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시절,도덕시간에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에 대해 배웠습니다. 다행히 자상하신 아버님 덕분에 일찍부터 한자(漢字)를 공부할 수 있었던 저는,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주장이며,성선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이라는 주장임을 얼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성악설의, '인간의 좋은 행위는 교육이나 학문,수양 등의 후천적인 작위(作爲)에 의해 생긴다'는 주장이나,성선설의, '인간의 나쁜 행위는 물욕에서 생겨난 후천적인 것'이라는 등의 좀 더 깊은 내용은 전혀 알지도 못했습니다.
어설픈 한자 실력으로 두 설의 초보적인 의미만 겨우 짐작하고 있었던 저는,가끔씩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荀子)를 의아해 했습니다. '세상에 그토록 순한 이름(順子로 생각했음)을 가진 사람이 왜 굳이 성악설을 주장해서 이름값을 못했을까' 돌이켜보면 참 어이없는 생각이지만,한 때는 퍽 골똘했습니다.
물론 선생님께서 '순자'의 이름을 한자로 써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소박한 오해입니다. 여하튼 여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그런 의문을 간직하고도 이 문제만 나오면 시험답안만은 언제나 따르르하게 잘 써내곤 했습니다.
이 어린 소년이 이제 40대 중년으로 성장하는 사이,시대가 급하게 변했어도 우리네 삶의 기본적인 틀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수고하며 일을 하고,열심히 벌어서 하루 세 끼 밥을 먹으며,여전히 하루에 한 번씩 화장실을 드나들며 살아갑니다.
바쁜 일상 때문에 언제 날잡아서 골똘히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아니면 악한가? 선하다면 그 근거는 무엇이며,악하다면 그 이유는 또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여전히 우리 앞에 심각한 토론의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가끔씩,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일과 후 꾸역꾸역 모여 드는 선술집 뒷골목으로 밤늦게 이런 초보 인생론이 퉁겨져 나오기도 합니다.
"에잇,이놈으 세상,싸가아지없는 인간들,다 뒈져 버려야 혀. 으으으 이 썩을 놈으 세상 말세여 마알세. 꺼억 푸우우……."
우리들의 삶과 우리들의 본성에 대한 이 술내음 확 풍기는 자조 섞인 푸념이 어떻게 들리시는지요? 거기에 동의하여 그 취객 과 어깨동무하고 같이 한 잔 하시고 싶으신지,아니면 그 녀석 정신 퍼떡 들게 머리에다 찬물이나 한 바께스 퍼부어주고 싶으신 지요?
어떤 생각을 하시든 자유지만,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 근원적인 물음,그리고 거기에 대한 답변은,개인이나 역사의 본질을 정리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나 여호와(하나님)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구약성경 예레미야 17장 9-10절)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말씀입니다.
순자의 성악설이 옳다는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어찌됐건 맹자의 성선설보다는 순자의 성악설이 성경말씀에 좀더 근접해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하튼,오늘 우리로 하여금 구역질나게 하는 추악한 것들이 세상에 참 많은 건 부인 못할 사실입니다.
금년 여름, 제가 사는 아파트에 좀 문제가 있어서 여름 몇 날 동안 쓰레기가 방치돼 있었는데,얼마나 악취가 진동하는지,그 훅훅한 찜통 더위에 며칠간 문을 꽉꽉 닫아걸고 숨가쁘게 지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인간의 부패한 마음에서 솟구치는 악취에 비하면,쓰레기더미의 썩은 냄새는 오히려 향기로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자녀를 낳아 길러보신 분들은,어린 아이들의 순박함을 잘 아실 것입니다. 뽀얀 살갗,흠 하나 없이 해맑은 눈동자,방글거리는 웃음…….
이런 아이들이 세상모르고 쌔근 쌕쌔근 쌔근거리며 잠자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평화로워져 옴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 역시 마음 씀씀이를 보면 그 속에 악독한 것이 있음을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제 딸들이 아주 어렸을 때였습니다. 방에 누군가가 낙서를 했습니다. 그 높이로 보아 누군지 짐작이 갔습니다. 아이들을 죄 모아놓고,짐짓 화난 얼굴로 누가 그랬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혐의(?)가 있는 그 아이가 즉시 제 언니를 가리켰습니다.
대충 잘 타이른 다음 그냥 넘어갔는데,며칠 뒤 비슷한 낙서가 벽에 또 생겼습니다. 아이들을 모으고,이제는 제가 잔재주를 좀 피웠습니다.
"우와,참 멋진 그림이네,이거 누가 그렸을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아직 말도 잘 못하는 아이는 고사리 손으로 자기 가슴을 마구 두드리며 그 작품(?)이 자기 거라는 몸짓을 열심히 했습니다.
아이의 눈부신 재치에 온 가족이 다 웃지 않을 수 없었지만,그 날,마음 한편으로 얼마나 슬프고 아찔했는지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은 천사라고요? 천만에요,성경은 "어른의 마음만 심히 부패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악은 이처럼 그 순진해 보이는 우리네 사랑스런 아이들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이미 침투해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풍파에 닳고닳은 어른들이 우글거리는 이 세상에,날이 날마다 역겨운 일들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네 마음에 은밀히 침투해 있는 죄악의 그 처참한 깊이를 아시는지요? 그 심각한 죄악의 늪을 과연 언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광우목사
전주열린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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