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목회에 잊을 수 없는 두 할머니가 계시다. 두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적어둔 것이 있어 읽다가 여기에 옮겨보기로 마음먹었다.
고씨 할머니!
고씨 할머니는 딸만 둘이다. 남편과 단둘이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처음 만날을 때 그 외로운 눈빛을 잊을 길이 없다. 한 손가락이 잘라진 할머니는 덥썩 내 손을 잡고 흔들면서 반가워 하실 때 섬짓 그 손가락에 신경이 쓰였으나 곧 아무렇지도 않았다.
덩달아 잡고 흔들다보면 가슴까지 통하는 전률이 남는다. 할머니는 며칠전 정월 초하루 오후 5시경 운명하셨다. 임종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큰 딸 내외는 거듭 강조했다. 은행이 휴무라서 장례음식을 할 돈이 없다는 것과 모든 가게가 폐문해서 먹을거리를 살 수가 없어 걱정이라는 이야기였다.
어쩜 할머니는 그런 날을 잡아서 돌아가신지도 모를 일이다. 어렵게 사는 딸에게 얹혀 살던 34개월, 사위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아무도 왕래하기 힘든 명절에 그렇게 조용히 눈을 감으신가 보다.
명절지나고 돌아가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데, 내 마음엔 마지막 가시는 날까지 예정에 두고 소원하셨던 것만 같다.
언젠가 할머니 집에 들린 적이 있다. 할아버지는 가을햇살이 따가운 한나절 마누끝에 혼자 계셨다. 할머니는 어디 가셨는지 물었더니 방앗간에 고추씨를 따러 가셨다고 한다. 한달 3만원 돈을 벌기 위해서 ...할아버지 점심을 이불 밑에 묻어 놓고...... 혼자 까맣게 한나절을 기다리게 하고 일 나가신 것이다.
그 가을 추수감사절 헌금을 마련하기 위해 할머니는 고추씨를 따러 매일 나가셨다. 오누이처럼 내외분은 정다웠다. 할아버지는 한글을 아시고 찬송을 모르신다. 할머니는 찬송가 곡조를 잘 아시는데 한글을 모르신다. 할아버지가 잽싸게 찬송가 가사를 읽어드리면, 할머니가 받아서 곡조를 붙여 둘이는 기차게 찬송가를 불렀다. 얼마나 눈물 겹도록 아름다운지 잊을 수가 없다.
그 해 겨울 할아버지가 낙상하셔서 꼼짝을 못하셨다. 여러달 고생하실 때 할머니는 눈물로 기도하셨다. 우리 영감님 회복되어 교회 뜰을 밟아보게 해달라고... 할아버지는 마침내 회복하셔서...할머니의 소원이 풀렸다. 할머니의 기뻐하던 웃음이 눈에 선하다.
그 후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혼자 딸 집에서 외로운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늘 아프단 말 대신에..."늙어서 그런걸 뭘...바쁜 사람들이 뭐 하러 찾아 와, 내 걱정은 말고 일 열심히 해여" 하시며 심방도 오지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심방을 마치고 떠나올 때는 손을 으스러지게 잡고 놓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가셨다. 그리도 외롭고 초라한 삶을 깔끔하게 사시더니 돌아간 자취마져 깨끗하게 조용히 삶을 접으셨다. 이 분요한 세상을 떠나 더 이상은 외로움이 없는 할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팥죽을 쑤시는 임할머니!
올해도 어김없이 동짓날 임할머니가 끓여오는 팥죽을 먹게될 것이다. 할머니는 85세나 되셨다. 움막같은 집에 혼자 사신다. 동에서 무의탁 노인이라고 생활비를 도와주는 걸로 안다. 우리도 매달 조금 할머니에게 생활비를 드려온지 10여년이다.
할머니는 깨끗하고 부지런하시며 말씀은 적은데 웃음은 헤푸시다. 주름 깊은 얼굴은 고상하고 아름다우시다. 철로변 버려진 땅에 곡식과 야채도 심고 돌보면서 소일하시고, 다 쓰러져가는 움막집은 얼마나 깨끗한지 노인냄새조차 나질 않는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사람 사는 운기를 맛 보실 수 없다는 것 하나! 팥죽을 쑤시려고 1년 팥농사를 지으신다. 철로변 좁은 밭에 삼백 예순 닷새 종종걸음을 치시며 행복하기 이를데 없으시다.
특별히 팥죽을 쑤시는 날이면 목욕하시고 정성스레 간을 맞추어 집에서 가장 깨끗한 냄비에 팥죽을 담아 보자기에 싸고 또 싸고 식을세라 마음을 써서 90도로 꼬부라진 허리로 손수 들고 오신다.
팥죽을 놓고 가실땐 부끄러워서 달아나드시 사라지신다. 팥죽을 먹을 때마다 우리는 이 팥죽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아이들에게 잊지않고 설명해 준다. 우리 내외는 간이 딱 맞는 죽도 구수하지만 그 속에 빼곡히 들어찬 새알심을 존득존득 꿀꺽! 삼키노라면 목구멍마져 행복하다.
생각을 해보았다. 이렇게 맛있는 팥죽을 먹는 우리 보다 임할머니가 더 행복하실꺼라고! 이 팥죽 한 그릇을 만들려고 봄부터 1년내내 할머니는 설레이는 날들을 보내셨을 것이라고...!
'내가 죽으면 이 일을 할 수 없을테지, 살아있는 동안에 팥죽을 쑤어드 릴꺼야' 할머니는 섬기는 기쁨과, 주는 감격을 누리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섬기는 일을 때로 굴욕이라고 생각하거나, 섬김을 받 을 때 행복하다는 착각에 세뇌되어 살고 있지만 누군가 사랑으로 섬길 대상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 가 수지맞는 일일게다.
그 대상이 가난한자던, 불쌍한자던, 상관이 없다. 섬겨야할 대상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더 많이 행복할 기회를 얻는 셈이다.
얼마전만 해도 설날이면 은사께 세배드리러 아이들을 준비시켜 데리고 나서면서 행복하고 설레였다. '아이들 많이 컸구나, 잘 키웠다" 칭찬해주시던 은사들, 그리고 고향 어르신들, 부모님! 그런데 이제는 유명을 달리하시고...세배드리려 갈 곳이 없어졌다.
명절이면 내외는 서글프기까지하다. 존경하고 섬길이가 없어지는 것만 탄식했으니 얼마나 미련한가? 우리 주변에 섬김의 대상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게 아니질 않는가? 돌보고 섬길 수 있는 대상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간다면 그 만큼 우리는 행복을 저장하는 것 아닌가?
임할머니의 팥죽은 해마다 우리 집의 모든 액(세상적인 생각으로)을 다 떠나보내주고, 해마다의 삶을 평안히 살게 해주셨나보다. 그러나 할머니가 맛보시는 그 섬김의 행복을 침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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