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신문을 보니 대학입시날의 광경을 스포츠 중계방송 하드시 옮겨놓고 "지금 이 장면이 어떤 광경일까요?"라고 외국인에게 질문을 한다면 전쟁이 나서 비상보도를 하는 사태가 아닌가? 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한다. 나라 전체가 계엄령하에 들어간 것과 방불하다. 이게 바로 대학입시날의 광경임을 알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교육열은 누구도 못말리고 과열로 인해 범죄도 마다치 않으니 우리가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는건지? 망치고 있는건지 다시 진단해 볼 일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들의 입시때 적어 놓았던 일기를 들춰보며 지금 입시로 초조할 엄마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에 글을 올린다.
하나님의 드라마는 시작된겁니다.
전화가 따르릉 왔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상한 남자들 음성이 들리더니 전화속은 소음속에 힘없는 작은 목소리로 "엄마! 나. 여기 병원!" 순간 앞이 아득해졌다.
"엄마 오른발은 안 다쳤어요. 피아노 페달은 밟을 수 있어서 다행이예요." 나중에서야 그 말이 입시에는 최소한 지장이 없다는 이야긴줄로 알아 들었다. 체육선생님이란 분이 잠깐 상황설명을 들려주었다.
고3은 거의 운동장 수업을 할 수 없던 입시 막바지 1개월을 남겨놓은 시점인데 그만,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한번만 뛰자고 간청하는 바람에 동의하고 말았단다. 전날 비가 온 운동장이 겉보기와는 달리 몹시 미끄러웠고 내 아들이 미끄러졌다고 한다. 병원에서 엑스레이 결과를 기다리면서 통보하는 중이라고 했다. 달려가서 확인한 결과 발목뼈가 부러져서 장기입원을 요하게 되었다.
성악시험을 치를 아들에게는 목발을 짚으면 몸의 균형을 잃게되어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없다고 성악 지도교사의 염려가 보통이 아니다. 어쩌면 이 사고가 입시실패의 결정적인 원인이 될 수 있으니 각오하라고 했다. 게다가 장기입원을 하기에는 입시 날짜가 겨우 30일정도 빠듯하다.
2인 병실에서는 공부를 해낸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여 남편 친구에게 부탁하여 1인 특실로 병원을 이동했다. 부기가 빠지면 깁스를 하고 출석시킬 마음을 먹고 있었으나 며칠이 가도 부은것이 빠지지를 않아 깁스조차 못한 채 공중에 다리 한짝을 높이 매달아 놓고 누운 아들을 보는 심경이란 말이 아니었다.
학년초 첫 담임교사 진학면담에 갔다가 망신을 당한 생각이 아직도 선명하다. **대 성악과를 보낼 생각이라고 했더니, 첫 말이 "아이구! 또 하나 떨어졌군!" 비웃드시 말했다. 얼마나 불쾌하던지... 이 학교 역사상 예능계에 진학한 사람이 없거니와 **대는 원서도 제출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뇌까리드시... "실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말했다.
입시경쟁이 치열하자 입시전략상 담임교사로 뽑힌 이 선생은 진학지도 베테란이라는 것이다. 입시생들과 학부형들은 이선생에게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상처도 많이 입었으리라 생각했다. 그간 배치고사도 보던중인데 이처럼 한심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간 50%의 가망성이 있었다면 이제 그 희망은 25%로 줄었다는 말이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들녀석의 심적인 상태이다. "엄마! 이제 하나님의 드라마가 시작된겁니다.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반드시 합격 합니다." 라고 말했다.
'저 아이가 앞 뒤 몰라 미련을 떠는건가? 아니면 자기최면에 걸린것일까? 저것이 저 아이의 믿음인가?' 내가 이럴 때 어미로서 어찌 대해주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남편에게 감동하면서 나도 열심히 돕기로 했다.
남편은 교육방송국에 찾아가 입시에 필요한 비디오를 다 사왔다. 병원에 TV를 가져다 놓고 누워서 암기과목을 공부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5분만 공부하면 잠오는 주사를 맞은 까닭에 졸고 있으니 막을 재간이 없다. 평소에도 집중을 잘 못하는 산만한 녀석이 꼼짝 못하고 독방에 발이 묶여있으니 먹고 자고 공부하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이 없게 되어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심심하면 공부나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되고 말았다.
여러날 지나고 부기가 빠지자 깁스를 하고 학교에서 3차 배치고사를 치렀다. 성적이 갑자기 올라갔다. 선생님은 커닝을 했다고 오해를 했다. 또 다시 1주일 후에 4차 배치고사에 상상하기 힘든 성적이 나왔다. 지난번 성적이 커닝결과가 아님이 증명된 셈이다.
이유가 있었다. 거의 암기과목을 공부하지 않고 놀러만 다닌 아들에게 그나마 입원해서 심심한 시간에 꼼짝못하고 공부한 까닭에 성적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암기과목 성적이 바닥에 있던 아이에게 한개 맞으면 그것이 다 성적에 반영 되는 형편인 것이다. 목발을 짚고 조금씩 걷게되자 병원 원장 사택에서 피아노 연습을 허락해 주었다.
역사적인 시험날짜가 되었다. 예비소집에 가서 여기저기 학교를 돌아 보는데 비지땀을 철철 흘렸다. 긴장한데다 건강이 도저히 가망이 보이지를 않는다.
그동안 서울까지 5시간(성악지도 받을 시간에 갈려면 러시에 걸림)이상 운전하고 가서 배고프면 노래 못할까봐 밥 사먹이고 40분 성악레슨을 받고 돌아서는 기분이란 꼭 미친 짓을 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배워서 무엇을 하자는건가? 광대끼가 있어서 소릿군이 되면 되었지, 이렇게 힘든게 성악입시생의 엄마가 해야하는 일인가? 이런걸 치맛바람이라고 하질 않던가?
하지만, 아들은 단 한번도 자기가 성악의 길을 선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는 눈치일 뿐 아니라, 입시에 실패한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실패했을 경우의 허탈감과 뒷일을 어미된 나로서는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시험 직전까지 와들와들 떨다가도 자신의 차례가 되면 신비하게도 안정이 되어 최선의 결과를 얻게 되었던 기억이라든지, 완벽할 정도로 준비한 시창시험에서 가장 적절히 실력을 평가받을 곡이 선택된 점이라던지, 장애자 취급을 받아 특별대우로 입시장까지 승용차로 들어간 것이라던지, 피아노를 수준높게 잘 친 것이라던지...아무튼 8번째 아이를 학교에 모시고 가던 날이 바로 입학이 허락되었다 망내 딸 시집보내느니 에미가 대신 시집간다더니...
훗날 합격자 소집일에 목발을 짚고 아들 녀석이 나타나자 합격한 친구들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우리는 떨어져도 그 목발멘(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은 합격했으면 좋겠다'고들 입을 모았다고했다.
입시를 한달 남기고 발목이 부러진 것은 하나님의 드라마였다. 그대로 두었다간 당구, 탁구, 볼링, 친구, 도대체 이 녀석이 그 따분한 책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절대 시간량이 모자란다. 다리목쟁이를 분질러 놓아야 책 앞에 앉을 아이니 말이다. 얼마나 급하셨던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하나님의 긴급처방을 아들녀석이 눈치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드라마는 시작된겁니다. 저는 반드시 합격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맞는겁니다." 라고 말했던 아들은 피나는 노력을 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과 싸워냈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아들의 믿음이 놀라웠다.
내 아들이 내 소유인줄 알았는데 그는 하나님의 소유였다. 나보다 더 급하셨던 하나님의 속셈을 우리가 알게 되었으니까...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위임받은 청지기라고 했던가? 물질도 생명도 자식도 모두 잠시 세상에 사는 동안 위임받은 청지기!
(아들은 서울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현재 해병대 사령부에 성악병입니다.)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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