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역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무잡잡한 얼굴을 한 이방 여인 두 명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어눌한 우리말로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우리는 네팔 사람이에요. 자원봉사 하고 있어요.” 하며, 그들 중 한 명이 무엇인가 내 앞으로 내밀었다. 자료철이었다. 거기에는 굶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내용의 제목 밑으로 어린이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또 짧은 시간에 다 읽을 수는 없었지만 어린이들의 실상을 알리고 모금을 하는 당위성이 적힌 이런저런 글들과 서명들이 있었다.
금방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린 나는 지갑을 열어 만 원을 그들이 내민 작은 가방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가방 속에는 작은 정성들이 빼곡히 차있었다. ‘역시,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랑은 식을 줄 모른다니까.’라는 생각을 하며 서명을 하고 전차 안으로 들어섰는데, 그렇게 마음이 개운할 수가 없다.
‘만 원!’ 그들에게 만 원은 작은 돈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생애 중에 가장 힘든 굴곡을 지나고 있지만, 내게서 만 원을 빼간다 해도 그것 때문에 무슨 큰 일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선뜻 내놓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들이 다가왔을 때, ‘만약, 만 원이 없으므로 한 명의 어린이라도 굶어 죽는다면.’ 하는 생각을 했다. 순간 나는 만 원의 힘을 믿기로 했다.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만 원을 가지고 버티는 연예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나름대로 흥행성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만 원을 가지고 구차하게 견뎌내는 이야기와, 정말로 돈이 없어 굶어죽는 이야기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리라.
만 원 때문에 나는 전철에 앉아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아마 지금의 내 상황이 아니라면 생각할 수 없었을 무수한 생각들을 말이다. 풍족하게 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돈으로 인하여 삶의 무너짐을 느낀 적도 없었던 터라, 현재 무너짐의 경험은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고 믿지만, 하나님의 오묘하신 끌어내림의 섭리가 있음을 믿지만, 그래도 현실은 터널 속으로 우리 가족을 마구 쑤셔 넣는다. 만 원, 그리 쉽게 흘려버릴 수 있는 가치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돈 때문에 살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돈을 무시하며 살 수도 없다. 우리가 육신을 둘러매고 있는 한.
내가 가방 속으로 들이민 만 원이 정말 의미 있게 쓰였으면 좋겠다. 어쩔 수 없어 삶을 포기하려던 생명이 살아났으면 좋겠다. 버려진 삶의 터널에서 나와 세상에 큰 의미를 던지는 인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만나보지도 못했고, 만날 가능성도 없는, 어린 생명이 하나라도 그 만 원으로 인하여 희망을 일궈냈으면 좋겠다.
그 네팔 두 여인에게 전달자의 역할을 잘하라고 마음으로 말하면서, 전철에 앉아있는 동안 내 만 원의 위력에 대하여 믿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 만 원, 만 원, 그것은 대단한 것이다. 대단하게 쓰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아무렇게 쓴다면 휴지조각이기도 하다. 같은 만 원도 이처럼 생명과 사망을 오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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