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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29]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롬 8:1-13) - 포천 새힘교회


제가 2008년 1월 13일 주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다음 지난 11년 9개월 동안 매주일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포천 새힘교회는 매년 9월 마지막 주일에 한번씩 지금까지 11번 와서 설교를 했습니다. 2008년 9월 28일 주일 포천 새힘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09년 9월 27일 주일 두 번째로 와서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0년 9월 26일 주일 세 번째로 와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1년 9월 25일 주일 네 번째로 와서 “예수란 이름의 의미”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2년 9월 30일 주일 다섯 번째로 와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3년 9월 29일 주일 여섯 번째로 와서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4년 9월 28일 주일 일곱 번째로 와서 “부자와 나사로가 주는 교훈”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5년 9월 20일 주일 여덟 번째로 와서 “십자가의 도”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6년 9월 25일 주일 아홉 번째로 와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7년 9월 24일 주일 열 번째로 와서 “인생과 주인”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8년 9월 30일 주일 열한 번째로 와서 “에녹의 믿음처럼”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19년 9월 29일 주일 여기 열두 번째로 와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병호 목사님은 제가 올 때를 매년 9월 마지막 주일로 정해 놓고 저를 부르고 그리고 거의 매 번 제가 할 설교의 본문과 제목을 정해 놓고 저보고 설교를 하라고 부탁을 하곤 합니다. 이병호 목사님이 오늘 롬 8:1-13 말씀을 본문으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라고 정해서 주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롬 8:1-13 말씀을 본문으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과 영”과의 처절한 갈등에 사로 잡혀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사도 바울의 진솔하고 처절한 죄의 고백이 담긴 롬 7장 마지막 부분과 8장 처음 부분을 아주 귀중하게 생각하면서 매일 암송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삼층 천에 올라가는 신비로운 체험을 한 사람이고 손수건이 닿기만 해도 불치의 병들이 고쳐지는 신유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신비로운 체험과 신유의 능력을 지닌 사도 바울이 롬 7장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진솔하고 처절한 죄의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1-24). 여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죄의 고백은 너무나 처절한 죄의 고백인데 영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을 했습니다. “What a wretched man I am!” 영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오호라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한 비참한 새끼로다” 라고 번역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13년 전인 2006년 9월 14일 새벽 강변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사도 바울의 진솔하고 처절한 죄의 고백을 읽으면서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날 오전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 날의 감동을 제가 글로 써서 발표를 했는데 뉴스파워(06.9.14)와 국민일보(06.9.21)가 9월 14일과 21일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제목으로 실었습니다. 그 글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오늘 새벽기도회 시간에 성도들과 함께 사도 바울의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을 읽으면서 가슴과 눈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오늘 아침 차를 타고 교회로 오는 시간에도 그 눈물은 계속해서 내 가슴과 눈에서 흐르고 있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What a wretched man I am!” 자기 자신을 가리켜 “저주 받을” 새끼라고 처절한 죄 고백을 한 사람이 정말 사도 바울 자신이었을까? 그래서 일부 성서 학자들은 그 죄 고백이 사도 바울 자신의 죄 고백은 아니고 중생하지 못한 자나 죄인 일반의 죄 고백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님은 그것이 사도 바울의 죄 고백이라고 말하면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다” 라고 잘라서 말했다. 그리고 “중생한 자의 영혼이 범죄한다” 라고 설명까지 부쳤다.

『나는 오늘 새벽 사도 바울의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을 한 마디 한 마디 읽으면서 “어쩌면! 어쩌면!” 하면서 나 자신도 감동에 떨며 탄식하고 있었다. 삼층 천에 올라갈 정도로 가장 큰 은혜를 체험한 사도가! 그의 손 수건이 닿기만 해도 불치의 병들이 물러갔던 가장 큰 능력을 지녔던 사도가! 어떻게? 어떻게? 그런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을 할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나는 가슴과 목이 메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이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4,18,21,24).

『기독교는 값싼 은혜를 파는 종교가 아니다. 만사형통을 빌어주는 종교도 아니다. 그럴듯한 선으로 포장해주는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부끄러운 수치와 절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들어내는 종교이다. 그리고 자신의 저주스러운 모습을 하나님께 진솔하게 고백하는 종교이다. “내 속에 정한 곳이라고는 한 곳도 없습니다”(다윗).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이사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사도 바울). “나는 망할 지이옵니다.”(어거스틴). “나는 작은 벌레입니다”(프랜시스). “나는 버림 받을 죄인입니다”(루터).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길선주). “나는 고멜과 같은 우상숭배한 죄인입니다”(김치선). “나는 신사 참배한 죄인입니다”(한경직).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박윤선).

『지금 우리는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며 한탄했던 욥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모두 너무 의인들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다른 사람들의 잘못만 크게 보는 너무 밝은 눈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자신을 미워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분노하는 이상한 가슴을 지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메마른 나의 가슴에 사도 바울이 가슴에 지녔던 처절한 죄 고백과 탄식의 몇 백분의 일이라도 주신 주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길선주, 이성봉, 김치선 목사님들이 지니셨던 처절한 죄 고백과 탄식을 나도 가슴에 지니면서 남은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소원한다. (2006.9.14)』 “육신과 영”과의 처절한 갈등에 사로 잡혀서 고통스러운 삶을 산 사도 바울의 진솔한 고백이야말로 너무너무 귀중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죄와 허물밖에 없는 우리 죄인들이 성자 예수님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받게 되고,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받음으로 성결의 삶을 살게 되고, 성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심부름꾼들로 달려가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사함과 구원을 받은 우리 죄인들이 온전한 성화의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고 육신의 온갖 죄악의 유혹을 계속해서 받으면서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절대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 롬 8:4에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개역개정) 또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개역 한글) 라고 고백했는데, 이 말씀은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사도 바울 자신과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가 “그 영”은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가리키지만(롬 8:9) 동시에 사도 바울과 모든 신자들이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아 중생해서 몸에 지니게 된 우리들의 거듭난 “영”을 가리킨다고도 생각합니다(롬 8:16).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결국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아 중생한 신자들은 성령의 감화 감동과 가르침과 도우심을 계속해서 받아야 하는 동시에 새로 살아나게 된 우리 “영”의 가르침과 도움도 계속해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상을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신자들이 모두 “영”의 가르침과 도움을 받는 대신 “육”의 욕망을 따라서 온갖 범죄의 길로 달려가고 또 달려간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신실한 신앙의 선배님들은 거의 모두 절망에 가까운 진솔하고 처절한 죄의 고백을 계속해서 토해냈습니다. 이와 같은 절망에 가까운 진솔하고 처절한 죄의 고백을 구약에서는 다윗이 대표적으로 했고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이 대표적으로 했고 교회사에서는 성 어거스틴괴 길선주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들이 대표적으로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성경은 우리 죄인들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받아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동시에 죄 사함과 구원을 받은 신자들이 옛 사람의 죄악의 기질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으라는 권면의 말씀을 계속해서 하고 또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우리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고 성령의 모우심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받아 중생한 것은 사실이고 그리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들 속에는 옛 사람의 죄악의 기질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고 그래서 여러 가지 부끄러운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이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믿는 자들을 향해서 구원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면서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라고 권면하고 또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2,11).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중에 마지막에 가서 구원함을 받지 못하게 될 불행한 사람들이 있게 된다는 경고의 말씀을 거듭해서 하셨습니다(마 7:20,21, 마 25:1,2).  

오늘 아침 설교의 제목과 내용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라는 권면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그래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주님의 예비 신부들이 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내용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옷 입는 즉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어떻게 하여야 날마다 옛 사람의 마음과 옛 사람의 삶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의 마음과 새 사람의 삶을 옷 입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여야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르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까? 이제부터 그 비결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비결 세 가지를 생각하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우리 신자들의 삶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정확하고 철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과 구원함을 받은 우리 신자들의 삶에 대한 지나친 “비관주의적인” 관점도 문제이고 지나친 “낙관주의적인” 관점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과 구원함을 받았어도 결국 죄만 계속해서 짓다가 망하게 될 존재라고 생각하는 “비관주의적인” 관점은 잘못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과 구원을 받았고 그리고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을 받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제는 죄와는 상관이 없는 거룩한 천국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낙관주의적인” 관점도 잘못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자들의 삶에 대한 “비관주의적인” 관점과 “낙관주의적인” 관점을 아울러 받아드리는 “종합주의적인” 관점이 바람직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리켜 “Christian realism” 즉 “기독교적인 실재론” 이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적인 실재론”의 관점을 성 어거스틴과 존 스토트 박사님을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이 받아드렸습니다. “기독교적인 실재론”의 관점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면서 따르면 “비관주의자”가 되지만 십자가와 하늘을 바라보면서 따르면 “낙관주의자”가 된다는 “종합주의적인” 관점입니다. “비관주의적인 낙관주의” 라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실재론”을 표명한 사람들의 조상은 다윗과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은 자신을 바라보면서는 통곡하면서 울었고 동시에 하나님을 바라보면서는 감사와 기쁨에 넘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눈물의 고백과 찬송의 고백을 인용합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1-5). 사도 바울이 표명한 “기독교적인 실재론”을 간단하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는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또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고 감사의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울고 또 울었고 그리고 웃고 또 웃었습니다. 삼층 천에 올라갔던 사도 바울이 그의 손수건이 닿기만 해도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능력의 소유자였던 사도 바울이 자기 속에는 지금도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비관적으로 고백하고 또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1-25). 저는 사도 바울이 자기 속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비관적인 고백을 하면서도 절망과 원망의 소리를 지르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놀라움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보통 신자나 보통 제자 같았으면 절망과 원망의 소리만 질렀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넘치도록 받은 사도 중의 사도인 사도 바울이 자기 몸 속에 아직도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원망의 소리를 질렀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고백을 하고 또 했습니다. 롬 8장에서도 감사와 찬양의 고백은 이어지고 또 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1-4).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1-35).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고백만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의 몸 속에 선만이 존재하고 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놀라운 감사와 찬양의 고백이 절절이 쏟아져 나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사실 의인들의 몸 속에서는 이와 같은 놀라운 감사의 고백이 절절이 쏟아져 나오지 못합니다.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은 죄인들에게서만 이와 같은 놀라운 감사의 고백이 절절이 쏟아져 결국 사도 바울은 이다음과 같은 엄청난 역설적인 고백까지 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물론 그 다음 절에 조심스러운 경계의 말씀을 추가하기는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2). 주님을 믿고 따르고 섬기는 우리 신자들의 몸 속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나쁜 사실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의인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셨고 세리와 창기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죄인들에 대해서만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절망과 고통을 당하는 사도 바울에게 약함과 부족함과 곤란을 몸에 지니는 것이 유익하다는 말씀까지 하셨는데 사도 바울은 그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비관주의적인 낙관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적인 실재론”이 얼마나 귀중하고 얼마나 유익하고 얼마나 보배로운 관점인지 모릅니다. “기독교적인 실재론”의 유익함에 대한 이야기는 이만 하고 마무리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선”과 “악”을 함께 몸에 지니고 있는 우리들이 즉 “육신”의 정욕과 “영”의 감동을 함께 받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여야 옛 사람의 마음과 옛 사람의 삶을 조금이라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의 마음과 새 사람의 삶을 조금이라도 옷 입을 수가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옛 사람의 마음과 옛 사람의 삶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의 마음과 새 사람의 삶을 옷 입을 수 있는 비결 세 가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비결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날마다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과 악을 함께 지니고 사는 우리 구원함을 받은 죄인들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날마다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린 다윗과 사도 바울을 본 받아서 날마다 울면서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은 맨날 울면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를 건지소서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4-6).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1-4).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 56:1,8). 사도 바울도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우리들이 더러운 마음과 더러운 삶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삶을 옷 입을 수 있는 비결은 다윗과 사도 바울처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날마다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비결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주님을 닮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옛 사람 아담과 하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옛 사람이 살아나고, 새 사람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새 사람이 살아난다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3장과 12장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권면했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핍박자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다음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삶을 살면서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예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조금씩, 조금씩 닮게 되고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조금씩, 조금씩 닮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기 미친 사람이라고 조롱을 받을 정도로 예수님만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귀중하게 여기던 민족이나 가문이나 학문이나 종교 등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면서 예수님에게 미쳐서 살다가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에게 미친 자기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셋째 비결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하도록 최선을 다할 때 우리들의 마음과 삶이 새롭고 보배로운 마음과 삶으로 바뀌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들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몸과 마음과 재물과 시간과 정성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로 드리는 일보다 귀중하고 아름답고 보배로운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다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착함과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펴는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15,17,20).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8-10). 우리들의 몸을 시간과 소유를 착함과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펴는데 사용할 떼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이 착하고 아름답게 거룩하게 바뀌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선”과 “악”을 함께 몸에 지니고 있는 우리들이 즉 “육신”의 정욕과 “영”의 감동을 함께 지니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여야 옛 사람의 마음과 옛 사람의 삶을 조금이라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의 마음과 새 사람의 삶을 조금이라도 옷 입을 수가 있을까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 비결은 다윗과 사도 바울을 본 받아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날마다 울면서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는 일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 비결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주님을 닮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셋째 비결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는 일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들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일이고 그 다음에는 위로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착함과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펴는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의 말씀을 축복하시고 우리들 모두에게 은혜와 감동을 베푸시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또 부족한 우리들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울면서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고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닮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의 삶과 착함의 삶을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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