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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10월발표-전병금 목사



화해와 평화
- 분열과 대결의 현실에 비추어 본 기독교의 가르침

전 병금 목사(강남교회)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모두 평화로운 삶을 살기 원하며, 그것이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전쟁과 폭력이 없는 평화의 세기를 열망하며 시작
된 21세기 첫 해부터 세계는 테러와 전쟁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9. 11 세계 무역센
터에 대한 테러 사건, 이에 대한 보복전쟁 성격이 강한 아프가니스탄 전쟁, 지난 3
월 미국의 부시 대통령에 의해 강행된 이라크 전쟁과 이후의 전쟁 후유증,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지금도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테러와 이에 대한 보복 공격
등은 전 세계를 다시금 갈등과 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다. 지난 20세기에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을 통해 전쟁의 야만성을
처절하게 경험하였으면서도, 여전히 전쟁과 폭력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있
는 것이다.
특별히 한반도는 세계의 유일한 분단 국가로 핵전쟁의 위험이 가장 많이 도사리
고 있는 지역중 하나이다. 만일 한반도에 전쟁이 돌발한다면 그것은 남북한의 공멸
을 초래할 것이며, 한반도는 생명체가 전무한 불모지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민족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의 방식은 화해와 평화를 실현하
는 길이다. 한국 기독교가 우리 민족과 인류에게 봉사하는 최대의 길은 이 땅에 평
화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는 일이며, 이것은 주님이 한국 기독교에게 위탁한 엄숙
한 사명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가 참으로 이 민족과 인류의 평화를 위해 기여하고자 한다면, 먼저
성서와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평화의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어
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정한 평화가 위협 당할수록 거짓 평화 이데올로기가 난무하
였고, 평화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의 평화를 앗아갔기 때문이다. 이 글에
서는 성서가 증언하는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알아보고, 우리 한국 기독교가 우리
민족과 인류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하여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기독교적 평화 이해

평화는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헬라적 개념의 평화(Eirene)와 로마
적 개념의 평화(Pax), 그리고 성서적 개념의 평화(Shalom)가 대표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평화의 개념이 내포하는 의미가 서로 상이하기 때문에, 우리
가 성서적 평화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헬라적 개념의 평화와 로
마적 개념의 평화를 이해하여야 한다.
고대 헬라 세계가 말하는 '평화'는 인간 집단 상호간의 삶의 관계나 행동양식을
지칭하기보다는 하나의 정태적인 상태, 즉 끊임없이 지속되는 전쟁의 상황 속에서
잠시 전쟁이 멈춘 상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종의 내적인 평온과 평안을 의미한
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평화는 국가 간의 전쟁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평화에 관심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내부 또는 민족 내부의 분쟁을 어떻게 조정하
고 평온하게 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고대 희랍세계가 말하는 평
화는 민족 간 내지 국가 간의 전쟁상태의 와중에 맛보는 전쟁 없는 일정기간의 평
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의 도시 국가 상호간의 군사적 갈등과 대결이 중지된
중간기의 평온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로마 제국이 말하는 '평화'는 전쟁을 막기 위한 정치적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
그것을 정치적 구조와 이념적 프로그램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을 말한다. 이러한 지
배 체제의 주체가 로마 제국이기에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평화를 '로마의 평화'라 일컬으며, 로마의 평화는 로마사람들만을 위한 로마사람들만의 평화였
다. 로마의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은 무력이었으며, 모든 사람이 다 함께 평
등하게 누리는 공정한 평화가 아니라, 무력으로 희생과 침묵을 강요당하는 조건 아
래에서만 유지되는 불의한 평화였다. 로마의 평화는 외면적으로는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피지배국에 있어서는 로마제국에 대한 복종을 담보로
한 폭력적 성격을 지닌 평화이다.
이처럼 헬라의 평화개념과 로마의 평화 개념은 자국 중심의 평화 개념이며, 약소
민족과 민중을 억압하는 가운데 누리는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성서에
서 말하는 '평화(샬롬)'는 한 개인 혹은 공동체가 아무런 장애 없이 그 본래적 생
명력을 십분 발휘하는 삶의 존재방식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이다. 샬롬은 단
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소극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개체로서 또는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그의 생명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적극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샬롬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서적 평화 개념
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가. 정의로운 평화

성서가 말하는 평화는 정의가 실현된 상태에서 누리는 평화이다. 불의한 사회구
조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억압과 착취가 있는 곳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팍스 로마나식의 억압과 착취가 동반된 평화는 강요된 침묵에 불과하며
참 평화라 할 수 없다. 이러한 평화의 허구성을 갈파한 성서는 정의와 연관된 평화
만이 진정한 평화라고 선언한다. "정의의 열매가 평화"이며(사 32:17), "정의와 평화
가 입을 맞출 때"(시 85:10) 비로소 온전한 평화(샬롬)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약속한 '하나님의 나라' 역시 '정의와 평화와 기쁨'(롬 14:17)을 그 내용으로 한다.
이처럼 성서는 평화와 정의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데,
그러면 '정의'는 무엇인가? 성서에서 정의는 추상적 도덕 규범이 아니라, 구체적으
로 가난한 자, 약자, 억눌린 자들의 빼앗긴 권리를 회복해 주고 불의한 자가 회개하
고 정의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 역시 소외되고 억
압받는 백성들을 해방하고 정의로운 상태에서 평화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포로된 사람, 억눌린 사람들, 눈 먼 사람들은 개인적 평화를 박탈당하거나 상실
한 사람들이다. 포로된 사람들을 해방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눈 먼 사람
들을 다시 보게 하는 일은 박탈당한 평화를 본인들에게 회복해 주는 해방사건이다.
이러한 일은 마지막 종말의 때에 하나님이 보내실 종이 행하실 일인데, 예수님은
'이 성경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눅4:21)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이러한 일들이 이루기 위함이었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우리의 평화"(엡 2:14)라고 고백하는 기독교의 평화는 어느 한쪽을 부당하
게 희생시켜서 성취되는 평화가 아니라, 양쪽 모두에게 평화가 되는 정의로운 평화
이어야 한다.  

나.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의 사건으로 평화

성서가 증언하는 평화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적대 관계가
화해의 관계로 바뀌는 사건을 뜻한다.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에서 바울은 예수의
사역을 화해의 사역으로 설명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
기 육체로 허무시고.......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  

또한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직을 '화해의 직분'(고전 5:18)이라 했으며, 그 전
하는 내용을 '화해의 말씀'(고후 5:19)이라 하였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인간과 인
간 사이의 화해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에 선행하는 조건임을 강조한다(엡
2:15-16). 예수께서도 역시 형제와의 화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선행한다고 하
였다(마 5:23-24).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평화는 집단과 집단 사이의 대립과 갈등
이 해소된 사회적 차원의 화평한 관계를 뜻한다. 서로 분열하여 갈등하고 대립하는
집단을 하나로 만드는 일은 곧 그 둘을 하나의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며 그
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평화인 것이다.  

다. 자연과 화해하는 평화

성서가 증언하는 평화는 단순히 인간 공동체에만 해당하는 평화가 아니라, 자연
과의 삶, 곧 포괄적인 생명문화로 주어지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화이다. 오늘날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한 자연 파괴현상은 곧 환경의 위기를 초래하며, 이는 공동
체를 파괴하고 인간의 포괄적인 생명문화를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러
한 결과는 곧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은 가치
중립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자연환경을 착취하고 파괴한다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결
코 폭력으로, 즉 반평화로 보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역사를 인간중심으로 파악하는 차원을 넘어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
는 창조신학적으로 파악하여야 한다.

요약하면, 성서가 증언하는 평화는 인간에 대한 억압, 특별히 약자와 약소 민족
에 대한 억압이 없는 정의로운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평화이며, 서로 간의 갈등이
잠복되어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평화가 아니라, 두 집단 간의 갈등이 해
소되어 서로 하나가 되는  평화이며, 인간 공동체의 범위를 뛰어 넘어 전 창조세계
의 피조물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평화라 할 수 있다.        
  
3. 화해와 평화를 위한 한국 기독교의 과제

초기 기독교는 이러한 평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모든 형태의 폭력을 거절하며 평
화를 추구하였다. 즉, 폭력적인 강제 수단의 사용을 언제나 악으로 간주하며, 평화
를 위한 필요악으로서조차도 폭력이나 전쟁을 거절하였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평
화주의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군인들의 잔인한 박해와 황제숭배의 문제 등이 배경에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초대 기
독교인들에게는 이웃에 대한 어떤 형태의 폭력도 배제하는 것이 이웃사랑의 핵심이
었으며, 이웃 사랑의 극치가 원수사랑이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랑과 평
화의 복음이라고 생각했던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는 폭력과 전쟁에 참여하는 일은 용
납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초대 기독교의 평화주의는 소극적으로는 폭력의 집단화
된 형태인 전쟁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살인과 살상을 거절하는 생명
존중 사상을 그 기저에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종교적 박해 앞에서도 일
체의 폭력을 거절하는 철저한 평화주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우리는 초대 기독교의 평화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화해와 평화의 사도들이며,  
분단된 민족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이제 평화에 대한 기독교 가
르침을 상기하면서, 이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샬롬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요청되는 몇 가지 과제를 제안하고자 한다.  

가. 평화공동체로서 교회는 평화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는 그 동안
교회 밖의 사람들을 향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그
동안 교파 주의와 개 교회주의에 매몰되어 교파간, 교회간 대립과 갈등의 양상을
보여왔다. 또한 지연, 학연 등의 연고주의나 파벌주의와 같은 세속적인 이데올로기
에 포로가 되어 적지 않은 대립과 갈등을 보여왔다. 이러한 모습은 기독교가 추구
하는 평화의 개념과는 정반대의 반평화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교회 밖의 세상을 향해 외치는 평화의 메시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먼저 우리
내부의 분열과 비평화적인 모습에 대해 깊이 성찰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서 세상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교회는 교회 안의 갈등과 교파간의 차이와 갈등을 평화적으
로 해결하고자 하는 실천의 의지와 평화적인 해결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것
이다. 즉, 교회가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평화 공동체로서 교회 내에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분열된 여
러 교파간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는 일은 우리 교회의 평화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
는 좋은 시험대라 할 수 있다.

나.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폭력을 반대하여야 한다. 오늘날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혼돈스럽고 도전적인 문제들 중 하나는 폭력의 문제이다. 폭
력은 반드시 또 다른 폭력을 낳기 때문에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용기
가 필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 26:52). 예수 그
리스도는 자기를 체포하러 온 무리들과 맞서 싸우는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미
움과 증오로 말미암는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버리셨다. 예수님은 비폭력의 용
기로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긴 것이다(롬 12:21).
지난 3월 미국은 테러를 방지하고 세계를 위협하는 생화학 무기를 제거하여 폭
력 전쟁을 예방한다는 명분 하에 이라크 전쟁을 통하여 후세인 정권을 축출하였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라크에서 대량 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전쟁과 폭력의 위
협을 완전히 제거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이라크인들의 분노와 복수심을 더 자극하
여 끊임없이 미군에 대한 테러가 자행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현재 미국은 한국 정부에 전투병을 이라크에 추가 파병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상태이다. 아직도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채 테러가 계속되고 있는 이라크에
전투병을 파병한다는 것은 수많은 이라크 민간인과 우리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행위이며, 이 세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
는 이 세상의 평화로운 공존과 인간의 존엄성을 우선 고려하여 이라크에 전투병을
추가로 파병하는 문제를 신중하게 정부에 요청해야 한다.  즉, 한미우호 관계와 국
제 정치의 역학 관계 때문에 정부가 미국의 요청을 무조건 거절할 수 없다는 현실
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과 평화를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가
조화를 이루어 슬기롭게 해결되도록 한국교회는 정부와 대화를 해야 한다.

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갈라진 것을 하나
로 합치시는 하나님(겔 37:15-28)이며, 막힌 담을 허무시는 하나님(엡 2:14-16)이다.
한국 기독교는 남북으로 갈라진 민족을 결합하고 화해시키는데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화해자의 역할을 계속해서 감당해야 한다. 복음은 화해의 능력이며, 이데올
로기를 초월한다. 여전히 우리 남한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남한 내에서 이념적 갈
등을 부추기는 반공 이데올로기는 극복되어야 한다. 상대방의 변화를 조건으로 한
화해의 제안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다를 바가 없다. 진정한 화해는 상대방을 신뢰하
고 그 입장을 이해하는데서 출발한다. 그것은 화해를 제의하는 쪽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한국 기독교는 진정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복음의 능력에 힘입
어 분단된 민족을 화해하는 직분을 감당하여야 한다.  
특별히 한국 기독교는 북한의 핵 문제로 야기된 북미간의 갈등이 평화적으로 해
결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현재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 시나리오를 구상하
고 언제든지 전쟁을 할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이다. 주지하는 대로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핵전쟁으로 확산되어 우리 민족의 공멸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동북아 지역
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형태의 전쟁도
한반도에서 이루어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한민족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이 한
반도에 핵무기를 배치 사용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라. 창조 세계의 보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 인류가 소장하고 있는 핵
무기의 파괴력은 지구상의 전 생명체를 파괴시킬 만큼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핵의 위험은 핵무기뿐만 아니라 핵의 산업적 이용에도 도사리고 있다.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직시하여야 한다. 아무리 핵을 평화적으로
사용하고자 할지라도, 핵은 기계의 고장이나, 인간의 실수, 천재지변, 전쟁 등에 의
하여 이 자연세계를 일순간에 황무지로 변화시키는 가공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
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곧 인류의 파멸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
금까지 인류의 발전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 끊임없이 파괴하고 개발하였던 자연환경
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삶만이 진정한 평화의 길임을 다
시 한번 자각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자연환경을 보호하고 자연환경과 화해를 이루
어 평화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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