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열린문교회 담임목사. 시인. 수필가. 생명평화전북기독인연대 공동대표. 전북학복협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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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믹스앤매치> 2004년 봄호 칼럼 원고, 총선 3개월 전인 지난 1월말에 쓴 글, 제 17대 총선을 하루 앞두고 이 곳에 올립니다.
'덜 나쁜 세상' 만들기
작년 말, 남북나눔운동 모니터링 작업 차 평양 가는 길에 둘러본 중국. 베이징과 심양 등 중국 주요 도시 곳곳에 세워진 아주 친숙한 한국 대기업들의 간판을 반가움 반, 서글픔 반의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값싼 땅값, 값싼 인건비 때문에 우리 대기업들이 앞장서서 차츰 중국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안타깝고 두려운 흐름의 이면에는 "그동안 지나치게 과격해진 노동운동도 한 몫 단단히 했다"는 손쉬운 평가도 있긴 하지만, 오랜 세월 쉬쉬해 오다 최근 그 실체가 드러난 불법정치자금의 엄청난 규모로 미루어 볼 때, 그런 평가는 자칫 정당한 노동운동을 크게 위축시키고 대기업들의 불의한 정경유착의 굳은 고리를 은근히 강화시킬 위험이 있어 아주 조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정치(政治)라는 말의 '정(政)'자는 '글(文)을 바르게(正)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글'은, '법'과 '원칙'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정치'는 '바른 법과 사사로움 없는 원칙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정치'의 이러한 본 뜻을 생각할 때 그것은 백성을 '다스린다'기보다는 '섬기는 것'이라야 맞습니다. 그러나, 지난번 대선에서 있었던 한나라당의 불법정치자금 차떼기 모금 사건, 민생을 돕는 법안들에 대해서는 유난히 싸늘한 시선을 지닌 현역의원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기득권과 관련된 아주 사소한 사안을 다루는 과정에서는 누가 뭐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똘똘 뭉쳐 젖먹이 뺨치게 유치한 짓을 해 놓고도 양심에 화인 맞은 듯 언론사 기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히죽거리는 낯두꺼운 모습 등을 지켜보면서, 전세금 몇 백만 원에 한 가족이 죽고 사는 아픔을 나날이 겪는 소시민들은 정말 억장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래 그런지, 삼권분립의 엄연한 한 축으로 민의를 대변하는 소중한 기구인 "국회를 아예 해산해 버리자"는 소리도 들려 옵니다. 그 뿐입니까. "정치인들을 모조리 쓸어다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에 빠뜨려 버리면 이 나라가 정말 살 맛 나게 될 것"이라는 무지막지한 말이 들려와도 "그건 아니라"고 손사래 쳐 막아줄 마음이 선뜻 생기지 않을 만큼 만성이 된 국민들의 '후천성 정치참여 결핍증'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비디오 매체가 눈부시게 발달하여 음악도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그 장르가 바뀐 후로, 가창력이 형편없어 생방송 공연무대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댄스가수들도 가수 대열에 합류하여 어엿이 활동하는 참 재미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 탓인지, 대선과 총선 때마다 정치 지망생들의 '이미지 관리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느낌입니다만, 정치조차 '쇼'가 되어 버린 탓에 안타깝게도 눈부시게 발전하는 이미지 관리 기술에 걸 맞는 정치개혁이나 정치 혁신의 흐름이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고민입니다. 비디오 시대의 정치지망생들 가운데 힘(?) 좀 있는 인사들은 아예 텔레비전 방송국에나 있음직한 '전담 분장사'를 고용하여 자신의 겉모습을 그야말로 '분 발라 꾸미는 일'에 정치 생명을 거는 듯 차마 웃지 못할 요상한 현상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공개토론회를 대비하여 전담 '화술' 강사를 고용하기도 하고, 양복과 넥타이까지 골라 주는 전담 코디를 채용하기도 하고, 공개토론회를 대비하여 치밀하게 사전 예행 연습을 몇 차례씩 하기도 합니다. 지난 번 대선 때는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보톡스인가 뭔가 하는 주름살 제거제를 사용하여 크게 효과를 보았다는 출처불명의 이야기가 나돌기도 하였고, 그 덕에 그런 성형시술 방법이 한동안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솔직히 인권변호사 출신 노무현 대통령의 인생 역정이 고스란히 반영된 듯한 그 소시민적인 깊은 주름살이 훨씬 더 매력적인데도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정치가 '연출'되는 시대이니, TV 브라운관에 나오는 배우들의 본 모습을 쉬 짐작하기 어렵듯이, 먹고살기 바쁜 유권자들이 그럴 듯하게 연출된 정치 지망생들의 숨겨진 '본질'을 꿰뚫어 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4월 15일로 예정된 총선을 앞둔 탓인지, 설 명절을 전후하여 느닷없이 양로원이나 유아원 혹은 달동네나 재래시장 쪽으로 향하는 정객들의 부산하게 '연출'된 발걸음이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옷매무새나 얼굴만 매만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아예 정치적 발걸음까지 '연출'하는 서글픈 시대를 사는 것 같아 명절의 기쁨이 한 순간에 달아나는 씁쓸함을 감출 길 없습니다. 어느 당 총재는 어느 양로원으로, 또 어느 당 대표는 어느 유아원으로 달려가서 카메라 앞에서 감쪽같이 연출된 화면과 사진을 만들어서 언론에 자기들의 '멋지게 분장된 이미지'를 흘리는 모습이 잦아지는 것을 보니 진짜 선거 철이 되긴 됐나 봅니다. 심지어 '어느 당의 대표가 설거지를 했다'는 기사까지 인터넷에 뜨기도 했는데, 암만해도 유권자들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속여넘길 수 있는 IQ 20 정도의 참새로 아직도 생각하는 것 같아, 그토록 따스하고 자상하게 연출된 화면과 사진을 보면서도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설 명절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은 며칠 전, 어느 대중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중에 텔레비전 뉴스 시간에 이렇게 연출된 화면이 나오자 어느 손님이 밥 먹던 숟가락을 식당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차마 입으로 옮기기 어려운 욕설과 함께 "소화가 안 된다"며 씩씩거리며 휑하니 나가버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벙어리가 말은 못해도 생각은 있다 듯이, 내놓고 뭐라 말은 안 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다 거기서 거긴가 보다' 했습니다. 보통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좀 그럴 듯하게 말하면 '여론'이라 하고 사이비 정치꾼들의 입에 발린 표현으로는 '천심'의 근간이 되는 '민심'이라 할 것입니다.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순간인들 민초들에게 중요치 않은 게 아니겠지만, 이번 4·15총선은 우리 민족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갈림길이 될 것을 많은 이들이 예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선과 맞물려서 한껏 불안하게 기우뚱거리는 국제정세를 생각해도 그렇고, 북핵문제와 남북통일, 동서갈등, 남남갈등과 같은 그 낱말조차 속히 사라져야할 우리네 속 쓰린 내부의 현안을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정치인들의 어두운 그림자를 미주알 고주알 말함으로써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한 표'를 행사했던 유권자의 책임을 나 몰라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 또한 불법 정치자금을 '차떼기'한 정치꾼들의 지저분한 행동 못지 않게 더럽고 무책임한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의 수준은 국민들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는 어떤 분의 냉철한 지적에 공감합니다. 그러기에 결국 오늘 우리 정치판의 어두움은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임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런 점에서, 다가오는 총선은 우리 민족사에 참으로 심각한 위기일 수도 있고 참으로 복된 '기회'일 수도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총선이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귀한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요즘처럼 정치판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러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많은 유권자들이 너무 오래 지친 나머지 '다 그게 그거'라거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식의 비관주의에 사로잡혀 너무 일찍 체념해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불한 민주화를 향한 많은 희생의 대가로, 과거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오늘 이만큼 뚜렷하게 드러나는 세상이 온 것임을 한 번 더 생각하여, 유권자들이 희망을 갖고 빠짐없이 '소중한 한 표'로 썩은 정치인들을 심판할 수만 있다면 우리 민족의 앞날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좋은 인물과 정당'이 없다면, '조금 덜 나쁜 인물과 정당'을 선택하는 지혜, '좋은 사회'를 당장에 만들기 어렵다면 '조금 덜 나쁜 세상'을 나날이 조금씩 만들어 가는 끈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것이, '더러운 유권자,' '무기력한 유권자'로 눌러 앉아 화풀이 술 한 잔에 썩은 정치인들을 향한 무책임한 욕설로 켕기는 마음을 하염없이 달램으로써 자기 의(義)를 손쉽게 얻으며 비겁하게 자위하기보다, 현실의 어두움에 용기 있게 책임을 나눠지는 '조금 덜 나쁜 유권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조금 덜 나쁜 사회'를 만들 책임은 아무래도 '조금 덜 나쁜 유권자들'의 몫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광우/ 전주열린문교회 담임목사·수필가·시인·전북학원복음화협의회 공동대표·생명평화전북기독인연대 공동대표·한국누가회(CMF) 학원사역 간사, 계간 《믹스앤매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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