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주일 점심시간에,교회 식당방에서 교우들과 점심을 하다가 누군가에게 물을 한 잔 달랬더니,물을 떠다 주시는 집사님이 씨익 웃으시면서, "목사님, 간 참 크시네요." 하는 겁니다.
영문을 몰라 잠시 얼떨떨하다가, 요즘 항간에 '간 큰 사람 시리즈'가 유행한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형광등처럼 한 바탕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요즘도 우리 딸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간 큰 남자"시리즈,"간 큰 상사"시리즈 등을 훔쳐듣게 됩니다.
간(肝). 다른 기관들도 많은데 하필 그 소중한 간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하는 이유는, 아마도 '동양의학'의 사상적 경향 때문일 것 입니다. 서양의학과 달리,우리 동양의학에서는 인체를 소우주 (우주의 축소판)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곧 의학의 '기술'보다 는 '철학'을 좀더 중시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동양의학에서는 우리 신체의 어느 한 부분마다 각 부분이 담당하는 정신적인 어떤 기능이 있다고 보는 현저한 경향이 있는데,그런 생각의 체계 속에서 보통 간이 사람의 배짱을 담당한다고 보는 모양 입니다. 그런 연유로 좀 배짱이 두둑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을 흔히 "간 큰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어쩌다 하나씩 주워듣는 얘기를 통해 잠시 기분을 전환할 수도 있고, 또 '별로 돈 안 드는 여유'를 맛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저는 이런 '떠돌이 이야기'들을 대충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사람들의 의식을 때로는 너무 극명하게 드러내는 이런 이야기들이, 표나지 않게 사람들을 냉소적으로 만들거나, 더이상 무너져서는 안되는 사회윤리의 최저선까지도 무책임하게 허물어대는 치명적인 약점도 있다는 점이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렇지만,사실 뭐 저희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도,정말 할 일없이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참새떼'들은 늘 있었고, 그래서 그 참새들의 입방아로 꽤 오랜 세월동안 떠돌이 시리즈의 제왕자리를 지켜온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참새 시리즈"였지 않습니까?
그 참새시리즈 이후 떠돌이 이야기들의 자세한 계보는 잘 모르지만,여하튼 얼마 전부터 우리 아이들의 입에서 가끔씩 "덩달이","간 큰 아빠","간큰 엄마" 등등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더니,이제는 아예 P.C.통신망에 "간 큰 시어미"시리즈까지 버젓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잠든 며느리 다리를 주물러주지 않는 시어머니', '아들만 따로 불러내 외식하는 시어머니', '외출도 잘 않고 집에서 며느리 잔 신경 쓰이게 하는 시어 머니',
'며느리한테 함부로 명령하는 시어머니', '며느리 집에 반찬 만들어 갖고 가서, 경비실에 맡겨놓지 않고 직접 들고 올라가는 시어머니', '아들 장가보내면서 집안살림하는 법도 가르치지 않은 시어머니', '휴일날 신혼 집에 놀러 가겠다고 통보하는 시어머니', '병든 시아버지 시중 며느리에게 맡겨두고 외국여행 떠나는 시어머니', '임신한 며느리에게 술 담배끊으라고 스트레스 주는 시어머 니', '명절날 손아래 시누이들 밥상 차려주고 제일 나중 밥상에 앉는 며느리에게, 밥 다 먹은 아들 커피 타주라는 시어머니', '아들이 바람피우는 건,내 아들이 잘나서 그렇다고 우기는 시어머니', '나이에 비해 젊고 힘이 넘쳐,며느리보다 더 오래 살 것 같은 시어머니', '며느리한테 함부로 반말하는 시어머니' '……'.
'며느리님' 무서운 줄 모르고 함부로 처신하다가는 자칫 목숨까지도 위험할 수 있다는 은근한 협박이 이 "간 큰"이란 말 속 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을 해학과 풍자로 다룬 이 "간 큰 시어미"시리즈. 더러는 우습기도 하고,더러는 아찔하기도 하고,또 더러는 한심스럽기도 한 오늘 신세대들의 자유분방한 사고의 일단을 정말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따분할 때마다 이처럼 '참새시리즈'니,'덩달이 시리즈'니,'간 큰 사람 시리즈' 등등을 너줄거리며 희희낙락 세월을 보낸다해서 세상이 밝아지는 것은 정말 아닙니다.
슬쩍 슬쩍 값싸게 웃고 지나치는 이 이야기들의 이면에 숨어있는, 온갖 어둡고 의뭉하고 음침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지나치게 감각적이고 찰나적인 생각들…….
오늘 우리들의 세상은 하찮은 농담까지도 어둡습니다. 세상만 어두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루 하루의 삶을 꾸려 가는 우리들의 마음자락도 한없이 어두워져 있음을 부인할 순 없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좌우지간 정상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이 도도한 세속의 어두움. 이 어두움을 밝혀줄 "빛"이 필요합니다. 도처에 죄와 사망의 그림자가 넘실대는 우리들의 사망세계에 정말 진지한 생명의 빛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신약성경 요한복음 8장 12절)
간 큰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이, 어디서 와서 어떻게 유지되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채, 돈과 명예와 세상의 단 재미에 묻혀서 그렁저렁 안일한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간 큰 사람이며, 생명의 빛인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여전히 사망의 어두움에 거닐고 있는 사람, 한사코 은혜의 생명을 거부하고 기어이 사망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 "하나님의 심판"을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정말 간이 엄청나게 큰 사 람입니다. 혹 당신은 두렵게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간 큰 사람임"을 은근히 자랑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광우목사
전주열린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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