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치밀어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다. 숨소리도 싫다. 경상도 문딩이하고 결혼하는 사람은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면서 말릴꺼다.
겉옷만 입고 돈을 몇푼 챙겨서 집을 나섰다. '하필이면 저녁에 나올게 무에람? 꾹 참고 아침에 나와도 될 것을' 금방 후회가 되었지만. 위세도 당당하게 택시를 잡았다.
이송도로 해서 영도를 한바퀴 돌 요랑이었다. 출렁이는 바다도 노여운가보다. 내 분노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남자! 남자가 싫다.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껄! 꼴도 보기싫다. 답답하다. 고약한 성격, 몰인정한 인간!, 여자 분위기도 모르는 돌기둥하고 사느니 일찍 포기하는 것이 낫다.
택시기사가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눈치껏 알아서 할 일이지 무얼 물어?' 속으로 말했다. "바람이나 쏘일려고요" 했다. 금방 영도를 한 바퀴 돌아버렸다.
'왜 이렇게 빨리 돌아버린거야?' 요금을 주고 택시에서 내릴 때 얼마나 황당한지... '돈이 제법되자나?' '이제 어디로 간담?' 날은 어둑해지고 기가 막힌다.
'그냥 집으로 들어갈까?' '아니야! 콧대가 더 높아질껄?' '네까짓 것이 어딜 가겠느냐? 들어오고 말고...' 그럴꺼야. '그건 아니야! 한참 찾도록 고생을 시켜야지...' 다시 택시를 탈 수도 없고... 걸어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다리가 아프다. '아이들이 엄마를 찾을텐데...그럼! 잘 된거야!' '엄마 찾고 보채야 각본이 맞는거다' '고생 좀 해봐라' 그런데 다리가 너무나 아프다.
한발짝도 더 떼어 놓을 수가 없다. '아까 택시비는 너무 비싸자나...아깝다. 그 돈이면...?' '에구! 내가 미쳤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돈은 아껴서 무얼해? 누구 좋으라고 아껴?' 찻집에 들어가 앉았다.
"누구 더 오실건가요? " "아! 예" 담배 연기 자욱한 다방이 짜증이 난다. 사람을 기다린다고 답을 했으니 오래 앉아 있을 수 있겠지...? 커피를 될 수 있는대로 천천히 마셨다.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맛 볼것처럼... 둘씩 셋씩 정답게 앉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문득 외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창피했다.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는거지?' 찻집에서 물잔이 바뀌고 나니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값을 지불하고 나와 버렸다.
갈 곳이 없다. 걸음은 더욱 무거워지고 나른하다. '집에 들어가서 다시 한판 붙어버릴까?' '승부를 확실히 내고 나오는거야!'
'아니야, 사람이 칼을 뽑으면 두부라도 썰어야지. 이대로 내 발로 들어가면 너무나 우습게 볼꺼야, 그건 안 돼!' '그런데 왜? 계속 집에 들어갈 생각만 하는거야?' 천근만근 발은 무겁고 길가는 사람들이 점점 무섭기 시작했다. '
들어가나 봐라! 안 들어간다. 애들하고 고생 좀 해봐라.' ' 어디서 잤느냐고 하면 뭐라구 하지?' '나중에라도 할 말이 있어야 하는데... 약점 잡히면 안되자나...' '
아니 내가 지금 나중에 변명할 생각을 하고 있다니! 같이 안산다고 나왔는데....여전히 들어가 같이 사는걸 상상하고 있자나? 내가 왜 이러지?'
'그나저나 어디서 자야 하나?' '밤 기차를 타버릴까?' '친정으로 갈까?' '그건 아니야! 가서 무어라고 하나? 오밤중에 아이들을 두고 왔다면 얼마나 놀라실까?' '그건 아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깊어가는 밤은 왜 그리 야속하고 무서운지...
"보금자리"라는 말을 누가 했던가? 정막해가는 밤거리! 불빛이 하나 둘 꺼져간다. 영도를 휘감아 도는 검푸른 밤 바다는 더 무섭게 출렁이고... 하늘은 총총 별이 떠 있다. 새촘한 상현달이 비웃드시 냉정하다.
이 밤을 어쩌란 말이냐? '여관? 호텔? 여인숙? 아이구 무서워! 어디서 하룻밤을 잔담?' 이제는 몸을 가눌 길이 없다. 호텔은 '내 몰골이 딱하고, 그 비싼 돈을 주고 잘 수가 없지...' '
웬 여관은 저렇게 많은거야?' '여인숙이 값이 싸다고 들었는데, 여인숙이 큰 길가에 있으면 좀 어때?' '여인숙을 들어가는 곳은 왜 몽땅 골목길일까?' 힐끔 골목안을 들여다 보니 저쪽 골목에 이상한 사람이 서 있을것만 같아 도저히 들어설 수가 없다.
여인숙 이름도 희안하네! 기분 나쁘거나 유치한 여인숙 이름은 통과! '여인숙 고르다 날새겠다 이거!' 얼마를 또 걸었나? 잠 재워주고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이 무지 많구나 그런생각이 들었다. 요기경 속이다.
드디어 용기를 내어 쑤욱! 들어갔다. 따끈한 아랫목에 발을 묻으니 금방이라도 골아 떨어질 것 같다. 그런데 웬일인가? 몸은 풀죽같이 늘어지는데 머릿 속은 말똥말똥 견딜 수가 없네.
왜 집을 나왔는지 이유도 분명치 않고. 자꾸만 집에 들어가고 싶어서...' '내가 미쳤지, 왜 집을 나왔지?' 아이들이 보고싶어 견딜 수가 없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들어가야겠다. '아이고 무너지는 자존심이야!' 이렇게 내 결심이 약한줄을 미쳐 몰랐다.
'그래도 이왕 여인숙에 돈도 주었는데 자고 내일 새벽에 집에 가야지' 마음을 굳게 다짐해도 잠이 오질 않는다. '아이들만 자나 확인해 보자!' 전화를 들었다 놓았다.
'전화를 받으면 뭐라 하지?' 심장이 콩콩 뛴다. 견디다 못해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돌렸다. 마지막 번호 떨어지자 얼핏 전화기를 내 던지고 말았다.
다시 한 번 자존심을 추스렸다. 하지만 또 다시 돌렸다. 신호가 간다. 딱 한번 가자마자 "여보세요!" 남편의 음성이 날아왔다. 전화기를 들고 가만히 있었다.
"여보세요! 누구야! 당신? 대답해!" 가만 있었다. 미웁던 웬수! 음성이 들려오자 주루룩 눈물이 쏟아졌다. "어서 들어와! 기다린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는 탈칵! 수화기를 놓아버렸다.
잠시 후 다시 걸었다. 이번엔 내가 선수를 쳤다. "여보세요! 나야! 나 죽어두 안들어 갈꺼야! 잘 먹구 잘 살어라!" "잔소리 말고 당장 들어와! 미안하다. 어서 들어와!" 내가 전화를 들고 있는데 철컥! 수화기를 그이가 먼저 놓아 버렸다.
'들어가나 봐라!' '아 참! 아이들 어떤가 물어볼려고 실은 전화한 것이었는데...' '물어도 못 보았자나 이런!' 다시 전화를 걸 수도 없고 어느새 나는 겉옷을 다 입었다.
휑하니 집으로 달렸다. 개선장군처럼 잔신만만하게 "영선국민학교 앞이요" 하고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시침 뚝! 떼고 대문을 띵똥 눌렀다.
아이들이 잠들어 있었다. 씻지도 않은 얼굴이 영락없이 고아다. 쑥스러워서 얼른 부엌으로 들어갔다. 씻고 자리에 누워버렸다.
서재에서 남편은 나오지를 않는다. 어느새 골아 떨어진 내 곁에 그의의 숨결이 느껴졌다. "미안하다. 하지만 집을 나가는건 다시는 용서 못해" "아이구! 나두 절대로 안나가!(속으로 말했다)"
집을 나가기 전엔 온세상 지구 땅 끝까지도 갈 것만 같았는데, 그리고 처녀때는 너무나 갈 곳이 많아서 발이 부르틀 지경이었는데, 왜 그리 갈 곳이 없는건지...
한 밤을 쉴 곳도 없다니 그리고 원수같은 남편이 있는 곳에 왜 그리 들어오고 싶은건지... 그 날 이후 나는 가출은 안한다.
바가지를 박박 긁어 남편을 내쫒을 망정!
모처럼 아이들 어릴 때 글을 발견하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25년전쯤의 일기다.
그림처럼 그날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서언하다. 엊그제 남편이 회의차 하루 집을 비운적이 있었다. 그날 쓴 글을 올려본다. 비교해 보니 재미있다. 이렇게 둘이 하나가 되어가는가?
당신 없는 저녁이오!
모처럼 당신 없는 저녁입니다. 당신없이 한밤 잠들어야 합니다. 온 집이 허전한 것은 당신이 숨결처럼 함께 했왔음입니다.
연습해두지 않아도 이별은 올것인데 왜 이리도 낯선 고요함에 허전할까요? 때로 헤어져 보아야 만남의 기쁨이 큰 것이고, 때로 없어 보아야 빈 자리 소중함을 아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네 심사인 모양입니다.
오늘 당신 없어 호젓한 하루라고 남편 군대가고 남편없는 시집살이를 하는 며느리를 위해 영종도에서 코스모스 길을 따라 함께 걸었습니다.
손녀딸 사진도 찰칵! 찍어주었습니다.
"내일 갈께. 별일 없지? 잘 자요!" 라고 당신이 전화했을 때 "예!" 라고 간단히 대답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곳 이야기를 자세히 하고싶지 않았던 것은 모처럼 집 떠난 당신의 홀가분함을 혹여 무겁게 할까봐서 당신의 어깨의 무게가 마냥 풍선처럼 가벼우라고...
때로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무작정 떠나고 싶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겠소! 말 없이 황소처럼 멍에를 진 채 두벅두벅 잘도 걸어오셨소!
내일이면 여전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주섬주섬 챙겨 그 멍에를 뒤집어 쓰고 또 한걸음 한걸음 앞서 가겠지요.
난 또 어제처럼 그렇게 조잘대며 옆서거니 뒷서거니 당신을 따라 걸을테고요. 우리 등손 함께 잡고 의지하며 걸어요 이별이 없는 나라까지 함께 가요!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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