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세가지 정도라고 한다.
첫째는 뜻을 두고 다 이루지 못하는 늙음이며,
둘째는 젊음을 즐기지 못하고 늙는 늙음의 서러움,
셋째는 죽음에의 공포라고 한다.
실은 늙음이나 늙은이가 되는 것 자체가 두렵다기 보다는 늙어감에 따라 일어나는 불유쾌한 특징들이 두려운게 사실이다.
자기번민이나, 불평, 쓸모 없어지는 것. 유치한 관심, 과거의 집착,등이 나를 오싹하게 만든다. 이른바 노추가 두렵다. 늙음이란 아주 젊을 때부터 시작해서 각 기관과 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예외는 없다. 젊음과 함께 있던 늙음인 것이다. 그것을 이겨보려고 안간힘을 써 보지만 헛수고이다.
15-6세기에 유럽에서 젊은 육체를 숭상할 때 '청춘의 샘'에 들어가면 노인도 젊은이로 재생된다던 것도 몽상일 뿐이다.
선조 때 한음 이덕형이 당시 예조판서인 이호민을 찾아갔더니 "자! 이놈을 사형에 처한다" 하면서 거울을 보고 족집개로 흰 머리칼을 뽑고 있었단다.
"나이도 많고 큰 벼슬도 한 어른이 무에 아쉬워 흰 머리칼을 뽑고 그러시오?" 물었다. 이호민은 껄껄 웃으면서 "殺人者死라 하지 않았소? 용서할 수 없죠! 이 백발이란 놈은 말입니다. 그동안 사람을 얼마나 많이 죽였소? 내가 부득불 사형에 처할 수 밖에요" 라고 했다.
이덕형도 웃으며 "그렇지요 백발을 이긴 장수가 없지요! 백발은 사형받아 마땅하지요!" 했다고 한다. 피할 수 없는 늙음이다. 하지만 늙어간다고 분노할 필요는 없다. 꽃잎이 떨어진다고 장미포기는 울부짖지 않는 법이다.
늙음은 필요 이상으로 신속히 닥아오지만.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이 늙음이요 죽음이다. 늙음은 아기로 태어날 때 이미 상속 받아서, 그 동안 잊고 살다가 흰눈이 머리에 내려 앉으면 그제야 늙음을 느끼게 된다.
기왕지사 늙음이라면 늙음의 환희는 없는 것일까? 베이컨(Bacom)은 '고목은 불때기에 좋고, 오래묵은 술이 마시기에 좋고, 오랜 친구는 믿을 수 있고, 노련한 작가는 읽을만 하다고 말했다. 단순히 오래되고 낡아진 것이 좋다는 말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시련과 곤고에서 이겨나서 숙달되고 노련해진 것이 아름답다는 말일 것이다.
늙으면 사상은 더욱 명석해지고, 뿌린씨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보는 시기이다. 태양이 서산에 기울어지면 찬란한 밤, 빛의 나라로 초청되어 영광을 보게된다.
청년시절에 고학을 하고, 중년시절엔 고투하고, 노년시절에 감사의 수확을 즐길 수 있다고 했던가? '神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최선의 것을 최후에 주신다'고 內村 鑑三도 말했다. 예술의 천재는 있어도 인생의 천재는 없는 법이란 말이 기억난다.
고향, 선산 어머니 무덤가에 느티나무 고목이 있다. 구부러진 가지마다 비바람에 휘갈김을 견디어 내고 찬 서리에 굵어진 가지들이 울퉁불퉁한 가죽과 같은 껍데기로 씌워지고 거칠고 딱딱한 피부를 드러내고 있다.
괴로움과 슬픔의 정이 솟구쳐 나와 말라붙은 흔적이나 험루가 아닐까? 늙은 나무를 하늘 높이 쳐다보며 걸어온 길을 더듬어 본 적이 있다.
늙으면서 성숙해지는 도리는 없을까? 늙음을 즐기면서 살 수는 없을까?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늙음의 증상과 함께 찾아오는 병이 하나 있다. 고향병이다. 특히나 명절이 되면 고향병이 도지고 깊어만 간다.
언젠가 아이들과 고향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들을 적어 두었던 것을 읽어보며 내 돌아갈 고향집을 생각해본다. 늙음의 선물로 고요히 닥아오는 그리운 고향집이다.
"네 고향이 어디니?"아이들에게 물어본다. 큰 아이는 "기독병원요!" 작은 아이는 "일신병원요!" 라고 대답한다. 태어난 자리가 고향인가? 그럼 어머니 자궁이 고향인게다.
다시 물어본다. "병원이 그럼 너희들의 고향이로구나!" 그건 아니지! 큰 애는 말한다. "인천이 내 고향이죠" 작은 아이는 말한다. "그럼 난 부산이네?" 자기들의 철 없던 어린시절, 추억들을 간직한 곳이 고향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철나자 노망이라는걸? 추억을 간직한 곳이야 비밀한 가슴속이지! 그렇가면 내 가슴이 내 고향인가? 깊은 물 슬프게 흐르는 견고한 고독의 껍질 내 마음속! 이 고향이련가?
그럼 너희들은 고향에 갈 것 없구나. 인천사니 예가 고향이고 부산가면 게가 고향이고 "가만! 그럼 진주가 우리 고향인가요?" 어리둥절 하면서 아비 고향집을 자기들의 고향인가 물어왔다.
거기 가면 아버지의 아버지가 계시고, 그 아버지의 낯선 아버지 산소가 있고, 태고적 먼지를 소중히 뒤집어 쓴 채 고요로 물든, 아버지가 아버지를 열심히 설명하시던 곳, 거기가 고향인가? "아버지 진주가 고향인가요?"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다. 그렇다고 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할려니,고향은 무덤인 줄 알테고, 아니라 할려니 자기 고향이기 때문이다. 우리 고향은 어쩌면 무덤인지도 모른다.
그리운 사람들이 잠든 곳, 허물많던 우리들이 부서지는 곳, 언제고 새 사람될 희망을 심어주던 곳, 그리고 호리라도 갚지 않고는 그 높으신 어른을 뵈올 수 없는 곳, 마침내 땅에 묻쳐야 새 옷을 입게 되는곳, 티끌로 돌아갈 때만 새로 빚어지는 곳, 언제라도 혼자임을 배워야 당도하는 곳, 그곳이 고향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처럼 그리움을 가득 채워야 만나는 곳, 거기가 고향인지도 몰라!
잘 늙어야만 깨달아지는 곳, 거기가 고향인지도 몰라!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