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얘! 나 이사한다."
깜짝 놀랬다. 이 겨울에 이사라니? 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신 후 텅빈 집에 혼자 사셨다. 견디다 못해 2층에 싸게 전세를 주고 아래층에 사셨으나 딸 집에 다녀가신 후 도둑이 들었던 자취를 보신후 너무 놀라시고는 그 집에 들어가시기 싫어하셔서 동생네가 아파트 전세를 얻어 드렸다.
그러다 전세기간 만료로 이사하시게 되어 난감하셨다고 한다. 동생들이 궁리가 많았던 모양이다. 아파트지만 사시던 곳을 떠나시는 것도 또 어려운 일이라서 가까스로 구한것이 옆줄에 원주사람이 사둔 집이 있었다는데 그 집을 사드렸다고 한다.
동생 둘이 돈을 합해서... 어머니는 간단히 말씀하셧다.
"애들이 집 사줬어!"
난 명색이 장녀로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어머니가 올데 갈데 없이 이사하셔야할 사정이셨던 것을 몰랐다는게 황당하고 또 그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아팠다. 속칭 왕따를 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겐 하나뿐인 전실 자식이다. 어머니 소생이 내 아래로 7명의 딸들만 있다. 드디어 동생들이 '나를 왕따 시키는구나' 하고 은근히 노여움이 일기시작했다. 그러나 천국에 계신 아버지 생각을 하고 즉시 어머니 소생중 큰 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알고보니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목사의 아내인 언니에게 상의하는 것이 당연하나 일단 돈이 문제였고 급하게 집을 옮기는 과정에 미쳐 상의할 수 없었던 부분이 있었고. 어머니의 자존심을 다쳐드리고 싶지 않은 사정도 있었단다.
오해는 말끔히 씻겨졌고 깊이 깨달은 것은 '내 동생들이 이토록 성숙했구나.' 큰언니의 마음과 형편까지 헤아릴 정도로 삶의 여유도 생겼고 마음도 언니보다 더 아량이 넓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메일 정도로 든든하고 고마웠다. 아버지가 얼마나 대견해 하실까 한분 계신 어머니께 효도하는 동생들이 너무 대견스럽고 사위들이 한없이 고마웠다. 어머니의 후덕하심의 열매가 이제 맺힌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에 대해 기록해 두었던 것을 잠시 열어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지금의 계모가 시집을 오셨다. 팥쥐엄마를 곧장 연상시키는 '계모'라는 단어가 얼마나 거리감을 주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후덕하신 그 분은 결손가정을 일으킨 위대한 여인이다.
처녀 때 사회사업의 꿈을 가졌던 양반가의 귀동 따님이셨다. 지금은 문틈의 렌즈로 사람을 확인하고야 대문을 열어주는 세상이지만, 어릴 적 우리 집은 삐꺽 대문소리만 나면 보따리장사들이 들어오는 동네였다.
별별 장사가 다 드나들었다. 계모는 딱한 장사는 필요없는 물건이라도 억지로 사서 머릿짐을 가볍게 해 주는 여인이었다. 동네에선 '효부'라는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장사들이 소문까지 싣고 다녔던 시절 이었으니까 그리그리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11년간 할머니 중풍수발을 얼굴 달리함이 없이 해오신건 사실이지만, 넙적다리 살을 베어 삶아 드리거나, 새끼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해 드린 적이 없으므로 왜 효부인지, 나는 참 이상했다.내가 생각하고 있던 효부의 수준은 그런 정도였다.
훗날 혼자 생각인데 계모에겐 한가지 남다른 점이 있었다. 부엌에서 씀바귀나물 하나를 무치더라도 그릇 채 안방까지 가지고 들어와서는 "어머니 간이 맞나요? 씀배가 좀 억센가요?" 하면서 당신의 시어머님께 여쭈어 보셨다.
나는 즉각 물었다. "엄마! 여태 그것두 못해요? 할머니한테 여쭈어 보게?" 어머니는 나를 건너방으로 조용히 불렀다. "게 앉거라! 두가지 점에서 할머님께 여쭈어 보는 것은 유익하단다. 첫째는, 할머니의 경험을 단 한 순간에 내 것으로 삼을 수 있고, 둘째. 할머니는 엄마가 무언가 여쭈어 볼 때 아주 행복해 하신단다" 이런 말로 기억한다.
당시엔 무슨 말인지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때 계모의 얼굴이 심각하기에 난 일보 후퇴 하였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평생, 건너방에서 듣던 나즉한 계모의 말씀이 왜 이렇게 크게 내 귓전에 살아 있는 것일까?
대학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모처럼 집에 돌아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너스레를 떨며 들려드릴 때마다 계모는 할머니께 나물 무치던 때 여쭈어 보던 표정으로 신기하게 내 이야기를 들 어주곤 하셨다.
나는 조부모와 살면서 주말에만 아버지에게 다녀오던 때가 잠시 있었다. 계모 몰래 아버지와 단독으로 만나 돈을 요청했다. 아버지 는 "오! 그래! 주고 말고! 엄마에게 맡겨 놓을테니 여쭈어 보고 받아 가도록 해라" 야속하기 짝이 없던 아버지! 계모 몰래 몇푼 줄 수도 있을 법 한데 '꼭 잡혔군! 새 여자에게 꼼짝도 못하는 아버지!' 얼마나 아버지를 원망했던가?
하지만 가정질서와 대화의 채널을 분명히 해두셨던 아버지! 딸의 어떤 오해도 무릅쓰고 한결같이 아버지의 원칙을 지켜오신 아버지! 8선녀 집안의 맏딸인 나는 그러니까 외톨이 전실자식인 셈이다.
중대사가 생길 때마다. 이복동생들은 꼭 우리내외에게 최종 문의해 온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큰 언니하고 상의했니?" 계모는 꼭 확인을 하셨다고 한다. 집안 대소사에 내가 모르고 지나는 일은 없다.
계모는 나를 섭섭하게 하신 일이 없다. 지금도 난 내 아들에게 말한다. "누나 의견은 어떠하냐?' 아들이 대답한다. "이건 엄마! 제 일이예요" "그래, 그래도 누나하고 이야기 나누렴!" 내 나이 쉰 넘고보니 마땅히 여쭈어 볼 곳이 없어 힘겨울 때가 많다 별이 자꾸만 떨어진다. 밤도 깊어가니까...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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