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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교회 원로/선교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명예교수,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한국세계선교협의회 공동회장

  제목 :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와 바람직한 관계” 해암신학연구소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와 바람직한 관계” 해암신학연구소(백주년기념관 2014. 12.1. 오후4시)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김영한 박사님이 저에게 너무 어려운 제목으로 발표를 하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이 어려운 제목으로 발표를 할 실력과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만 은퇴 후 지난 7년 동안 누군가가 부탁하는 대로 이리 자리 끌려 다니면서 누군가가 부탁하는 대로 설교도 하고 강의도 해오고 있기 때문에 김영한 박사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오늘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발표를 하기 전에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본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였습니다. 기장도 순 복음도 WCC도 전문적으로 비판하던 사람이었고 일본제국주의도 공산주의도 모슬렘도 타 종교도 적대적으로 보면서 비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은 물론 친 WCC적인 한경직 목사님까지 비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조금씩 바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장도 순 복음도 이해하며 존중하게 되었고 일본과 북한과 모슬렘과 타 종교에 대해서도 포용적인 자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물론 강원용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도 존경하게 되었고 일본교회와 교류하는데도 북한 동포를 돕는 일에도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 등 모슬렘 나라들을 방문하며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게도 되었고 국내의 타 종교 지도자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사역을 함께 하게도 되었습니다. 저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된 이유들을 생각해 봅니다. “비관주의적인 낙관주의” “종말론적인 역사성” 등 “다양성”과 “양면성”과 “포괄성”을 강조한 어거스틴을 전공하게 된 것,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삶에 대한 비관주의와 하나님께 대한 낙관주의” 라고 지적한 예일대학교의 펠리칸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석사학위 논문을 쓴 것, “양극을 붙잡는 역동적인 통일성”을 강조한 존 스토트 박사님으로부터 신학과 선교학을 배우게 된 것, 아시아와 세계 각국을 방문하면서 세계 각국 교회의 지도자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된 것,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게 된 것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삶과 “화해”와 “평화”의 삶을 배우게 된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역사적인 전통과 신앙과 제도를 조금씩 달리 하면서도 사도 신경을 함께 고백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함께 고백하는 세 개의 기독교가 지금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로마 카톨릭 천주교와 희랍(동방) 정교와 개신교라고 생각합니다. 세 가지 기독교는 전통과 신학과 제도를 달리하면서도 피차 이단이라고 정죄하기 보다는 서로의 장단점들을 비교하고 지적하고 배우고 수정하면서 보다 온전한 기독교의 모습을 지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이 세상에 완전한 교회와 신학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 신학도 아퀴나스 신학도 루터 신학도 칼빈 신학도 웨슬레 신학도 완전한 신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서로의 장단점들을 비교하고 지적하고 배우고 수정하면서 보다 온전한 교회와 신자의 모습을 지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991년 2월 7-20일 호주 캔버라에서 모인 제7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한국 개신교의 정현경 교수는 성령을 범 종교주의적인 관점에서 한 맺혀 죽은 인간들의 영들과 연대하여 나타난다고 주장했고 미국 개신교의 크리스터 스텐달 교수는 성령을 인격을 가진 분이라기 보다는 온 우주에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의 에너지로 보았는데, 희랍 정교의 파르테니오스 주교는 성령은 신비인데 성 삼위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성 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라는 정통적인 입장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일부 급진적인 개신교 신학자들이 신이 죽었다고 주장한데 비해 카톨릭 천주교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강조하면서 사신론을 부정하며 비판했습니다. 물론 카톨릭 천주교는 1870년 바티칸 공회에서 교황 무오설을 공식 교리로 채택하는 오류를 범했고 오래 전부터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높이다가 1950년에 와서는 마리아의 부활 승천설까지 공식교리로 채택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로마 카톨릭 천주교의 특징들과 개신교의 특징들을 비교하면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와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저의 소견을 발표하려고 합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 천주교의 특징들을 열거하면 수도원 제도, 교황권의 확대, 십자군 운동, 스콜라 신학의 형성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수도원 제도와 수도원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수도원 제도와 수도원주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수도원 제도는 중세에 이르러 전성을 이루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그 발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종말론적 기대와 박해의 시대가 지나간 뒤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면서 차츰 안정된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상을 획득한 반면 영적 특성들을 점점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세속화 되면서 신자의 생활과 불신자의 생활을 구별하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세속화의 상황에서 경건한 신자들이 세상을 떠나 사막이나 산속에서 고립된 은둔 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봄”(Visio Dei)의 은둔과 명상의 생활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의 수도사들은 육체를 괴롭히고 옷을 남루하게 입고 죽지 않을 정도로 적게 먹는 금욕 생활을 하며 기도와 명상에 전념했습니다. 동방의 수도원들이 대체로 개인적이고 금욕주의적이었는데 비해 서방의 수도원들은 공동체적이고 중용적이었습니다. 수도원 생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도원 규칙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카시안(Cassian), 파코미우스(Pachomius), 어거스틴(Augustine)등이 규칙들을 만들었고 6세기에 눌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가 “베네딕트의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베네딕트의 규칙(Rules of Benedict)의 특징은 질서와 안정, 훈련의 중용 그리고 융통성을 강조한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의 역사는 타락과 개혁의 역사였습니다. 수도원의 발전과 성공은 다시 안일과 세속화를 가져왔고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그리고는 또 다시 타락이 뒤따르곤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개혁 운동은 1) 10세기 말의 쿨루니(the Cluniac) 운동 2) 12세기의 씨스터시안  (the Cistercian) 운동 그리고 3) 13세기의 도미니칸 (the Dominican) 운동과 프란시스칸(the Franciscan) 운동이었습니다. 앗씨시의 프란시스는 베네딕트의 윤리적 이상들을 과격한 형태로 강조했는데 특히 “절대 청빈”을 요구했습니다. 수도사의 지고선(summum bonum)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를 모방하므로 얻어지는 “영적 완성”이었는데 수도사들은 막 10:21의 말씀을 생활의 원리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좁은 길, 가난의 길, 고난의 길, 자기 부정과 징벌의 길을 택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데 그와 같은 청결은 자신을 세상이 귀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으로부터 청결케 하므로 얻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은 청결의 작업을 평생 계속하므로 영혼이 세상에 대해서는 가난해지고 하늘에 대해서는 부요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가지 형태의 부정과 거절이 강조되었는데 “가난”(poverty)과 “순결”(chastity)과 “복종”(obedience)이었습니다.
“가난”은 세상의 가치 기준을 부정하고 거절하는 표식이었습니다. 바질은 기록하기를 “어떤 사람이 무엇을 자기의 것이라고 부른다면 그는 하나님과 먼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수도원의 규칙은 개인적인 소유권을 철저하게 금했습니다. 성 프란시스는 사치와 타락을 반박하며 “나는 가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다”고 선언했습니다. “순결”은 육체를 부정하고 거절하는 표식이었습니다. 성적 충동을 마귀적인 것으로 보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범한 한가지 실수로 간주했습니다. 제롬은 “결혼은 땅의 백성을 증가시키고 독신은 하늘의 백성을 증가시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봄”을 추구하는 완전한 생활은 가정 생활과 아이들의 울음 소리와 성적 방종에 의해서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복종”은 자기 의지를 부정하고 거절하는 표식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장과 선임자들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습니다. 교만은 죄악의 뿌리요 겸손은 선의 뿌리인데 순종은 겸손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말하기를 “자기의 의지에 따라 사는 것 보다 복종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수도 생활은 등급의 원리를 초래했습니다.  
중세의 대표적인 수도원주의자였던 성 프랜시스(Francis)의 삶의 특징을 살펴봅니다. 프랜시스는 첫째로 “버림”과 “청빈”과 “약함”의 삶을 살았습니다. 1182년 2월 이태리 앗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프랜시스는 재산도 평안한 삶도 세상의 향락도 아버지로부터의 상속권도 아버지도 모두 버린 채 한 평생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두 벌 옷을 가지지 않고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걸어 다니며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프랜시스는 자기는 가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다고 선언하며 절대 청빈과 완전 무소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지식과 학문까지 버렸습니다. 프랜시스는 둘째로 “동정”과 “사랑”과 “착함”의 삶을 살았습니다. 프랜시스는 가난하고 병들고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동정하고 품고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마땅히 섬겨야 할 주인이었고 특히 문둥병자나 버림 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는 문둥병자 수용소를 찾아가서 그들의 손에 일일이 입을 맞추며 그들을 품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산적 같은 흉악한 자들에게도, 이슬람 교도들에게도 아니 이단들에게도 미쳤고 사나운 이리에게도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에게도 아니 해와 달과 별들에게도 미쳤습니다. 프랜시스는 온갖 짐승들과 새들을 향해 형제 자매라고 불렀고 해와 달과 별들까지도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설교했습니다. 그의 생애와 사역에는 많은 기적이 나타났고 귀신이 쫓겨가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으나 그는 한번도 기적을 그의 전도의 방편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용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만이 그의 삶의 방식이었고 전도의 방식이었습니다. 프랜시스는 셋째로 가난과 고통까지도 사랑하는 “주변 지향적”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우주와 모든 것을 사랑했는데 고통과 죽음까지도 사랑했습니다. “비애는 나의 자매이고 고통과 죽음도 나의 자매입니다.” 그는 가난과 고통을 사랑하는데 그치지 않았고 가난과 고통 자체가 되었습니다. 가난하게 살았고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주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처럼 “주변 지향적” 삶을 문자 그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가난을 옷으로 삼고 고난을 양식으로 삼아야겠습니다.” 물론 그가 고행 자체를 예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랑이 궁극적인 동기와 목적이었습니다. “꼭 필요한 것은 고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프랜시스가 가난과 고통을 사랑한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고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삶은 주님 사랑에 깊이 빠진 삶이었고 주님과의 깊은 기도에 빠진 삶이었습니다. 그가 죽기 2년 전 라베르나 산에 들어가 깊은 기도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도대체 당신은 누구이시오며 작은 벌레 같은 저는 무엇입니까? 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허락해 주소서. 한 가지는 당신께서 수난에서 당하셨던 그 고통을 제 영혼과 육체도 체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또 한 가지는 그 어떤 고통도 사랑으로 감내할 수 있는 극치의 사랑을 제게도 넘치게 주시옵소서.” 바로 그때였습니다. 프랜시스의 몸에는 마치 불덩어리를 댄 것 같은 고통이 일어나 그는 그만 까무러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두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심한 통증이 일어났습니다. 상처가 생겼고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이후 죽기까지 극심한 몸과 영혼의 고통을 지니며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무한한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는 1226년 10월 3일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주님 품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하고서 눈을 감았습니다. “오, 나의 자매 죽음이여.” 프랜시스는 주님과 가난과 고통을 너무 사랑하다가 가난과 고통 자체가 되면서 살다가 그렇게 죽었습니다.
중세 카톨릭 천주교의 특징들 중의 하나가 수도원 제도의 형성과 발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수도원 제도의 지고선은 “하나님을 닮고 보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난”과 “순결”과 “복종”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중세 수도원 제도를 신학적으로 비판할 수도 있으나, 손봉호 교수님이 지적한 대로, 그것이 현대의 자유분방한 세속주의적 값싼 은혜의 기독교보다는 훨씬 낫다고 하겠습니다. 중세의 대표적인 수도원이 프랜시스칸 수도원인데 그 운동의 창시자인 성 프랜시스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감화를 미쳤는데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강원용 목사님과 이동휘 목사님과 이중표 목사님 등에게 깊은 감동과 감화를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박사와 교수 되는 것을 포기하고 신학교 3년 과정만 공부하고 귀국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신의주로 돌아와서 목회하게 된 것도 평생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면서 착하게 사신 것도 프랜시스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평생 “가난과 고난”을 몸에 지니고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펴면서 착하게 사신 것도 프랜시스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동휘 목사님이 “불편하게 삽시다”를 교회의 표어로 정하고 “가난과 착함”을 몸에 지니고 산 것도 프랜시스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프랜시스가 지은 찬송을 지금도 부르고 있습니다. “온 천하 만물 우러러 다 주를 찬양하여라.”
프랜시스의 삶은 부족한 저에게도 깊은 감동과 감화를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난 10월 2일 한교연이 주관한 신임 교단장, 단체장, 총무 취임 감사예배에서 격려사를 하면서 주님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몸에 지녔던 “가난”과 “고난” 등의 다섯 가지 영성을 몸에 지니고 지도자의 사명을 수행해 나아가기를 바란다는 격려사를 다음과 같이 했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날마다 바라보시는 동시에 한국교회의 아버지들이신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을 바라보시고,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들이신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을 바라보시고,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목회자와 부흥사이신 한경직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을 바라보시고,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성경 주석자이시고 기도와 말씀의 사람이신 박윤선 목사님을 바라보시면서, 귀중한 책임을 수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일곱 분들이 우리들에게 물려주신 십자가의 영성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영성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첫째는 맨날 울면서 죄악을 자복하신 “회개의 영성” 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자신을 부인하고 낮추신 “온유와 겸손의 영성” 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십자가의 주님을 따라서 가난과 고난을 몸에 지니고 기뻐하신 “가난과 고난의 영성” 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몸에 지니고 모두를 따뜻하게 품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영성” 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는 모두와 친밀하고 따뜻하게 교제하는 “화해와 평화의 영성” 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너무 어려운 이 때에 여러분들께서 한국교회의 교단들과 단체들의 지도자들로 세우심을 받게 된 것을 축하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시고 믿음의 증인들을 바라보시면서 귀중한 책임을 수행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고 한국교회에 소망의 빛을 비추시는 귀중한 지도자들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둘째로, 스콜라 신학의 형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콜라 신학은 도시에서 떨어진 수도원 학교(Monastic School)와 도시 중심에서 일어난 교구 학교(Cathedral School) 그리고 대학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계시적 진리를 철학적 방법으로 이해하려는 신학입니다. 이런 신학 운동이 학교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학교 신학” 즉 “스콜라 신학”(Scholasticism)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콜라 신학은 우주의 본질을 논하는 데서부터, 즉 보편적 실재와 개체의 실재와의 관계를 논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관계에 대한 입장에 따라 3가지로 분류되었습니다. 1) “참으로 실재하는 것은 보편적 실재이고, 개체는 참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실재론자들”(안셂 등)과 2) “보편적 실재와 개체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존재한다.” 라고 주장하는 “온건한 실재론자들”(토마스 아퀴나스 등)과 3)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개체뿐이며 보편적 실재는 참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유명론자들”(윌리암 옥캄 등)이 있었습니다.
“안셂(Anselm,1033-1109)의 스콜라 신학”은 이태리 출신으로 캔터베리의 주교로 활동하던 안셂에서 발달되었는데, 안셂의 신학의 특징은 어거스틴과 같이 믿음의 우위를 강조했습니다. “믿으려고 하지 않는 자는 이해할 수 없다. 믿으려고 하지 않는 자는 체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안셂은 믿음의 우위를 강조하지만 믿음 그 자체로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즉 이성의 작용을 통한 이해의 추구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신학사적으로 유명한 말인 “Credo ut intelligam.” “I believe that I may understand.”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 것이지 믿기 위해서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안셂이 추구하는 완전한 앎이 있기 전에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있어야 하며 신비적 열정으로 하나님을 보기를 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비지오 데이(Visio dei) 즉 “하나님을 봄”를 주장했습니다. 한편 그는 믿음을 이해하려고 하다가 이성의 한계성을 느끼고 이성 자체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어거스틴과 같은 입장). 안셂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믿음에서 모든 것을 시작했고 그리고 믿음의 이해를 추구했습니다. 안셂의 유명한 신학적인 공헌의 저서 중에 하나는 그의 속죄론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나」(Cur Deus Homo)입니다. 이 저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이다. (2) 인간에 대한 처벌이 가해지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만족이 채워지지 않고 죄가 사해진다는 것도 합당치 않은 일이다. (3)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 없다. 그 대가는 하나님만 치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이다. 피조물을 사랑하는 사랑의 동기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완전히 일치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죄에 빠져 있는 인간을 대신해서 대가를 치르셨다.
그 다음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74)의 스콜라 신학”을 살펴봅니다. 중세 카톨릭 신학의 가장 유능한 대변자요 13세기에 스콜라 신학을 가장 크게 발전시킨 신학자는 이태리 출신 도미니칸 수도승 토마스 아퀴나스였습니다. 그의 신학적 과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카톨릭 교회의 신학을 통일 종합한 것이었습니다. 프란시스칸(Franciscan)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를 회의적으로 보았고 도미니칸(Dominican)은 긍정적으로 보았는데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존경하며 그를 “그 철학자”로 불렀습니다. 그의 모든 신학의 연구의 목적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와 하나님을 알고 인간의 기원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방법을 사용해서 그의 신학을 정립시켰습니다. 그는 자연계를 분석하는 단순한 논리적 작업에 의해 우주의 제일 원인인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성의 유추로부터 하나님의 공의, 자비, 합리성, 도덕성 등을 서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자연적 이성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성과 계시로서 얻는데 이성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계시의 보조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계시는 성서에 있고 성서는 유일한 궁극적인 권위이다. 이성으로서는 계시의 진리를 다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성과 계시가 반대되지 않는다. 철학과 신학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여기서 아퀴나스 신학의 특징들을 지적해봅니다 (1) 신론에 대해서: 신은 우주의 제일 원인이며 완전한 존재자이시다. 만물의 근원이며 끝이며 완전한 선(Good)이시다. (2) 인간론에 대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연적인 힘을 주시고 그 외에 기독교의 삼대 덕목인 믿음, 소망,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은사를 첨가해 주셨다. 아담은 이 은사를 죄로서 상실했고 자연적인 능력마저 부패 시켰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아직도 극기, 용기, 정의, 지혜 또는 신중 등 4대 자연적인 미덕을 실천할 능력은 있으나 하나님을 볼 수는 없게 되었다. (3) 구원론에 대해서: 인간의 회복은 은혜에서만 가능한데 여기서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고 죄가 용서되고 기독교의 삼대 미덕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업적은 인간의 죄에 대한 만족을 베풀었고, 상 받을 만한 여유까지 생겼다. 그리고 그의 업적은 인간이 서로 사랑하도록 감동시키기도 한다. (4) 성례에 대해서: 은혜는 성례전을 통해서 온다. 세례를 받는 자는 새로 탄생되어 원죄와 과거의 죄는 용서받지만 죄의 소질은 없어지지 않고 인간이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받는다. 성만찬의 화체설은 1215년 제 4차 라테란 회의에서 완전한 교리로 인정 되었는데 토마스는 이것을 더 명확히 설명하였다. 주례자가 기도하면 성만찬의 모양과 맛은 변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질은 변하여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세례를 받은 이후에 지은 죄를 위하여서는 반드시 참회를 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참회의 4가지 요소를 지적하였다. 뉘우침, 자복, 고행을 통한 만족 그리고 사죄 선언이 있어야 한다. (5) 교회론에 대해서: 제도적인 교회를 강조하며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제도적 교회에 들어와야 한다. 가시적인 교회의 중요성과 교황의 무오설을 믿었다.
우리는 여기서 스콜라 신학 특히 아퀴나스 신학의 특성을 지적해보고자 합니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바로 아는데 있어서 계시와 믿음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지만 자연과 이성의 역할이 함께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성과 계시로서 얻는데 이성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계시의 보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연과 이성의 역할이 함께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이성과 계시가 반대되지 않는다. 철학과 신학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결국 카톨릭 천주교회는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자연주의 신학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도적인 교회와 제도적인 성례의 절대성을 강조하며 카톨릭 교회의 절대성을 주장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반하여 개신교 신학은 “Sola Scriptura” “Sola Gratia” “Sola Fide”를 강조하면서 즉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이성의 역할을 약화시켰고, 성서만을 강조하면서 자연의 역할을 약화시켰고, 은혜만을 강조하면서 행함의 역할을 약화시켰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도적 교회의 절대성을 비판하면서 개 교회주의적인 교회의 분열과 무교회주의까지 초래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개신교의 특징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개신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신학사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아이스레벤에서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엄격한 종교 교육을 부모로부터 받았고 에르푸르트 대학에 재학하는 동안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양심적이고 부지런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엄한 가정 교육과 엄한 학교 교육과 미신사상과 카톨릭교회의 엄한 가르침 등으로 인해 깊은 죄 의식과 함께 공포에 사로 잡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514년(혹은 1513년) 가을 어느 날 루터는 비텐베르그 어거스틴 수도원 탑속 서재에서 소위 “탑 속의 체험”이라고 불리는 복음적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22편을 읽고 있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루터는 자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그려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시편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묘사한 글이었음을 생각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어째서?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나 자신이 버림을 당하는 것은 얼마든지 타당한 일이다. 나는 약하고 불순하고 불 경건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약하지도 불순하지도 불 경건하지도 않으신데…. 어째서? 어째서?” 다음 순간 루터는 벼락에 맞은 듯한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 루터 대신, 그리스도가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끊어버림을 당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가 내 대신, 죄를 담당하시고 나 대신 죄가 되셨다!” 루터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제는 더 이상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가득 찬 구주의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신 구주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도 전혀 새로워졌습니다.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성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어지는 선물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또한 로마서를 읽으며(1515년 또는 1516년) 하나님의 공의와 칭의와의 관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기를 그렇게도 소원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말을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셔서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것으로만 이해했다. 그리고 죄인인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공의로우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미워했고 불평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나는 밤낮 묵상하면서 그 뜻을 이해하기를 원했다. 드디어 ‘하나님의 공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란 말을 연결시킴으로 그 뜻을 깨닫게 되었다. 이 ‘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의’인 것을 깨달았다. 이 진리를 깨달았을 때 나는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마치 천국의 문이 열려서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이제 모든 성경은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었다. 전에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나의 마음 속에 미움으로 가득 채웠으나 이제는 너무나 달콤한 사랑으로 채워준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이 나에게 천국으로 가는 문이 되었다.” 성경 말씀과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확신은 슈타우피츠나 버나드나 스콜라주의자들이나 신비가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구원의 빛을 루터에게 비쳐 주었습니다. 루터는 성경과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기독교의 핵심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이제 Sola Scriptura, Sola Gratia, Sola Fide의 모토를 내세우고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Bainton, Here I Stand, pp.60-67).
루터가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루터가 그 당시 중세 교회의 사치와 탐욕과 무지를 통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복음 진리를 체험한 후에도 비텐베르그의 수도원과 대학과 교구에서 연구, 저술, 교수 및 설교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1517년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들어야 할 기회가 왔습니다. 자기 교구의 양떼들이 면죄부를 얻기 위해 성밖으로 몰래 빠져 나가는 것을 목격했을 때 루터는 이를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면죄부 제도가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십자군 때부터였습니다.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이교도들과 싸우며 생명을 내건 사람들에게 면죄의 특혜를 베풀기 시작했고, 후에는 성지 탈환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기부금을 바치는 사람들에게까지 같은 혜택을 부여했습니다. 중세교회는 성당, 수도원, 병원들의 건축을 위해 기부금을 바치는 사람들에게까지 면죄부를 배부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브란덴부르그의 알버트 감독은 교황 레오 10세에게 갚을 돈을 벌기 위해 도미니칸 교단의 수사이며 웅변가인 텟젤로 하여금 비텐베르그 성밖에서 면죄부를 팔게 했습니다. 교황의 권위를 나타내 보이는 십자가와 교황의 면죄부 교서를 군중들 앞에 높이 내세우고 텟젤은 웅변조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여러분들, 들으시오. 하나님과 성 베드로가 여러분들을 부르십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의 구원과 세상을 떠난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모두 지금 성 베드로의 교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가장 거룩한 십자가를 방문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의 유혹과 위험 가운데서 맹렬한 시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앞으로 여러분들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게 될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죄를 슬퍼하고 죄를 고백하고 그리고 기부금을 바친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죄의 사함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죽은 친척들과 친구들이 여러분들을 향해 애원하며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오. 우리는 무서운 고통 중에 빠져 있는데 당신들은 적은 돈으로 우리들을 건져낼 수 있지 않소.’ 여러분들은 저들을 건져내기를 원치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귀를 여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애원하며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가 너희들을 낳고, 양육하고 기르고 재산까지 남겨 주었는데 너희들은 어찌 그렇게도 잔인하고 인색해서 조그만 돈을 내어 우리들을 건져 내려고도 하지 않느냐?’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들의 부모들을 구해낼 수가 있습니다. 동전이 부모들을 구해낼 수가 있습니다. 동전이 궤 속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영혼이 연옥에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저들의 영혼을 낙원으로 인도하기를 원치 않습니까?”  
루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1517년 만성절 전날 밤인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그의 성곽교회의 문에 95개 조항을 게시하고 이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를 원했습니다. 95개 조항의 주장들은 간결하고 대담했으며 절대적이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 성당 건축을 반대했습니다. 둘째로, 교황이 연옥을 다스릴 수 있다는 주장을 반대했습니다. 셋째로, 면죄부 제도의 해로움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교리와 맞지 않는다. 면죄부는 가장 악독한 제도이다. 방종하게 만들고 결국 구원을 해치기 때문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 안에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부르짖어야 하는데 면죄부는 이것을 파괴한다.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죄의 공포로 불타야 한다. 이것이 연옥의 고통이다. 연옥이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연옥의 고통을 경험할 수 있음을 나는 안다. 이와 같은 고통으로부터 구원이 시작된다. 자신이 완전히 끊어버림을 당했다고 믿을 때 구원의 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믿음을 통해서 평화가 임한다. 이와 같은 경험이 없는 자는 비록 교황으로부터 백만번 사함을 받을 지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성경 말씀(Sola Scriptura)과 십자가의 그리스도(sola Christus)가 있었고 그리고 은혜(Sola Gratia)와 믿음(Sola Fide)이 있었습니다. 중세의 카톨릭교회가 구원과 은혜의 방편으로 성례 제도와 면죄부 제도를 내 세운데 비해, 루터는 “탑 속의 체험” 이라고 불리는 복음적 체험을 한 후부터 루터는 성경이 구원과 은혜에 이르는 유일한 문이요 열쇠임을 강조했습니다. 루터는 또한 성경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성경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성경 전체는 비록 겉으로는 달리 보일 찌라도 그 속 뜻을 헤쳐 본다면 오직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그의 「시편 강해(1513-1515)」에서 “나는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박히심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1517년 「일곱 고백의 시편」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그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내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덜 발견하게 될 때 나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더 많이 발견하게 될 때 나는 결코 빈곤해 지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을 아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을 알기를 원하시지도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 중심적 성서관이야 말로 루터의 특징적 성서관이라고 하겠습니다.
루터는 카톨릭 교회의 인위적 성경 해석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올바른 성경 해석은 인간의 이성이나 전통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문을 여시고 그 뜻을 설명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 뜻을 깨달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성령의 조명이 없을 때 성경은 어두움에 쌓인 닫혀진 책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하나님의 계시를 소유하는 것 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계시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지나친 내적 조명과 직접 계시를 내 세웠던 과격파들의 성경 해석에 반해서 어거스틴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전통적 성경 해석 방법을 적용하며 역사적 및 예표적 성경 해석을 채택했습니다.
둘째로 (지면상 관계로 그 외의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의 특징들을 다루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하며 여기서는) 칼빈을 위시한 쯔윙글리와 낙스가 체계화한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의 특징들을 칼빈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신학이란 첫째로 “하나님 중심적 신학”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칼빈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Soli Deo Gloria) 두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종’하고, 모든 ‘선한’ 것을 추구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 위에 높이 앉으셔서 시간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절대자였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참된 위로와 평안과 행복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과 ‘예정’을 믿고 신뢰하는데 있었습니다. 성도의 위로는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가 만사를 그의 능력으로 붙잡고 그의 권위와 의지로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통치하기 때문에 그의 결정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음을 아는데 있었습니다.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신학이란 둘째로 “성경 중심적 신학”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칼빈은 성경이 창조주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안내자와 교사이며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생활의 법칙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을 통해서만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참으로 사랑하는 제자가 되지 않고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교리의 조그마한 부분도 맛볼 수 없습니다. 성경 없이는 모두 오류에 빠집니다. 우리가 말씀에서 떠나면 이미 바른 길에서 벗어났으므로 우리는 결코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없게 됩니다.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신학이란 셋째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터와 같이 칼빈도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요컨대 전체 성경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아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율법과 선지서들을 철저하게 조사한다면 그는 거기서 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않는 말은 단 한마디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을 읽는 우리의 최대의 목표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칼빈의 성경관은 성령과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이 본래적 기능을 나타내려면 반드시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은 성령과 더불어 역사하고 성령은 성경과 더불어 역사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 안에서 자신을 증거하시는 것처럼 말씀이 성령의 조명에 의해 인쳐질 때 비로서 말씀이 사람의 가슴 속에 받아 드려진다” “성경은 그것의 확실성이 성령의 내적인 설득에 기초하고 있을 때에만 구원에 이르는 신지식을 채워줄 것이다.”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신학이란 넷째로 “교회 중심적 신학”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칼빈은 오직 하나님의 안목에만 나타나는 “불가견적인 교회”가 완전한 교회라고 하며 “가견적인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지상교회에 대한 사랑과 애착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키프리안의 교회관을 따르면서 교회를 어머니로 비교했습니다. 어머니 되신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신령한 생활을 할 수 없고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나 사죄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실시되는 교회를 떠나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교회는 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해서 부단히 개혁되어가는 과도기적인 존재입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직분을 목사, 장로, 교사로 구분하였습니다. 이러한 직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왕권을 교회 안에 행사하시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 직분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신학이란 다섯째로 “기도와 경건 중심적 신학”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칼빈은 루터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 개혁자들과 함께 기도와 경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이를 실천한 기도와 경건의 사람이었습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기도의 필요성과 특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기도의 은총으로 우리는 하늘의 보화를 얻는다. 기도를 통해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는데 하늘 보좌에 들어가 하나님께 간구하므로 믿음의 내용들이 헛된 것이 아님을 실제로 체험하게 된다. 즉 우리는 복음에 의해 제시되었고 믿음의 눈이 바라보았던 보화들을 기도로 파내어 얻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의 섭리가 나타나 우리를 보살피시며 그의 능력이 나타나 우리를 붙드시며 그의 선하심이 나타나 우리를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기독교강요」, III, 20,2). 칼빈은 결국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신학이란 여섯째로 “문화 변혁주의적 삶의 신학”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공허한 사색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였던 실제적 삶을 위한 신학이었습니다. 칼빈은 그의 신학을 먼저는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 속에 그리고 교회와 사회의 모든 영역에 실현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 얻은 성도들의 구세주일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요 또한 정치 영역에서는 왕이셨습니다. 칼빈은 문화 변혁적인 개혁운동을 통하여 제네바 교회를 사도시대 이후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의 학교가 되게 하려고 하였고 제네바 시를 교회사상 가장 신성했던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제 주어진 주제인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와 바람직한 관계”가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요약해보려고 합니다. 카톨릭 천주교의 특징은 수도원적인 금욕주의인데 수도원 제도의 지고선인 “하나님을 닮고 보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난”과 “고난”과 “순결”과 “복종”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중세 수도원 제도의 금욕주의를 신학적으로 비판할 수도 있으나 현대의 자유분방한 세속주의적인 유행과 값싼 은혜에 치우치고 있는 개신교회가 본받아야 하고 지녀야 할 덕목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톨릭 천주교회는 자기 부정의 금욕주의적인 전통을 귀중하게 받아드리면서도 너무 인간의 고행에 치우치지 말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를 전적으로 바라보고 사모하고 의지하려는 은혜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카톨릭 천주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스콜라 신학인데 아퀴나스의 스콜라 신학은 계시와 믿음의 우위를 지적하면서도 자연과 이성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제도적인 교회와 제도적인 성례의 절대성을 강조했습니다. 자연과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며 제도적인 교회와 성례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스콜라신학을 신학적으로 비판할 수도 있으나 지나치게 “믿음만” “은혜만”을 강조하며 개 교회주의와 분열과 분파로 치우치고 있는 개신교회가 긍정적으로 참고하여야 할 요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자연과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비추어 볼 때 잘못이 아니라고 봅니다. 사실 개신교가 자연의 귀중성을 약화시킨 잘못을 범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뿐 아니라 모든 자연 만물이 결국에 가서는 모두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제도적인 교회와 제도적인 성례의 귀중성을 인정하고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카톨릭 천주교는 자연과 이성의 역할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대신 계시와 믿음의 우위를 더욱 강조하고 제도적인 교회와 성례를 귀중하게 여기되 절대화하지 말고 특히 교황의 무오설을 내려놓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거스틴과 프랜시스와 루터와 칼빈와 웨슬레를 비롯한 우리들 모두는 잘못과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결국 우리들은 우리들의 위선과 교만의 죄를 통회 자복하면서 이 땅 곳곳에 우리들의 기독교나 교파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세워지게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면서 제물 되는 삶을 살고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의 죄 고백을 인용하면서 발표를 마무리 합니다.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어거스틴). “나는 작은 벌레입니다”(프랜시스). “나는 버림받을 죄인입니다”(루터).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칼빈). “나는 눈 멀고 병 들고 연약한 죄인입니다”(웨슬레).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길선주).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이기풍).





이윤재 목사 미래목회포럼의 대표회장 취임예배 축사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염원하며” 한국교회개혁과갱신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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