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회 '주지목사'님이 어느 분이십니까?" 어떤 불교신자가 시골 어느 교회당에 와서 그 교회 담임목사님을 찾으면서 했다는 말입니다.
"주지목사." 친구 목사님으로부터 정말 배꼽 잡는 이 말을 들으면서 한바탕 신나게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은 누구나 모든 것을 자기 선입견을 따라 생각하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재삼 확인케해주는 이야기였습니다. ……
형도 누나도 없이 경주 이씨 가문의 장손으로 덜렁 태어나서,몇 살 위 고모뻘 되는 분들과 함께 성장해야 했던 저는,눈이 커서 그랬는지 어릴 적 비교적 겁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요즘은 시골에도 번듯한 아파트나 연립주택들이 들어서고,또 입식 주방에 수세식 화장실이 꽤 많아졌지만,제 어린 시절,시골의 살림살이는 그런 것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었습니다.
집집마다 울타리도 거의 없었고,있다해도 그저 싸리나무 가지로 얼기설기 아직아직으로 시늉이나 해 놓은 게 대부분. 인생이 불쌍해 보여 그러는 듯,차마 쓰러지지 못하고 선심 쓰듯 서 있는 초라한 초가집들.
한 뼘 남짓한 앞마당 장독대 옆을 지나 몇 발짝(어린 저에게는 꽤 먼 거리였습니다)을 가면 두엄자리가 나오고,그 두엄자리 뒤켠,심란하게 너덜거리는 거적때기를 들치고 들어서면 판자 두 쪽에 제멋대로 대못을 박아 만든 화장실 발판이 있었지요.
아슬하게 삐딱한 발판 사이로 아래를 보면,무섭게 시커먼 오물 구덩이가 있고,무슨 소망이 있다고 으레 거기엔 구더기들이 득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린 저에게는 이 화장실은 그 분위기만으로도 한낮에도 늘 역겹고 공포스런 곳이었습니다.
어느 집이나 그렇듯,그토록 그럭저럭 생존이나 하면 감지덕지 여길 만큼 째지게 가난하던 시절,얼기설기 바느질한 무명이불을 둘러쓰고 고모들이랑 잠자리에 들면 늘 깨소금인 듯 "옛날얘기"가 나왔습니다.
요즘사람들 TV 미니시리즈에 미치듯,어린 저희는 밤마다 그 밑도 끝도 없이 어설프고 조잡한 스토리의 옛날얘기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생각해보면,어린 소견으로도 이야기의 중간쯤이면 벌써 "주인공인 우리 편"이 틀림없이 이기리라는 것을 아예 짐작할 수 있을 만큼의 속 빤히 보이는 얘기들이 뭐가 그리 미치게 좋았는지 모릅니다.
저희가 어려서 그랬는지,시대가 어수룩해서 그랬는지 잘 모르지만,여하튼 그 무렵 애나 어른이나 모여 앉았다하면 그저 그렇고 그런 옛날얘기 자루 쏟아 붓느라 때론 호롱불에 눈썹 타 들어가는 줄 모르고 밤이 깊곤했습니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재미있는 옛날얘기,언젠가는 우리 아이들을 실컷 웃겨주고 싶은 이야기가 몇 있지만 ,그 수많은 밤을 지새며 지칠 줄 모르고 들었던 그 얘기들의 대부분은 정말 아쉽게도 두루뭉실한 추억의 엉킨 실타래로만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무렵 즐겨듣던 이야기들은 거의가 '도깨비 이야기' 아니면 '귀신 얘기'였습니다. 서양사람들 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이나 도깨비들은 퍽 온순하고 심성도 착한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데,제 어린 시절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귀신이나 도깨비들은 한결같이 칙칙하고 으스스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불 속에 잔뜩 웅크리고 숨죽이며 이야기를 듣노라면 느닷없이 고모들이 마치 귀신인 양 손톱을 세워 할퀴는 몸짓으로 놀래키곤 했고,정말 너무 놀라서 바지에 쨀끔 그만 오줌을 저리기도 했지요.
'어디 갔다 오는 길에 공동묘지 옆을 지나는데 뒤에서 달걀귀신이 달걀 달걀 하면서 졸졸 쫓아왔다'는 둥,'술 먹고 오는 길에 어떤 사람과 밤새 씨름을 하다가 겨우 왼쪽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더니,쓰러진 뒤에 보니까 타다만 몽당빗자루였다'느니,
'그믐밤에 뒷간에 가서 볼일을 보고 뒤를 닦으려하니 갑자기 밑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빨간 손이 나와서 뒤를 닦아주었다'느니,'
도깨비를 만나면 어쨌든 왼쪽 다리를 걷어야지 그렇잖고 도깨비에게 당하면 큰일난다'는 등등의 머리끝 쭈뼛거리는 이야기들이 저녁마다 쏟아졌습니다.
어른들도 서늘할 이 이야기들이 '어린 새가슴'에겐 어쨌겠습니까? 그래서 행여라도 밤에 뒷간에 갈 일이 생길까봐 저녁에는 아예 물도 안 먹고,새벽녘엔 마려워오는 오줌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다가 그만 이불에 실례를 하고…….
이불에 오줌눈 날 아침이면 으레 키를 둘러쓰고 이 집 저 집을 돌며 장난기 어린 부지깽이로 흠씬 두들겨 맞으며 정신없이 물벼락을 맞곤 했습니다.
여하튼,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 어린 가슴을 한껏 옥죄게 했던 이 '귀신 얘기','도깨비 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하나님의 이미지가 언제나,노발대발하는 산신령이나,무서운 도깨비나,으스스한 귀신의 흉악한 모습과 겹쳐왔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여호와(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구약 시편 34편 8절)
불교도가 담임목사를 "주지목사"로 쉽게 생각하듯,기독교의 하나님은 무시무시한 폭군이요 제멋대로 사람을 파리잡듯하는 살인귀의 앞잡이 정도로 느껴질 때가 솔직히 많았었습니다.
그러나,"사람"을 가장 고귀한 피조물로 만드시고,만물을 다스릴 권한을 가진 '대리왕'으로 세우시고,비록 범죄 했을지라도,당신의 아들의 목숨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그 죄를 용서하시고 끝없는 사랑으로 대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한결같은 선하심,
그 분께 피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누릴 수 있도록,당신 마음 속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그 음산한 귀신과 도깨비의 추한 선입견들을 훌훌 털어버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광우목사
전주열린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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