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애처가로 소문난 분이셨지만 단점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를 한나절도 집에서 떠나지 못하게 안방마님을 만들어 놓으시는거다.
집안의 행사에나 동행하실 뿐, 어머니 혼자 나드리를 허락하시는 법이 없었다. 혹시 일이 있으면 모셔다 드리고 모셔오고...
어머님은 아버지 보다 9세나 젊으셨고 왜정시대 고보(고등교육)를 나오신 당대의 엘리트이셔서 혼자 못다니는 분도 아니셨건만...
교편생활하셨던 어머니를 집귀신 만드시는 아버지의 심통을 알 수가 없었다. 가장 확실하게 잡아 두시는 방법이 선녀와 나뭇군처럼 아이를 갖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셨을까? 7명의 동생이 2년마다 줄줄이 사탕으로 태어났다.
최소한 어머니는 20년은 아이 낳고, 키우시느라, 집안에 계실 수 밖에 없기도 하셨다. 하루는 동생과 작당을 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어딘가 바람을 쏘여 드릴 것이다' 아버지를 꺽을 반동을 결심했다.
어머리랑 셋이서 천안에서 대전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계룡산 동학사에 도착했다. 입장료를 내고나니 하늘이 새까맣게 비구름이 몰려왔다.
기적같은 탈출인지라 비도 아랑곳 없다. 산길로 계속 치달아 오를 무렵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초조해서 '아버지 걱정 하신다고 돌아가자'고 하셨지만, 우리 형제는 고집을 세우며 우산도 없이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 집에 돌아온 세 여자의 몰골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비에 젖어 생쥐처럼 달라붙은 옷을 몸에서 연방 떼어내면서... 깔깔거리고 즐거워 하는데, 놀라운 것은 어머니가 도무지 겁을 내지 않으시는거다. 아버지가 어지간히 무서웠을텐데도...
아버지가 '음!~' 하시며 힐끔 쳐다 본 후 화가 나셔서 아무말도 안하셨지만, 우리 세 여자는 동지의식에 키득거이며 열심히 저녁상을 보고 있었다.
그 뒤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외출, 외박을 허락하셨다. 집안 대소사에 어머니를 대신 보내기도 하셨다. 어머니에게 새 하늘이 열린 것이다.
우리의 조직적 반란이 대 성공을 거둔셈이다.
아버지는 그 후로부터 무척 외로운 날을 보내셨다. 집에서 회양목을 다듬으며 정원 손질을 하시고 큰소리 치시던 기세가 꺽이셨을리는 없지만, 나름대로 엄마의 세상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영원한 나라로 이사 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시면 얼마든지 돌아다니실 줄 알았는데 지금도 여전히 집을 지키신다.
아버지가 다듬으시던 나무들을 손질하며 고요히 늙어 가신다. 이제는 가고 싶은데도 없으시단다. 어쩌다 동학사 이야기를 하면 빙그레 웃으실 뿐!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다. 여기에 언젠가 썼던 편지 한장을 올려본다.
당신은 위대하십니다.(계모에게 드리는 편지)
주서방이 일주일 미국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밤이 좀 길다는 느낌이라던지, 밥 맛이 없어 그럭저럭 끼니를 때운다던지, 그런 말씀을 어찌 어머니 앞에서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돌아가신지 2년, 그 허전한 가슴을 표현 못하시더니 엊그제 선산이 사깃군에게 넘기워져 잔디도 마르지 않은 아버지 산소가 대책이 없어지자 어머니께선 강경하게! 일평생 처음으로 단호하게! '이 집을 팔아서라도 아버지 산소를 이장할 생각이다' 하시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국토가 산소문제로 매장법을 바꿔야 할 시점이라는 등의 말씀을 감히 어머니에게 드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머니가 나에게 새 어머니로 소개되던 날, 흘끔대며 훔쳐보던 것이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봄날, 그 날 이후 오늘까지 어머니의 삶이 제 곁에 있었습니다.
사춘기 온갖 불만을 다 갖고 가출하였다가 친구 집에서 잡혀 왔을 때 어머니의 그 난처하셨던 입장! 술로 세월을 바래이던 아버지를 묵묵히 두던하시던 어머니! 장손 며느리 노릇하실 것이라고 7명의 공주를 낳아 8선녀 집을 만들고야 마신 한평생!
2년마다 동산만해진 배를 내려다 보며 비지땀을 흘리시던 순종! 어머니의 삶을 한 여인의 삶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게 되던 날부터 저는 숙연해지고 말았습니다.
걱정마세요, 지켜 드릴께요. 낳은 어머니 못지않게 길러주신 어머니의 고마움을 알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제 나이 이제 쉰 넘고, 자식 장성해 가면서,
그것도 내 뱃속으로 난 자식을 키우면서...
어머니! 그 이름이 얼마나 위대한지...
남의 자식 길르실 때 그 가슴이 얼마나 숫검정 같이 타 들어 갔을까? 때로는 포기 되어 죄책감 생기고,
때로는 표시날까? 마음 드리우면서...
어머니! 아버지 산소는 걱정 마세요. 그 옆에 날 낳으신 어머니와 기르신 어머니! 자랑스런 나의 부모님 세자리를 마련할 겁니다.
딸 자식을 잘 가르쳐야 남의 가문을 흥하게 한다고 8명의 딸들을 몽땅 대학을 보내시고 또 훈계하셨지요? 무덤가에 포돗이 올라오는 생명력되어 저희 아이들 남매 속에서도 아버지 어머니의 정신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어머니! 위대하신 나의 두 어머니! 제가 어찌 두분만 하오리까? 어진 어미 되랴 다짐하려니 그리운 어머니! 제가 오늘 고마움을 여기 남깁니다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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