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전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도덕 교과서에 바람과 햇볕이 길 가는 나그네의 옷 벗기기 시합을 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먼저 바람이 그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바람이 드세질 수록 나그네가 옷깃을 더 힘껏 움켜쥐게 되었다는 것, 바람이 실패한 다음, 햇볕이 서서히 그 열기를 더해 느긋하게 더위를 내려보내자 무더위를 참다 못한 나그네가 마침내 스스로 옷을 활활 벗어버림으로써 결국 그 '옷 벗기기 내기'에서는 햇볕이 이기고 말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코흘리개 시절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생각하고 건성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나이테를 더할수록 점점 더 심오한 철학이 담긴 이야기로 다가옴을 느낍니다.
어김없이 '다사다난했던 한 해', 사람이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이 그토록 어렵고 힘든 일인지,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따스한 위로와 격려의 속삭임은 별로 없고 곳곳에 얼음송곳처럼 싸늘하고 날카로운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만 하늘에 닿을 듯 끊임없이 메아리칩니다. 그저 '좋은 게 좋다'고 옳고 그름의 판단을 모조리 유보한 채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가자는 말을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형제와 이웃을 깨우치되, 마음 깊은 곳에 그를 향한 사랑을 깔아 두지 않고 하는 무참한 비난과 정죄, 커다란 들보가 박힌 자신의 형편없는 시력으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입혀 '평화와 안식'을 무참히 빼앗는 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언젠가, 억울하게 들은 찬바람 나는 살벌한 말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고 그 아픔을 삭이기 위해 여러 날 불면의 밤을 지새던 중에, 평소 표정관리에 영 서툰 까닭에 부끄럽게도 그만 제 아픈 속내를 들키고 말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 어두운 표정이 좀 보기 안 좋았는지, 제가 양육하고 있던 대학부 학생 하나가 저를 조용히 불러내더니, 개인적으로 은밀히 상담할 일이 있어 드리는 편지이니 집에 들어가신 다음에 읽어 달라며 제 손에 편지봉투 하나를 쥐어 주었습니다. 편지를 받아 들고 집에 들어와 봉투를 열었더니, 편지지 속에서 영화관람권 두 장이 나왔습니다. 예쁜 편지지에는 아주 간단한 몇 줄 안부가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 요즘 많이 지쳐 보이십니다. 단 두시간만이라도 모든 것 다 잊어버리시고 사모님과 영화 한 편 보시고 들어오세요."
영화 표를 썩히면 안 될 것 같아 할 수 없이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본 그 날, 영화관을 나서면서 올려다 본 밤하늘의 별빛이 얼마나 해맑았는지 모릅니다. 그 날, 집까지의 제법 먼 길을 일부러 차를 타지 않고 걸어오면서 솔직히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과연 내가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하는 물음이 제 가슴에서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정말 부끄럽게 하여 스스로 마음을 열도록 하는 것은 찬바람 나는 살벌한 비난과 비판이 아니라, 비록 사소하고 작은 것일지라도 햇살처럼 따스한 마음이 담긴 사랑과 격려라는 것을 그 날 밤 한 시간 가까이 차가운 밤길을 걸으며 분명히 다시 배웠습니다. (2004. 12. 27.)
* CBS 라디오 에세이(2004. 12. 27. 밤 11:55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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