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특전단에서 군 복무하던 시절, 해마다 ‘천리행군’이라는 야외훈련을 했습니다. 완전 무장한 채로 부대를 출발하여 5주 동안 산악을 누비고 돌아오는 대대단위 훈련으로서, 처음 4주 동안 보병부대를 상대로 침투훈련을 한 다음 마지막 1주 동안 야간 산악행군으로만 매일 60-70km씩 400km를 걸어 부대에 복귀하는 고강도 특수전술훈련입니다. 400km면 정확히 1,000리가 되기 때문에 ‘천리행군’이라 부르는 힘든 훈련인 까닭에, 평소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잘 단련된 특전단원들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천리행군이 끝나 부대로 복귀할 즈음이면 그야말로 파김치가 되어 여기저기서 부르튼 발 때문에 절름거리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절름거리는 모양도 제 각각이어서 마치 팔도 각설이패가 죄다 한 곳에 모인 듯 몹시 우스운 행렬이 되곤 합니다.
1978년 겨울, 우리 팀은 여단본부를 출발하여 강원도 철원 화천에서부터 시작하여 강원도의 거의 모든 지역을 통과하며 웅장한 태백산 줄거리를 동서로 여러 번 넘나드는 천리행군을 했습니다. 그 해 강원도 태백산 일대에 폭설이 유난히 자주 내려서 걸핏하면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힘겨운 야간산악행군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어느 날, 일몰 직후 초저녁부터 행군을 시작한 지 너댓 시간쯤 지나 흰눈이 수북히 쌓인 태백산 미시령 근처 산비탈을 지나칠 때였습니다. 그 무렵 태백산 산간 오지 여기저기에 한두 채씩 흩어져 있는 민가에 대한 철수 명령이 내린 탓에 민가나 민간인을 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는데 산비탈에 미처 철수하지 않은 어설프게 기운 외딴집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허옇게 산악을 덮은 눈 위로 보름에 가까운 자정을 넘긴 달빛은 면도날처럼 차갑게 쏟아지는데, 한밤중의 정적 때문이었는지 반쯤 언 눈 뭉치가 군화 발에 밟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습니다. 다 찌그러져 가는 오두막,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려니 지레 짐작하고 그 집 옆을 지나치는데 뜻밖에도 그 외딴집 방안에서 누군가가 요란하게 코를 골며 곤히 자는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무슨 사연으로 그 외로운 산골짝에 들어와 고단하게 사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그날 밤 그 초라한 집 안에서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속 편히 단잠을 자는 이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 팀장인 제 바로 뒤에 선 선임중사와 달빛 아래서 잠시 피곤한 눈빛을 교환하며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아, 남녘 땅 고향집에 계신 부모님과 동생들도 지금 이렇게 단잠을 자고 있겠지’하는 생각에, 당장 달려 가고싶어 미칠 것 같은 고향 생각을 간신히 진정시키던 깊은 밤 태백산 비탈의 눈 시린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설명절 연휴가 시작되어 벌써 귀성길 고속도로가 많이 막힌다는 소식이 들려 옵니다. 삶이 고달플수록 고향은 늘 이렇듯 단지 생각만으로도 우리에게 참으로 포근한 안식을 주는 어머니의 가슴 아버지의 등허리와 같은 곳입니다. 꿈속에서조차 마냥 서성거리기만 하던 고향 뜰에서, 가슴에 흰눈처럼 수북히 쌓인 그리움을 따스하게 녹여내며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시 지긋이 보듬어보는 복된 설 명절 되시기를 바랍니다. (2005. 2. 7.)
* CBS 라디오 에세이 방송 원고
* 이광우 목사의 CBS 라디오 에세이 : 매주 월요일 밤 11:55, FM 103.7 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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