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조차 앗아간 초겨울바람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싸늘한 기운으로 코는 발개졌고 입은 어느새 굴뚝에서 나는 것 같은 입김을 뿜는다. 장갑에 의지하지 못한 손은 얼음장이다. 가끔 입김을 불어서 얼음 손을 녹인다.
고즈넉한 시골길을 우리 부부는 걸었다.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처음 본 사람일지라도 꽤 오랜 정분을 쌓은 사람들처럼 인사를 해가며…. 그렇게 오후의 한가함을 잰걸음으로 무마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며 행복하다 연거푸 말하고프다. 행복하다 말하면 행복해지려니.
이런 오후의 무력함이 결국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은행을 털기로 한 것이다. 우리 부부의 의견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지 않는가. 우리 부부는 얼마나 손발이 잘 맞던지. 다른 때는 몰라도 적어도 이번 은행털이에는 그랬다.
털이대상을 물색하는 것으로 그날을 만족했다. 다음날, 결국 은행털이를 감행했다. 은행털이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을 준비하고 말이다. 고무장갑 두 켤레, 소쿠리 하나, 비닐봉지 몇 개, 이것이 은행털이범의 도구의 전부다.
그렇다. 이맘때면 노랑 잎을 마구 길에 뿌려놓아 그것을 밟는 것만으로도 길손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그 은행이다. 우리 부부가 턴 것은 바로 그 은행이다. 시골 한적한 길가에 마구 떨어져 오묘한 냄새를 풍기는 은행, 임자가 있는지 없는지, 은행은 무수히 떨어져 길가에서 밟힐 뿐이었다.
우리는 그날 운동을 하며 그 임자 없는 은행을 구제하기로 한 것이다. 냄새 한 번 지독했다. 코끝에서 뿐 아니라, 심장까지 파고드는 구린내, 정말 은행을 줍는 시간 내내 코를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고민 무척했다.
그렇게 둬 시간 남짓 은행을 주웠다. 며칠 전 시장에서 은행을 샀던 경험이 있으므로 우리 둘이서 두 시간 동안 만 원 이상을 벌었다는 걸 금방 직감할 수 있었다. 지나던 할아버지가 ‘그거 뭐 하러 주워요?’ 물었을 때는 ‘약하려고요.’ 하는 그럴 듯한 대답도 했다.
역시 시골 일은 돈 되는 일은 아니다 싶다. 구린내와의 한판 승부가 질펀하게 벌어져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열매, 그 열매를 내다 팔아 돈을 번다는 것은 그냥 낭만일 뿐이란 걸 다시 경험했다. 심거나 기르지도 않고 그냥 떨어진 열매를 줘 담아 온 것뿐인데도 다리오금과 허리가 뻐근하다.
전자레인지에서 우두둑우두둑 은행 익어 터지는 소리가 맹랑하게 들릴 때마다 은행털이범 부부는 행복하다. 은행이 피를 맑게 한다는데 그래서인지 요샌 약에 의지하지 않아도 혈압이 정상이다. 무엇보다 질펀하게 떨어져 썩어갈 운명의 은행을 이처럼 값어치 있게 사용하니 행복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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