 북채로 두 개나 찢어 먹을 만큼 한동안 소리북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어떤 때는 손가락 안쪽이 찢어져 북통에 벌겋게 피가 뿌려진 것도 모르고 북소리에 미치기도 했습니다. 소리북 이론에 대한 공부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여 판소리 관련 학회지에 판소리 소리북 관련 논문을 몇 편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서양음악의 오페라와 달리 판소리는 이른 바 예행연습 곧 리허설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냥 소리꾼과 고수가 만나 소리판이 벌어지면 소리꾼이 처음 뽑아내는 소리의 장단을 고수가 재빨리 간파하여 북가락을 잡습니다. 그래서 소리꾼과 고수가 처음 만나면 가끔 치열한 공력 싸움이 먼저 벌어집니다. 소리꾼이 일부러 엇박으로 소리를 시작하여 소리꾼을 놀래주면, 고수는 교묘하게 장단을 밀고 당겨서 소리꾼의 공력을 이리 저리 시험합니다. 어느 한쪽의 공력이 심히 달리게 되면, 소리가 끝날 때까지 공력이 달린 쪽은 오금을 펴지 못하고, 평소 갖고 있던 기량을 별로 풀어내지도 못한 채 소리판이 끝나버립니다. 그 공력의 차이가 비교적 조금 날 경우에는, 공력이 강한 쪽이 내내 소리판을 주도하며 약한 쪽을 끌고 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소리꾼들 입장에서는, 자기 소리 공력에 잘 어울리거나, 공력이 자기보다 웃돈다 할지라도 참으로 편안하게 소리판을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고수를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고수 이명창'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북가락이 화려한 사람은 곳곳에 제법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소리판에서는, 고수가 자신의 화려한 북가락을 자랑하느라 소리의 맥을 여기저기서 함부로 끊어 소리를 망쳐 놓기도 합니다. 소리의 맥을 따라 소리꾼의 소리를 순간 순간 뒷받침하여 절묘하게 북가락을 때려내는 고수, 소리꾼이 자신을 완전히 맡긴 채 두세 시간이든 네댓 시간이든 판소리 한바탕을 신명나게 완창할 수 있을 만치 소리북의 맛과 멋을 제대로 아는 고수는 참으로 귀합니다. 수많은 청중 앞에서 자기 북가락을 화려하게 내보이고 싶은 유혹을 끝까지 참고, 소리꾼을 한껏 북돋아 세워줌으로써 마침내 자신의 북도 생명을 얻는 매우 드높은 경지의 '고수 정신'이 우리 사회에 참으로 그리운 요즈음입니다. (2005. 1. 17.)
* CBS 라디오 에세이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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