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딸 부잣집이다. 모두 여덟명인데 아들은 없다. 그중에 내가 장녀다.
나 하나만 전실소생이다. 내 바로 아래 동생과는 14살 차이가 난다.
아버지는 낙천적 운명론자였다고나 할까? 유산시키는 것은 살인행위로 간주하셨고, 생긴 아이는 반드시 살 권리가 있다고 믿으셨다. 어머니는 내심 장남인 아버지에게 아들을 낳아 가문을 이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졌다. 2년마다 임신되면 아들 낳을 기회로 생각하고 오히려 감사하며 꿈을 갖으셨다.
그리고보면, 어머니는 적어도 15년정도 배부르셨고, 그 아이들이 사람 구실을 하도록 키우느라 보낸 세월이 길어서 평생이 되셨다. 자녀를 위한 생애가 곧 어머니의 생애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요즘 딩크족들은 마치 야만인처럼 생각할 것 같다. 자기 인생은 어디 있느냐고... ! 어머니는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출산을 마감하셨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말을 하신 적이 없다. 언제나 '신이 점지해 주신대로'라고 말씀하셨고, 내 귀여운 딸, 남의 집 열아들과 바꾸래도 못바꾼다고 큰소리치시며, 딸 자랑을 하셨다. 우리는 자라는 동안 딸이라는 것으로 서러움을 받아본 적은 없다.
아침에 출근하시는 아버지는 마치 황제같다. 딸들이 달라붙어 머리 빗 겨드리고, 구두 닦아드리고, 손가방 드리고, 대문 열어드리고, 옷 만져드리고, 사열을 받으시면서 대문을 자신만만하게 나가셨다.
어머니가 죄책감을 가지고 사시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종종 시장갈 때 부끄럽다는 말씀을 들은 적은 있다. 딸 부잣집 마님이셔서 출산 후 인사받기 어려우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자수성가 하신 보통 사람이셨는데 가난한 중에도 자녀들을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 하셨다, 딸 여덟을 모두 4년제 대학을 가르치셨다. 딸자식 시집 보내 버릴걸 고등학교나 가르치면 그만이지 무슨 대학을 보내는가 흉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주장은 뚜렸했다. 딸 자식을 잘 가르쳐야 한다고, 남의 집에 가서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고... 딸들이 중요하고 아들보다 더 가르쳐야 한다고 ... 그리고 귀가 닳토록 남의 가문에 들어가서 가문을 망하게 하는 여자가 있고, 가문을 번창시키는 여자가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딸들을 모두 남의 집에 보낸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딸을 키웠고 잘 키워 논 남의 아들들을 모두 데려온다고 말씀하셨다. 사위는 울타리라 했으니 '나는 울타리가 든든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집에 아들 선호사상이 없었을까? 아무리 부인할래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은 분명히 아들 낳을려다 딸을 여덟이나 낳은 것이 아니냐고 누구나 묻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들의 시각이 어떠하든 우리 아버지는 생기는대로 다 낳으셨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삶의 철학을 수용하셨다.
아들이 아니라고 차별대우 하신 경험이 우리에겐 없고, 아들 낳을려다 실수로 딸을 낳았다거나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지금 여덟째 막내가 대학원 재학중이고 일곱명의 딸들이 모두 출가해서 자녀를 낳았는데 신기하게도 아들들을 많이 낳았다. 세대별로 해걸이를 한 모양이다.
딸 낳는 것이 경사나 되는 양, 딸 낳기를 우리 형제들은 소원하는 판국이 되어 버렸다. 나의 며느리가 임신 5개월일 때다 첫 번 산부인과에 검진을 갔다. 검진 후 첫마디가 "임신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라고 묻더란다. 내 며느리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 하자 "낳으실껀 가요?" 그러더란다. 너무나 기분이 얹찮아서 "그럼요?" 라고 간단히 답했지만 시절이 험하다는 것을 실감했단다. 원치 않는 임신이라서 유산을 시키는 일이 공공연한 세상인지라 그렇게 질문을 했을 것이라고,..
그래도 내가 아이를 가질 때는 "임신입니다, 축하합니다!" 이렇게 말했었는데... 한강에 미혼모들이 버리는 생명들이 있다는데.... 정말 생명경외사상이 땅에 떨어진 이 시대에 신이 주시는대로 낳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삶의 철학은 고매하신 깊이가 있다고 본다.
이제는 '자녀를 원하는가?'라는 항목이 선택사항이 되고 말았다. 결혼하면 당연히 자녀를 갖게 되어 있다거나, 섭리에 맡길 뿐 이라는 구세대적인 발상은 이해되지 않는 시절이다.
요즘은 초음파 사진을 찍어서 태아앨범을 만들어 준다. 왜 엄마의 뱃 속에 감추어 그 형질을 이룰 아기들을 무자비하게 폭로해야 하는건가? 단순한 어른들의 호기심으로 아늑한 숨어있을 권리를 누리지 못할 아가들에게 미안하지 않은가? 앨범 필요없다고! 산모와 태아의 건강을 진단하는 목적 이외에 앨범을 만들기 위한 촬영은 거부했다. 초음파검사를 통해 딸인 것이 판명되어 졸지에 살인 당한 생명이 아주 많다고 들었다.
우리 부모님께서 아들 선호사상을 가지고 계셨더라면, 나야 장녀이므로 세상에 가까스로 태어날 수 있었겠지만, 일곱명의 내동생들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랑스런 내 동생의 남편들(현재 일곱명)을 만나보지도 못했을 것이고, 이쁘고 귀여운 조카(현재 11 명)들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아버지는 성차별이 대단하고 아들 선호사상이 만연한 시대에 사셨지만, 많은 자식을 생기는 대로 낳았을 망정, 위대한 정신적 유산을 우리에게 심어주셨다. 우리 여덟명의 여형제들은 한 사람도 아들 선호사상이나 남존여비 성차별에 대해 과격하지도 소극적이지도 않은 편이다.
그저 사람을 사랑하며 가문에 성실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건강한 생활인들이라고 생각한다. 여성회복이 아니라 인간회복을 위해 바르게 살고 성실하게 살고자 애쓰는 건전한 시민들이다.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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