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심심찮게 ‘영어공용화론’이 등장하더니 마침내 서울시에서 영어를 상용화하는 안을 노골적으로 내놓았습니다. 참으로 쓰기 좋은 제 나라 말도 제대로 못 쓰면서 별 것 아닌 영어실력으로 자신의 지성을 교묘히 분칠하며 꺼덕꺼덕 행세하던 시대가 이제 겨우 지나가는가 했더니 청천하늘에 날벼락입니다.
KTF적인 생각?
신세대 댄스 가수들이 내놓는 노래의 제목이 아예 영어로 되어 있거나 노랫말 속에 영어 문장 한두 개쯤은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나라, 대기업의 공식 이름은 물론 길거리 간판들까지 아예 영어로 도배되기 시작한 나라, TV 방송국의 각종 프로그램 제목이나 부제의 거의 대부분이 영어로 표기되는 나라에 어쩔 수 없이 눌러 사는 백성으로서 영어상용화론 보도기사 앞에서 약소국가 약소민족의 서러움을 어쩔 수 없이 곱씹게 됩니다. 가끔 TV방송국의 아나운서들이 ‘바른 말 고운 말’에 대해 스스로 우리말 전문가 행세하며 한 마디씩 훈수(?)하고는 돌아서자마자 영어로 떡칠한 말을 쓸 때마다 쓴웃음이 나오곤 했는데, 이젠 아예 우리나라의 첫 도성 서울에서 영어를 상용화하여 모든 공문서를 영어로 작성하고, 영어 능력이 뛰어난 공무원을 우대하며, 서울 지경 안에 이른 바 ‘잉글리시 빌리지’를 만들어 국가경쟁력을 높이겠다 합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대화를 다 영어로 하고 돈도 아예 달러만 쓰도록 하겠답니다. 우국충정이 서리 서리 배어 있는 참으로 감격스런(?) 제안입니다.
일례로, 우리 한국의 대표적인 통신망회사인 한국통신의 이름을 세계화 추세에 맞추어 ‘KTF’로 바꾼 것까지 굳이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만 한동안 떠들썩했던 한국통신의 선전 문구 “KTF적인 생각”이라는 기괴한 문구는 도무지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방송에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혼자 민망스러워했습니다. 하긴,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부끄러워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3개국어를 섞어 쓸 수 있는 뛰어난 재간을 지닌 민족은 지구촌에 우리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글 전용 캠페인’이라는 낯뜨거운 구호가 거의 본능적으로(?) 나올 수 있는 나라도 아마 우리나라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영어가 경쟁력이다?
‘우골탑’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자식 사랑이라면 못할 일이 없는 기러기 부모들이 넘쳐 나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자식사랑’이 아니라 ‘자식경쟁력 경쟁’이라고 하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입니다. 학력이 사람의 가치를 재는 거의 유일한 기준이 되어버린 나라가 되어버린 탓에 많은 사람들이 거의 평생을 입시 지옥에서 살아갑니다. 학생 시절에는 자신들의 입시지옥에서 살고, 부모가 되어서는 자식들의 입시지옥에서 허리 빠지고 갈비 휘게 허우적대며 헤어나지 못하다가 그렇게 그렇게 삶을 마감합니다. 이런 현상이 오죽 심하면 학력을 ‘재벌’과 비슷하게 ‘학벌’로까지 적게 되었을까요.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가 나올 만큼 사회의 기본구성인자인 가정의 뼈대를 깨 가면서까지 자식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고독을 참으며 눈물겹게 헌신하지만, 들려오느니, 야식으로 챙겨 놓은 김밥 몇 조각 때문에 자식이 그 아비를 난도질하여 죽였다는 슬프고 두려운 소식들뿐입니다.
친미성향이 유난히 강한 나라이다 보니 많은 이들이 ‘영어’가 경쟁력이라고 순진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영어능력이 곧 그 사람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생각, 얼마나 단세포적이고 순진한 것인지 모릅니다. 영어로 일을 해야하는 어떤 이들에게는 영어능력이 경쟁력일 수 있겠으나, 모든 한국사람들이 다 영어로 일을 하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욕먹을 각오하고 제가 함부로 ‘단세포적’이라고 잘라 말하는 것입니다.
공수특전단에서 군 복무하던 중에 부대 내 선발시험을 거쳐 영어를 전공한 동기생 친구와 둘이서 오키나와 주둔 미 해병대 요원들과 잠시 생활한 적도 있고, 부대원들이 낙하산을 탈 때 비행기 유도장교의 직임을 맡아 시누크 헬기를 몰고온 미군 조종사와 얼굴을 마주 대한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통역장교’라고 하기에는 좀 뭐하지만 여하튼 한국군과 미군 사이에서 통역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낯뜨거움을 겨우 면할 수준의 영어 독해 능력만 좀 있었을 뿐, 대학시절 영어회화의 ‘히읗’자도 몰랐던 사람이 선발시험을 용케 통과한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런 사람이 그럭저럭 맡겨진 일을 별 탈 없이 감당해 냈던 것도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영자 신문을 들고 다니던 우리 두 사람의 한국군 장교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곤 하던 흑인 병사들의 눈빛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 중에 상당수가 까막눈이었습니다. 영어로 말은 곧잘 하지만, 영어로 된 문서는 단 한 줄도 읽을 줄 모르는 처지이다 보니 자기나라 말로 되어 있는 신문을 들고 다니는 꼬마둥이(덩치큰 미군들에게는 저희들이 꼬마로 보였을 것입니다.) 한국군 장교를 이상하게 보는 것도 당연했을 터입니다. 헤어지던 날 백인 미군장교가 제 영어 수준에 대해 “당신 영어는 아주 고급이다. 사용하는 낱말이 그렇고 구문구조가 그렇다”고 친절하게 논평해 주던 말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효율적인 회화를 잘 못한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겠지만, 그 친구의 따스한 표정 탓에 속없이 그런 논평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언젠가 친구와 함께 영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미국에서는 지하철역 근처의 노숙자나 거지도 영어를 쓴다”는 얘기를 하며 둘이 한참을 웃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국에서는 거지도 영어로 구걸을 합니다. 영어가 경쟁력이라는 말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영어(회화) 능력은 경쟁력의 극히 일부일 뿐,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 또한 옳습니다. 영어가 경쟁력이라면 영어로 구걸하는 거지는 단 한 명도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어는 민족혼을 담는 도구
모든 언어는 형식(기호)과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곧 어떤 내용을 일정한 기호에 담기로 한 사회적인 약속이 바로 언어입니다. 한국어는 우리끼리 한 약속이고 영어는 미국사람들끼리 한 약속입니다. 형식과 내용을 완전히 구별하여 말하기는 어렵지만, 언어가 언어이기 위해서는 형식 못지 않게 내용도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성급한 영어공용화론이나 영어상용화론은 바로 이 점을 오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언어의 형식과 내용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형식을 바꾸는 것은 곧 그 내용까지 바꾸는 두려운 결과를 부를 수도 있다는 점을 가볍게 생각한 까닭입니다. 별 것 아닌 인사말에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어라는 형식에는 한국인의 정신이라는 내용이 담기게 되고 영어에는 미국(혹은 영국)인의 정신이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일년 내내 흐린 날씨, 쨍하고 해뜨는 날이 겨우 50일 안팎인 영국 같은 나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인사말에 날씨에 대한 관심을 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Good morning[afternoon/evening/night]!” 식의 인사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 대신, 지지리도 못 살던 우리 민족은 늘 끼니를 어떻게 잇느냐가 시급한 관심사였기 때문에 “진지 잡수셨습니까?”로 서로를 향한 애정과 관심을 나누었습니다. 신군부 독재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때에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는 서늘한 인사말이 쓰이기도 했습니다. 밤새 삼청교육대로 끌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은 고통의 시절을 이 악물고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사말 하나에도 그 민족의 삶과 역사가 녹아나는 법인데, 언제부터인지 ‘Good morning’이라는 말을 직역하여 “좋은 아침!”으로 인사하는 묘한 습성이 생긴 것을 보면서 그런 인사말을 듣는 아침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뒤늦게 이런 주장을 하는 저를 세계화의 추세를 모르는 사람, 골통 국수주의자로 몰아붙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차피 제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한국의 역사가 제 삶 구석구석에 배어 있으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국인 작가인 저는 한국인의 삶을 살며 우리말과 우리 글로 작품을 쓰다가 세상을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어에는 영국인(미국인)의 혼이 담겨 있고, 우리 국어에는 우리의 민족혼과 역사가 담겨 있다는 최소한의 상식이라도 갖고 있다면 우리 고위 공직자들의 입에서 “영어를 공용화(상용화)하자”는 쓸개 빠진 소리는 함부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영어를 잘한다?
“영어를 잘한다”는 말과 “한국어를 잘한다”는 말이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쉽게 알려면, 어떤 경우에 우리말을 잘한다고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될 것입니다. 태어나서 네댓 살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말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이른 바 ‘회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쓰기 시작한 한국어로 평생 의사를 소통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말 회화 능력이 있다하여 그것만으로 “우리말을 잘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말하기 외에도 듣기 쓰기 읽기 등과 같은 영역이 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우리들이 “저 사람, 말을 참 잘한다”고 하는지 잘 생각해 보면,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해질 것입니다. 참 이상하게도 영어에 관한 한 많은 사람들이 ‘회화 능력’만을 그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외국인 구매자들을 늘 상대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빼 놓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어민을 만나 대화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데도 줄기차게 회화능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처럼, 외국에 나갈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사람, 그렇지만 영어권 서적을 많이 읽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회화 능력보다 독해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한데도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언어가 형식과 내용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것이라면 아무리 눈부신 틀을 갖추고 있어도 그 속에 담아낼 내용이 빈약하면 언어의 고급소비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모든 사람들을 다 “말 잘한다”고 하지 않듯이 영어 회화 능력이 좀 있다하여 그 사람더러 “영어 잘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미국에서는 거지들도 영어로 구걸을 하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틀을 이용할 줄 아는 능력에 걸맞게 그 틀 속에 담아낼 사상이 풍부하지 못하면 수준급 언어능력을 가졌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국어 보호법을 먼저 제정해야
확인해본 바는 아니지만 프랑스에는 ‘모국어 보호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불어가 아닌 외국어를 사용하다 적발되면 교통범칙금을 내듯이 벌금을 내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불어를 못하면 바지에 똥 싸기 쉽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같은 셈 계통 언어여서 그다지 힘 안들이고도 다중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데도, 영어로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으면 말을 알아들으면서도 영어로 답을 해 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때는 같은 셈 계통 언어를 쓰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이런 프랑스를 고까운 시선으로 본 적도 있지만 오늘날은 ‘모국어 보존’에 관한 한 눈부신 부러움의 대상이 된 나라가 바로 프랑스입니다.
(세계화가 바람직하냐 하는 문제는 논외로 치더라도,) 세계화의 추세에 일부러 뒤떨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이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쓰는 엄청난 시간과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생각해 볼 때마다 어김없이 쓰려 오는 속을 어쩔 수 없습니다. 쓰기 좋고 듣기 좋은 우리말, 우리 식의 감칠맛 나는 표현이 어엿이 있음에도, 예컨대 영어의 ‘cannot～ too～’ 구문을 직역하여 ‘～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식의 껄끄럽고 어색한 외국어 구문을 굳이 쓰고 싶어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처럼 비굴한 자세가 국가경쟁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영어가 경쟁력이라는 말이 실감날 만큼 영어 능력이 중요한 일을 하는 이들은 목숨 걸고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국민이 다 영어를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영어를 공부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써먹지도 않을 영어를 공부하느라 허비하는 시간에 자신의 은사와 재능에 맞는 자기만의 일을 준비하는 일에 더 정열을 기울이는 나라, 그러고도 영어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원찮은 영어능력 때문에 주눅들 필요가 없는 나라가 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경쟁력을 진정으로 높이는 효율적일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국력이 강해지면서 중국어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국력이 강해지면서 세계 각국의 대학에 한국어과를 설치하는 대학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길거리에 빼곡이 들어찬 콩글리쉬 간판과 광고문구에 어지러이 널려 있는 국적불명의 쓰레기 같은 언어들, 그 속에서 아무도 몰래 질식해 가는 우리 말, 반만년 우리 민족의 고상한 넋을 보존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면, 언어사대주의에 빠져 영어상용화론을 함부로 말하기 보다 ‘모국어 보호법’을 서둘러 제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일부 정신나간(?) 미국(영국) 사람들의 입에서, “워싱턴이나 런던에서만이라도 한국어를 상용화하고, Korean Village를 만들어 거기서는 한국어만 사용하고 한국 돈만 사용하도록 하여 국가경쟁력을 높이자”는 주장이 나오는 꿈같은 날을 속없이 헤아려 봅니다. (2004. 4. 26.)
글 : 이광우(전주열린문교회 담임목사/수필가/시인/한국누가회(CMF) 학원사역 간사/ 전북학복협 공동대표/전북기독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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