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 뭔지?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를 중재하며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사명은 여자들에게 있단 말인가? 남자들은 진정 대화가 어려운건가? 어찌보면 둘은 대화기술이 미숙한건지도 모르겠다. 우리집 두 남자는 무척 서로 사랑하면서도 대결구조로 바뀌면 정말 힘들어진다. 집안이 삽시간에 지옥으로 바뀌기도 하고 여자들은 졸지에 긴장을 풀어내기에 힘겨운 날을 보내기도 한다.
아래의 글은 써 두었던 일기이다. 읽으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토록 힘겹던 순간도 지나고보니 추억이 되었다. 아직도 두남자는 어려운 관계임에 틀림없으나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아버지와 대화하고야 결단을 내리는 아들 녀석이 고마울 뿐이다. 아직 대화단절상태는 아니라는 안도감 때문에...
고래 싸움에 등터지는 새우들!
부산서 전화가 왔다. 시댁 조카딸의 아들이 서울나드리를 온단다. 서울의 대학을 구경하고 싶은데 내 아들에게 캠퍼스 구경을시켜 달라는 부탁이었다. 개학전에 친구네 집을 방문 오는 아이에겐 멋진 계획일테지만 내 아들녀석은 아찔한 모양이다. 스키장에 부부가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 내외는 하이텔 통신으로 사귄 형님이 일부러 우리집까지 와서 아들내외를 태워가기로 약속되었다고 했다. 스키장비가 요란한지라 자동차 신세를 져야 하는 입장으로는 보통 번거롭고 미안한 부탁이 아니라고 한다.
부산조카도, 스키장동행 약속도, 둘 다 우선순위를 가름하기 어려운 일이어서 잠시 후 연락주겠다고 부산에 보류하고 갈팡질팡하는데...
옆에 있던 남편! 당연히 우선순위가 재완이(부산)! 라고 한다. 아들은 선배 형님에게 어렵사리 부탁해 놓고 일방적으로 취소하면 실없는 사람되는 것도 자기관리에 엄청난 마이너스요 선약된 사항이므로 갈등을 표현하자.
아버지는 모처럼 부탁한 조카의 부탁에다가 재완이에게는 평생 잊지못할 인생의 중요한 기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는데 스키약속은 취소하라는 것이다.
둘이 팽팽한 대화에 안절부절 내가 정신을 못차리겠다. 둘이는 끝내 대화가 원만하질 못했다. 아들도 재완이를 중요한줄 알지만 스키는 다음에 가도된다는 아버지 말씀에 섭섭했던 모양이다. 스키가 문제가 아니고 선배형에 대한 약속 불이행에서 오는 신뢰부재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두 남자 팽팽하게 두 방에서 썰렁하게 버티고 있다. 뻔한 우선순위를 우긴다고 남편이 서슬이 시퍼렇다. 슬며시 아들 방에 가서 "아버지의 우선순위와 너의 우선순위가 다를 수도 있다. 아버지 의견을 참고해서 네가 결정해라. 부산에 곧 연락해라. 도울 수 없으면 죄송하다고 해도 된다" 라고 일렀다.
우라통 터진 아들 "둘다 포기합니다. 마땅히 재완이 데리고 학교구경시켜 주어야 하지만, 아버지만 옳다고 억지부리시니 아무 것도 안 할랍니다. 부산 전화 엄마가 하세요" 아들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안방에선 내가 과일 깍아다 대령하고 분위기 바꾸느라 절절매고. 아들방에선 바람쏘이러 나간 아들 수진이가 기다리고, 두 남자 전쟁에 등터지는 새우들...아! 딱한 이집 여자들이여!
밤 12시 아들이 조용히 집에 들어섰다. "어머니! 스키 취소하구 재완이 학교안내 해주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마세요. 아버지 명령 때문이 아니니까요." "그래? 알았다. 하지만 이왕 순종하는 바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셔서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하면 네 자존심 망가지냐? 아버지 자존심을 망가뜨려야 네 자존심이 살아나는거냐? 에구 우리 아들 효오자!"
"아버지하고 겨루기 해주니 고맙다. 아직은 아버지가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로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두 남자 전쟁! 아들이 아버지를 참아줄 때는 이미 패잔병 되는건가? 하지만 고래싸움에 등터지는 새우들은 어쩌란 말이냐? 좀 조용히 살자~이 꼴통 아들아! 그리구 불통 영감아!
pocket ball
아들녀석이 친구들과 부산으로 포항으로 다녀 오겠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겨울날씨에...
자기 차를 갖고 1년쯤 되었으니 가장 사고위험이 많은 시기이다. 방학이 되어 친구들과의 들뜬 기분 에다가 어느 것하나 마음 놓이는 구석이 없다. 여지없이 아빠에게 거절당했다.
아들의 심경을 어루만져 주려고 중재에 나섰다. '22세된 아들을 너무 어리게 보지말라고, 인명이 재천이거늘 허락없으면 모험을 단행 할 아이라고' 여러모로 남편을 먼저 설득해 보았으나 두번 다시 말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영광이가(미국 친구의 아들인데 2개월전 10년만에 귀국했다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친구들 이 보람 쏘여 준다고 4명이 함께 나갔다가 두명은 즉사하고 두명은 아직도 치료중이다)죽은 걸 벌써 잊었나?"
다시 아들방에 건너가서 아들아! 아빠가 영광이 생각을 하시는가 보다. 잠시 후 아들이 밝은 웃음으로 건너왔다. "아버지! 우리가족 포켓볼이나 치러가요!" 캄캄하던 잠시 전의 집안이 화안해 졌다. 포켓볼이 뭔지 구경도 해본 적도 없는 내가 제일 먼저 옷을 입고 나섰다.
내기를 하잔다. 아빠랑 딸이랑, 엄마랑 아들이랑! 이렇게 불리할 수가 있나! 이겨도 져도 돈은 아빠 엄마 주머니에서 나오게 생겼다.
2차로 아빠와 아들이 정식 당구시합을 했다. 고3때 아들과 겨루어 이긴 아빠의 기록이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놀이에 불과하지만 아들에게 지고 즐거워하는 아빠와, 아빠를 이긴 두 남자를 보는 엄마는 흐뭇하다.
장차 시아버지 모시고 포켓볼을 쳐서 여지없이 이기도록 딸도 연습 많이 시켜야지...
남상순
인천YWCA 이사
청암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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