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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19] 나를 만드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며 (히 12:1,2) - 광주 호산나교회


저는 2008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 지난 12년 동안 주일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제가 7년 전인 2012년 3월 25일 광주 호산나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5번 예배 드리면서 5번 설교를 했고, 그 다음 2012년 11월 11일 주일 두 번째로 와서 오전과 오후 2번 예배 드리면서 2번 설교를 했고, 2018년 12월 16일 주일 여기 세 번째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주님 사랑과 영혼 사랑”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20년 1월 19일 주일 네 번째로 와서 “나를 만드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며” 라는 제목으로 간증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김규현 목사님이 “신앙의 선배님들”에 대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한 말씀 드립니다. 제가 이 설교를 석 달 전에 정성껏 준비해서 10월 27일에 제 홈페이지 말씀,컬럼에 올렸는데 설교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크리스천투데이의 이대웅 기자에게 전화를 걸고 내가 “나를 만드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며” 라는 제목으로 설교 원고를 썼는데 사용해도 된다고 했더니 즉시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냈더니 10월 27일에 크리스천투데이에 “나를 만드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며” 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고 11월 3일에는 설교 원고의 후반부인 “박윤선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제가 석 달 전에 정성껏 준비한 “나를 만드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며” 라는 제목의 간증 설교를 시작합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한 평생을 죄와 허물로 가득한 죄인중의 죄인으로 살아왔는데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심부름꾼으로 살아오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심부름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된 것이지만 또한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나를 만드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며”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부족한 저에게 귀중한 신앙의 유산들을 물려주신 신앙의 선배님들에 대한 감사와 사랑과 존경의 이야기들을 아주 간단하게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가난과 고난과 순교의 신앙을 물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는 처음에는 북한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9년 동안 목회하시고 그 다음에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2년 동안 목회를 하셨는데 일본 시대에는 신의주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자주 감옥에 잡혀가시는 고난을 당하셨고 공산 시대에는 평양에서 공산정치를 반대한다고 자주 감옥에 잡혀 잡혀가시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저는 자주 감옥에 붙잡혀 가시는 그리고 나중에는 순교의 길로 가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가난과 고난과 순교의 신앙을 조금씩 몸에 지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둘째로 제가 평양에 있을 때 평양 서문밖교회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로부터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 신앙을 분명하게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은 저에게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 신앙이 가장 귀중한 신앙이라고 가르쳐주셨는데 저는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주일을 종일 성수했고 새벽기도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순교 신앙을 가장 귀중한 신앙으로 받아드리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 평양 제 오 인민학교에 2년 동안 다녔는데 일요일에 학교에 오지 않는다고 월요일마다 벌을 서고 정학을 당하게 되었는데 저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셋째로 제가 11살 때인 1948년 7월 주일성수의 신앙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이별의 슬픔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감사를 지니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년 후인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서 대구로 가서 3년 동안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한국교회의 무디 라고 불리시는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12번 참석하면서 너무나 큰 은혜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고 금요일에는 철야기도를 했고 토요일 새벽에는 이성봉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12번 받으면서 좋은 목사가 되기를 다짐하곤 했습니다. 결국 회개와 기도와 은혜사모와 성결과 청빈과 재림 신앙의 영성을 조금씩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는데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넷째로 제가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에 서울 창동교회에 다니면서 한국교회의 예레미아 라고 불리시던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눈물의 회개와 은혜사모와 기도와 전도와 헌신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치선 목사님께서는 새벽기도회 때마다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사” 찬송을 부르시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시곤 하셨는데 저는 새벽기도 후 남산으로 올라가서 30여분 이상 더 기도하고 내려오곤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산 기도회에는 삼각산 관악산은 물론 대구 주암산까지 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2만 8천여 동내에 우물을 파게 대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시던 김치선 목사님의 기도와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 저는 고 3때와 대 1때 토요일과 주일에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찬송을 부르고 전도를 하면서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불러모으고 천막교회를 세우기도 했는데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다섯째로 저는 손양원 목사님으로부터 순수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함께 희생적인 섬김과 순교 신앙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울고등학교 2학년 학생일 때 여름 어느 날 남대문 네 거리에 있는 기독교 서점에서 “사랑의 원자탄” 이란 책을 사서 들고 제가 새벽기도 후에 날마다 올라가서 기도하곤 하던 남산 어느 숲 속으로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랑의 원자탄”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나병에 걸려있는 아이들의 점심을 빼앗아 먹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리고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양 아들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하면서 저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후부터 손양원 목사님은 제가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고 닮고 싶은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섯째로 저는 1살 때부터 평생 한경직 목사님의 친밀한 사랑과 가르침을 받으면서 살았는데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기도와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섬김과 가난과 고난과 화해와 평화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시면서부터 월남 후 영락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동안에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정성껏 돌아보시는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린원,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 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등을 세우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은퇴 후 남한산성의 아주 작은 집에서 26년 동안 불편하게 사셨는데 3무 4무 5무의 가난과 고난과 청빈의 삶을 사셨습니다. 제가 남한산성을 제일 많이 찾아가곤 했는데 한경직 목사님을 마지막까지 돌아보시던 백운경 장로님이 “한 목사님이 김 목사님이 오면 제일 좋아하지요” 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일곱째로 저는 정진경 목사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과 포용과 협력과 따뜻함과 격려와 칭찬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진경 목사님께서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를 누구보다도 너무너무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칭찬해주셨습니다. 저는 온유 겸손하신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도 분에 넘치는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정진경 목사님으로부터는 더욱더 친밀한 사랑과 격려와 칭찬을 몽땅 받았습니다. 백두산을 비롯한 중국 일본 러시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홍콩 등 세계의 수 많은 곳을 정진경 목사님과 함께 여행하면서 저는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에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정진경 목사님과 같이 항상 가까이 친밀하게 사귈 수 있는 분들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진경 목사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온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덟째로 저는 총신과 합신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박윤선 목사님으로부터 기도와 말씀, 소박함과 진솔함, 착함과 따뜻함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완전하게 붙잡히신 분이셨고 그래서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신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너무 소박하시고 진솔하시고 착하시고 따뜻하신 인간미를 몸에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자주 전화를 거시고 가슴에 지니신 안타까운 생각들을 진솔하게 말씀하시면서 “이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지 마” 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하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과 비슷하신 진솔함을 지니신 분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박윤선 목사님께서 마지막 한 주 동안 입원하고 계시던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 매일 찾아 뵈면서 친밀한 교제와 기도의 시간을 가지곤 했는데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아홉째로 저는 방지일 목사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많이 받으면서 방지일 목사님으로부터 순수함과 섬세함과 정확함과 따뜻함과 사랑과 섬김과 눈물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특별한 사랑의 손길을 따뜻하게 펴시며 진솔한 말씀들을 해 주시곤 했습니다. “김 목사, 점심 대접할게” 라는 송구한 말씀을 수십 번 하셨고 제가 달려가면 일산으로 강화도로 경기도로 서울 곳곳으로 저를 데리고 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 주시곤 했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계시는 생각들을 저에게 진솔하게 이야기해 주시곤 했습니다.저는 방지일 목사님을 모시고 중남미 도미니카로, 모스크바로, 몽골로, 태국으로 다니면서 선교대회에 참석하곤 했는데 선교사들과 현지인들은 물론 저는 너무너무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하신 귀중한 말씀들이 너무너무 많은데 한 가지만 소개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리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나 혼자 있을 때면 우는 때가 많아요. 깊은 밤중에 일어나 우는 때도 있고 혼자 길을 걸으면서 우는 때도 적지 않아요. 어린 아이는 잘 울어요. 배가 고파도 울고, 보고 싶어도 울고, 기저귀가 젖어도 울어요. 어린 아이는 우는 방법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의미에서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해요.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고 통달하려고 하다 보니 울지 않게 된 것이에요. 기도의 최고봉은 눈물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 한데서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방지일 목사님과 친밀한 교제의 시간들을 가진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나를 만드신 신앙의 선배님들” 9분들 중의 한 분인 박윤선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추려서 하려고 합니다. 김규현 목사님이 박윤선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붙잡힌 기도와 말씀의 사람”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2006년 11월 7일 제 18차 정암신학강좌에서 “하나님께 붙잡힌 기도와 말씀의 사람 박윤선 목사님” 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한 일이 있는데 그 때 한 강의를 참고하면서 박윤선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은 저의 스승이신 박윤선 목사님이십니다. 제가 총신대의 교수로 봉직하고 있던 1979년 3월 박윤선 목사님께서 총신대의 신학원장으로 부임하셨습니다. 그 이후 저는 총신대에서 1년 7개월 동안 그리고 합동신학교에서 7년 7개월 동안 박윤선 목사님을 가까이 모시고 함께 일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특별한 은혜와 축복이었습니다. 저의 한 평생에 있어서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께서 저에게 깊은 신앙적 감화를 미치신 분들이시지만, 박윤선 목사님은 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신 분으로 제가 가장 존경하고 가장 좋아하는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저는 언제나 박윤선 목사님과 상의하곤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도 저를 퍽 좋아하셨습니다. 박윤선목사님께서는 시간에 상관 없이 저에게 전화를 거시고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때로는 질문도 하셨고 때로는 “이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지 마” 라고 하시면서도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저는 언제나 박윤선 목사님의 입장에 동조했습니다. 박 목사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박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고 말하면서 박윤선 목사님의 입장을 교수들 앞에서 내 세우곤 했습니다. 박 목사님께서는 저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말을 했냐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는 박윤선 목사님과의 친근한 관계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도 했고 반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박윤선 목사님이 언제나 좋았습니다. 신앙적 감화와 인격적 감화 때문이었습니다. 박윤선목사님께서는 인간적으로는 소년처럼 단순하고 순박하고 정다웠고 신앙적으로는 하나님만 아시는 분이셨고 하나님께만 붙잡혀서 사신 분이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금욕주의자는 아니셨지만 다른 일에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별세하시기 얼마 전 안만수 목사와 함께 박윤선 목사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서울대공원에 모시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원숭이나 호랑이를 보여드렸지만 박윤선목사님께서는 그것들에는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주여, 주여” 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교수님들이 함께 모일 때 피차 농담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교수 세미나를 할 때는 언제나 기도원으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가까이 붙어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철없는 합신 강사는 “합신이 기도원으로 가느냐?“ 라고 불평과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미국 유학 시절, 친구 되시는 방지일 목사님에게 편지를 하시곤 했는데 외로움 가운데 강한 우정을 느끼셨던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이와 같은 편지를 쓰셨습니다. “나는 웬일인지요 방제를 생각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주님께 대한 회개의 고백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내가 주님에게 끌리지 않고 한갓 우정이나 향정에 끌리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서 우정으로 주님을 떠나서 향정으로, 이는 사단의 유혹이었나이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윤선 목사님의 삶은 자연히 기도 생활과 말씀 연구 생활로 나타났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기도를 생활화하신 분이셨습니다. 기도를 쉽게 하신 분이 아니라 수고스럽게 하신 분이셨습니다. 총신에 계실 때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에 사셨는데 매일 새벽, 택시를 타고 총신에 오셔서 뒷산에 올라가 2,3시간씩 기도하시는 모습을 한 6개 월 동안 제가 옆에서 목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박윤선 목사님을 흉내 내며 새벽에 총신 뒷산에 올라가서 근처에서 두 달 동안 기도하곤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어디에 가실 때나 또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에도 간간히 “주여! 주여!” 라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곤 하셨는데 영혼의 호흡 소리와 같이 들렸습니다. 택시를 타고 가실 때도 “주여, 주여” 라고 하시므로 택시 운전수가 술을 드셨냐고 묻곤 했다고 합니다.

1979년도에 총신에서 학생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기도로 일관하셨습니다. 학생들이 이사회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서 이사들과 교수들의 자동차를 뒤집어엎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의 책임자이신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학생 대표들을 불러 타이르거나 사태 수습을 협의하는 대신 특별 기도회를 선포하시고는 밤마다 강당에서 기도회를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좀 불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박윤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저는 박 목사님보고 “제가 기도회를 인도할 터이니 집에 가시라” 라고 하고는 밤 기도회를 인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기도회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이 저마다 일어나서 “내가 누구의 자동차를 뒤집어엎었습니다!” “내가 누구의 자동차를 뒤집어엎었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 일관의 박윤선 목사님의 삶의 자세를 지금 돌이켜 볼 때 “바로 그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행정이나 정치에 관심을 두기 전에 기도로 일관하며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길선주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들께서 보여주신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하며 배우게 됩니다.

저는 박윤선 목사님의 마지막 1주일 동안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 계신 박 목사님을 매일 찾아 뵙곤 했는데 그때야말로 기도로 일관하신 기간이었다. 저는 그때 안식년으로 (평생에 처음과 마지막으로 가진) 8개월간 미국 휫튼 대학교에서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박윤선 목사님께서 피를 토하시고 쓸어져서 병원으로 옮겨져 가셨습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한국에 전화를 걸었더니, 박윤선 목사님께서 쓸어져서 병원으로 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무의식 중에 “그러면 그렇지!”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와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는 매일 병원으로 찾아가서 박 목사님을 뵙곤 했는데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병상에 계시던 일주일 동안 매일 기도로 일관하셨습니다. “산에 가서 기도하다가 죽고 싶다” 라고 고백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위 박 목사의 의를 제해 달라” 라고 호소하며 기도하시기도 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곤 하셨는데 아주 반가워하시는 분들도 있었고 보통 반가워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박 목사님의 진솔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박 목사님께서 “손 박사 보고 싶어” 라고 말씀하셔서 제가 전화를 걸어서 손 박사가 달려오게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결국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으며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정말로 기도로 일관된 삶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윤선 목사님의 삶은 또한 평생토록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주경 신학자의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평생을 신 구약 성경 66권의 주석 집필에 바치셨고 평생을 성경을 가르치는데 바치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죽었다가 깨어나 다시 한 세상을 산다고 해도 나는 목사가 되어 성경을 증거하겠노라” 라고 자주 말씀하셨고 “내가 평생에 힘써온 중요한 일은 신학 교육과 성경 주석 저술이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들을 세상의 여러 책들 중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며 가까이에 두고 자주 읽곤 합니다. 다른 주석 책들은 거의 읽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교할 때마다 자주 “박윤선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했다” 라고 토를 달곤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성경을 하나의 성경 신학적으로 체계화하는데 만족하시지 않고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먹고 말씀의 깊은 뜻을 발견하는 것을 최대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에게 있어서 성경 말씀은 양식이요 생명이요 기쁨이요 보화요 등이요 빛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주석과 설교에는 항상 새로운 영감과 통찰력이 나타났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이 무엇임을 자신의 삶으로 나타내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분이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박윤선 목사님의 삶은 또한 겸손과 진실과 착함의 인격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항상 잔잔하고 순박한 소년의 미소가 깃들어 있었고 가식이나 꾸밈을 모르는 진실이 풍기고 있었습니다. 성역 50년 기념 논총을 증정 받은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나는 83년 묵은 죄인이다” 라고 고백하셨고 임종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오해하는 소위 박 목사의 의를 모두 지워달라” 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호소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종종 저의 손을 꼭 붙잡고 격려와 위로와 훈계의 말씀을 해주시곤 하셨습니다. “김 목사, 마음에 기쁨을 잃으면 안돼!” “김 목사, 힘을 내!” “김 목사, 강의 준비를 더 잘해야 돼!” “김 목사, 주님을 바라봐!” 겸손과 진실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날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보여주신 분이 바로 박윤선 목사님이셨다고 생각합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또한 인간 관계나 교파 또는 문화적 관계에 있어서 폭 넓은 이해와 시야를 지니신 포용적인 분이셨습니다. 기도와 은혜를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들과는 통합측 인사들은 물론 루터파 인사들까지 교파를 초월해서 친하게 지내셨습니다. 독일 경건주의 계통의 학자 게르하르트 마이어 박사님을 초청하여 말씀을 듣고 교제하면서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고 매우 만족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성 사역에 있어서도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셨습니다. 통합 측 장신의 주선애 교수님을 합신에 초청해서 1년 동안 교수 사역을 하게 하셨고, 이동주 박사를 초청해서 합신에서 교수 사역을 하게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개방적인 입장을 일부 교수들이 비판하자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매우 속 상해하셨고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개혁주의적 삶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셨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개혁주의라기 보다는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한국 교회 안에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이며 개혁주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시고 실천하신 분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주의 신학은 하나의 신학 체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 뜨거운 신앙과 삶의 원리로 나타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칼빈주의 신학은 배타적 분리주의가 아니라 적극적 포용과 교제의 삶인 것을 나타내 보여주셨으며 세상사에 무관심한 반 문화주의가 아니라 구제 사역과 선교 사역 등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문화 변혁주의인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결국 현세적인 정치 사회 문제에 치중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붙잡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셔서 기도하시면서 한 평생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한 말씀 더 드립니다. 제가 개나리 아파트에 사시던 박윤선 목사님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일어서려고 하면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의례히 저보고 이런 말씀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열쇠 잊지 마!” 제가 박윤선 목사님과 이야기를 할 때 거의 매 번 제가 가지고 다니는 열쇠 뭉치를 소파에 놓고 이야기 하다가 그대로 놓고 나오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박윤선 목사님께서도 잊어버리시기를 잘 하시는 분이신데 저더러 열쇠 잊지 말라고 매 번 당부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평생에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에 붙잡혀서 사신 저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을 만나게 하시고 그 분과 함께 일하게 하시고 그 분으로부터 배우게 하시고 그리고 그 분의 사랑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그리고 저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합니다. 박윤선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박윤선 목사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것으로 오늘 “나를 만드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며” 라는 제목의 간증설교를 마무리합니다. 사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한 평생을 죄와 허물로 가득한 죄인중의 죄인으로 살아왔는데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심부름꾼으로 살아오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심부름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된 것이지만 또한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귀중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과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과 한국교회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과 한국교회의 예레미아 김치선 목사님과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과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섬김과 가난과 고난과 화해와 평화의 목회자 한경직 목사님과 온유와 겸손과 포용과 협력과 따뜻함과 격려와 칭찬의 목회자 정진경 목사님과 기도와 말씀, 소박함과 진솔함, 착함과 따뜻함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과 순수함과 섬세함과 정확함과 따뜻함과 사랑과 섬김과 눈물의 목회자 방지일 목사님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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