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가 되어서야 아들을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전국체전이 인천서 열리던 해였다.
가을 해가 어찌나 짧던지 날은 어둑해 가는데 아이가 갈만한 곳을 아무리 찾아도 없다. 점점 두려움과 자책감에 피가 거꾸로 솟는 고통을 안고 미친듯이 아이를 찾아 헤메였다.
누나 학교에 자주 가던 것이 생각나서 신흥학교 교실을 모조리 돌아보았다. 특히 화장실은 왜 그리 무서웠던지, 지금은 수세식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두 번째 화장실에 다시 가 볼땐 순간 아찔하고 방정맞은 생각까지 들었다. 한참을 헤메이다 보니 지나가는 또래의 아이들이 모두 내 아들 같았다.
마음 속으로 아들에게 잘못했던 것이랑 소홀했던 것들을 생각나는대로 뉘우치며 '아이만 찾게 해 주세요, 이젠 아주 좋은 엄마가 될께요' 수 없이 다짐했다.
기도하면서 헤메고 또 헤맸다. 미친여자가 따로 없었다. 지쳐서 잠시 학교 나무밑에 처량하게 주저 앉았다. 학교 마당에는 전국체전에 출전하려고 어둑할 때까지 고적대가 열심히 연습을 반복하고 있었다.
'저렇게 어두울 때까지 연습을 하는 아이들이 너무 힘들겠구나' 생각하면서 슬퍼서 찔금거리고 있는데...
앗! 이게 웬일인가?
발도 정확히 맞고 팔 높이도 척척 절도있게 돌아가는 고적대 행렬 속에 이상한 파격이 일고 있는게 아닌가? 저건 무엇일까? 아니! 나는 너무나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달려가 보니 내복만 입고 아들 녀석이 팔다리를 번쩍번쩍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행렬속에서 함께 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른 발에 오른 팔을 번쩍번쩍 들었다 놓았다 하니 튀어 나올 수 밖에...
줄도 맞추고 박자도 맞추어 땀을 뻘뻘 흘리며 숨차게 돌고 도는 아이! 너무나 놀란다 "엄마야! 이리와!" 하고 황급히 속삭였더니 고적대 행렬이 갑자기 멈추면서 지도교사와 아이들이 한꺼번에 까르르 웃는다.
"어머니 되십니까? 이 아이 아까부터 1시간은 돌았을 겁니다."
너무나 진지하고 열심이라서 곁에서 돌던 아이를 행렬 속에 들여 보냈노라고 했다. 그의 열중하는 모습을 웃어버리기엔 너무도 심각했더란다.
엄마가 불러도 아랑곳없이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자랑스럽게 웃지도 않고 바라보던 아들 ! 울면서 몇시간을 찾아 헤멘 엄마 사정도 모르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들이 말했다.
"엄마! 나도 학교 댕길꺼야!" 지금은 성악을 전공한 아들이 그 때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나보다. 딸 아이가 초등 1학년, 학교가 집 근처라서 삽시간에 없어지면 누나 반의 빈자리에 앉아 고함을 지르면서 "져요! 저요!" 를 외치며 벌떡벌떡 일어나곤 했다.
누나는 창피해서 엉엉 울면서 집에 와서는 동생 때문에 학교 못다닌다고 하소연했다. 학교 가는 것이 그리도 소원이더니 막상 학교 다닐땐 힘겨워 했다.
세월이 무상하다. 이 아이가 자기 아이를 낳았다. 어느새 내 손녀딸이 열심히 노래하며 춤춘다. 고적대 대열에 아들녀석이 끼어서 열심히 돌던 것처럼 멀지않아 나도 억겁을 돌아 영원을 행진할께다. 아들이 장가들기 전날 써둔 글 하나를 옮겨본다.
아들아!
아들아! 장가를 들겠다고? 장가드는게 뭔지 아니? 네가 한 여인의 일생을 책임지겠다고? 그녀가 일평생 후회하지 않고 행복하다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게 해줄 자신이 있는거냐? 그녀를 너 보다 나은 반쪽으로 여기며, 부족함과 약점을 감싸주고, 그녀의 말에 깊이 귀 기울여 들어 줄줄 알고, 몹시 부끄러운 실수를 저질렀을 때에도 아무도 모르게 품어 줄 수 있겠느냐?
아들아! 너의 말 한마디에 살고 싶어지기도 하고, 너의 행동 하나에 죽고 싶어지기도 한 여자의 섬세함과, 네가 무서운 파멸을 경험할 때나. 네가 우쭐대며 자랑하고 싶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고, 항상 네 옆에 있을 여인이 바로 그녀라는 사실을 잘 알테지. 외로운 병실과 죽음의 언덕을 넘는 순간까지 바로 그 자리에 끝까지 지켜 줄 여인이라는 것도?
아들아! 엄마와 그녀 사이에서 지혜롭게 균형을 맞출 수 있겠느냐? '아내는 다시 얻을 수 있어도 엄마는 한 분이라고?' '엄마는 돌아가시면 그만이지만 이 여자는 평생함께 할 여자라고?' 두 여인을 동시에 행복하게 할 재간이 있겠느냐?
아들아! 네 인생의 사명과 의미를 그녀가 공감하고 두개의 다른 바퀴가 아니라 같은 축을 함께 돌 수 있도록 그녀의 인생을 기꺼이 네 인생에 던질 수 있게 꿈을 심어줄 수 있겠느냐?
아들아! 무뚝뚝한 것이 동양적 사랑이라고 우기면서 무관심, 무성의를 변명하는데 익숙해 지지는 않겠지? 얼렁뚱땅 잠자리에서 만사를 풀어버리려고 얄팍한 술수를 쓰지는 않겠지?
아들아! 여자에게도 영혼이 있을 뿐 아니라, 여자는 감성이 지성만큼 중요하며, 눈물보다 깊은 한이 있다는 것과, 여자도 무서운 결단을 할 줄 안 다는 것을 알겠지?
아들아! 밤새도록 해도 새겨둘 말이 많다마는 잔소리이고 큰소리 못되는구나. 엄마의 속마음을 너 남자인 아들아 알겠느냐?
첫번 째, 아빠 엄마와 네가 만나고
두번째, 그녀와의 만남을 앞에 둔 내 아들아!
세 번째 네 인생의 참된 만남을 잘 알고 있겠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하나님 안에서 너희 둘의 만남이 영원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아들아!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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