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2004년이 갔습니다. 지난 연말 미국 CNN방송은, 부시 미국대통령의 재선, 날로 불길이 커지는 이라크 전쟁, 중동평화협상의 중요한 통로였던 아라파트 PLO 의장의 사망 등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던 2004년 국제정치판의 중요한 화두(話頭)로 ‘테러리즘’을 꼽았습니다. 고유가 세계경제, 유럽 통합의 결과물인 수퍼 EU의 등장 등 국제경제계의 종잡을 수 없는 파도 또한 몹시 드센 한 해였습니다. 가까이 중국에서는 새로 출범한 후진타오 체제의 ‘동북공정’이 시작되었고, 북핵-WMD 논란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가 되어 우리 한반도 주변 정세를 내내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동성결혼, 언론의 보도윤리 문제,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주축이 된 줄기세포-인간복제 논란 등으로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윤리적인 문제도 심각하게 제기된 한 해였습니다.
나라 안에서는, 2004년 연초 노무현 대통령 탄핵 파동으로 인해 4,15 총선에서 여대야소 정국이 형성되었지만, 총선에서 패한 작은 야당이 수구 보수세력과 연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국내 정가는 일년 내내 냉각정국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신행정수도 이전사업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김선일 씨 피살과 이라크 추가 파병으로 인한 치열한 몸싸움, 성매매금지특별법 시행, 북한의 용천역 대폭발사고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살벌한 국가보안법 개폐논쟁 등으로 국내 정치판 역시 국제정치판 못지 않게 시끄러웠습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자살 신드롬, 사람을 무려 21명이나 토막 살인한 유 아무개 사건, 연말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입 수능시험 휴대폰 부정사건, 밀양에서 일어난 청소년 집단성폭행 사건, 연예인들의 병역비리사건과 누드 열풍 등 우리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가늠케 하는 낯뜨거운 사건들도 많았고, 국제 고유가 덕분에 내수경기가 급격히 위축되어 서민들의 실물체감경기는 계속 바닥을 치고 있고, 마침내 청년실업이 50만을 넘어서는 심각한 불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일부 부유층에서는 느닷없이 매우 이기적인 ‘웰빙’ 바람이 거세게 불어, 공동체 의식이 차츰 사라지고 개인주의의 흐름이 걷잡을 수 없게 드세지는 것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어 본격적인 FTA 시대로 접어들면서 우리 농민들의 어깨도 한 풀 더 쳐지게 되었습니다. 기세 좋은 ‘욘사마’ 한류 열풍과는 정반대로, 우리 경제가 외국자본주도형 시장으로 점차 바뀌어 가는데도 정부의 관치(官治) 능력은 차츰 약해지고 있어서, 이대로 조금만 더 세월이 흐르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 심화되고 우리 시장은 마침내 외국자본에 종속되고 말 것이라는 불안한 전망이 경제전문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불행했던 2004년은 가고 2005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새로이 시작하고 있다.
쇠귀 신영복 님의 시구처럼, 새해 새아침의 이 벅찬 감격이, 2005년 끝자락에도 ‘처음처럼’ 파릇하게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2005. 1. 3.)
* CBS 라디오 에세이(2005. 1. 3. 밤 11:55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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