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격언처럼 잔인한 말이 없다. 아침저녁으로 지렁이의 시체를 밟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곡예를 하며 걸어야 하는 나에겐, 적어도 그렇다. 뜻이야 아무리 순하고 미천한 사람이라도 너무 업신여기면 반항한다는 말일 터. 그러나 실제로 지렁이는 밟으면 죽는다는 걸 아는가. 아무리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지렁이를 밟으면 꿈틀대다 결국은 죽는다.
요새 난 그 주검들을 피하느라 고역이다. 아파트 단지 외부로 난 보도를 걷기가 겁날 정도다. 옆 둔덕 풀숲에서 보도로 나온 지렁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 그 중에는 아직 살아 있는 놈보다 주검이 더 많다. 딸과 함께 출근을 하다 징그럽다며 피하는 딸아이의 행동을 보고야 그간 무심코 지나쳤던 지렁이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하게 되었다.
보도를 따라 있는 둔덕은 보도보다 높다. 그러다보니 둔덕에서 나온 지렁이들이 자연스럽게 보도로 내려온다. 난 길에서 만난 지렁이들이 그저 징그럽다는 생각만 했었다.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것들을 피하는 것으로 내 할 바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뒤집어보기’ 혹은 ‘입장 바꿔 생각해 보기’라는 훈련을 열심히 하는 요즘인지라, 지렁이와도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았다.
“남의 신발을 신어보라.” 굳이 이런 격언이 아니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남의 입장이 돼 보는 것이 좋다. 아니 꼭 그래야 한다. 사람들은 지렁이를 밟으면 꿈틀하는 것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지렁이 입장에서는 밟히면 죽는다. 그 증거의 주검들이 내가 사는 아파트 내 보도 위에 즐비하다.
물론 지렁이의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아주 조금만 밟는다면 꿈틀대다가 이내 상처가 아물어 예전처럼 살아갈지 모른다. 그러나 차라리 그렇게 밟는다는 게 기적이다.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밟게 된다. 그리고 밟힌 지렁이는 사람 눈에는 꿈틀대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치명상을 입고 이내 죽게 된다.
그게 지렁이의 주검만이겠는가. 그렇게 죽은 인간 지렁이들이 세상에는 없을까.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사41:14)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렁이라고 불렀다. 이 논리로 보면 신앙인 모두가 지렁이다. 누구든 무심코 밟은 지렁이들이 무수히 많다. 물론 자신은 모른다. 지렁이의 징그러운 움직임을 목격하고 부러 지렁이를 밟을 끔찍한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 대부분은 밟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피하는 이유는 지렁이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징그럽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렁이로써는 삶과 죽음이 거기 달렸다. 밟히느냐 안 밟히느냐에. 그런데 사람들은 지렁이의 목숨은 아랑곳없이 지렁이를 가지고 논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격언까지 지어놓고 말이다.
이 격언의 ‘지렁이’가 그냥 지렁이가 아닐진대, 성경의 ‘지렁이’가 하나님의 백성일진대, 우리는 지렁이가 되어 볼 필요가 있다. 그 지렁이가 내가 될 수 있으니까. 밟는 지렁이가 있다면 분명히 밟히는 지렁이도 있기 마련이다. 자신은 밟는 지렁이라고 자랑할 게 아니다. 밟힌 지렁이의 아픔을 그의 입장에서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한다. 지렁이는 밟히면 치명적이란 사실, 이게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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