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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02] 모험심과 담력의 귀중한 신앙(2) (롬 8:31-39) - 영천 하나승리교회


제가 2014년 12월 21일 주일 영천 하나승리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오전 11시 예배 시간에는 “나의 삶과 목회”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오후 2시 예배 시간에는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인 2018년 6월 24일 주일에 두 번째로 와서 11시 예배 시간에는 “주일 성수의 귀중한 신앙”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오후 2시 예배 시간에는 “모험심과 담력의 귀중한 신앙” 이라는 제목으로 간증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2019년 6월 24일 주일 여기 세 번째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우기진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아침 무슨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우기진 목사님이 지난 번에 “모험심과 담력의 귀중한 신앙” 이라는 제목으로 4가지 내용의 설교를 했는데 오늘 그 나머지 내용에 대한 설교를 하면 좋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모험심과 담력의 귀중한 신앙”(2) 라는 제목으로 나머지 12 가지 내용에 대한 간증 설교를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너무나 많은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베풀어주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는” “막가 파”로 “즐겁게” “기쁘게” “행복하게” 살게 하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2014년 8월 25일 『‘장난꾸러기’ 김명혁 목사의 ‘막가파’ 이야기 모음』이란 책을 출판하면서 16 가지 이야기를 서술했습니다. 제가 작년 6월 24일 주일 하나승리교회에 두 번째로 와서 오후 2시 예배 시간에 16가지 “막가 파” 이야기들 중에서 4 가지 이야기만 했는데 그 때 한 네 가지 이야기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서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저는 어릴 때부터 좀 심한 “장난꾸러기”로 살았습니다. 저는 신의주에서 한 살부터 아홉 살까지의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어릴 때부터 심한 “장난꾸러기” 노릇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10살 11살 때 평양에 와서도 계속해서 장난을 많이 쳤습니다. 저는 평양에 와서 신앙생활은 더욱 더 열심히 했습니다. 결국 저는 주일성수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11살 때 38선을 혼자서 뚫고 넘어 남쪽으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저의 “장난꾸러기” 기질과 “막가 파” 기질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저는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부모님을 이별한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밤마다 남 몰래 울면서도 저는 여전히 “장난꾸러기” 기질과 “막가 파” 기질을 지니고 “즐거운” 생활을 했습니다. 서울에 와서 저에게 있어서 가장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일은 주일성수의 방해를 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6.25 전쟁이 일어나서 대구에 가서 3년 동안 살았는데 그 때도 신나고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의 부흥회에 12번이나 참석하면서 너무나 깊은 은혜와 감동을 받으면서 기쁘고 행복한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셋째로,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에는 서울에 와서 창동교회에 다녔는데 김치선 목사님의 가르침과 사랑을 받으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저는 주일 아침과 저녁과 수요일 저녁은 물론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와서 정성껏 예배 드리며 열심히 기도를 드렸는데 새벽기도를 마친 다음에는 남산에 올라가서 30여분 이상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집으로 내려와서 아침 밥을 먹고 서울 고등학교를 30여분 동안 걸어서 다니곤 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관악산이든지 삼각산이든지 어디든지 따라다녔는데 대구 주암산 부흥회까지 따라다녔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매일 새벽마다 울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셨고 2만 8천 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무조건 왕십리로 갔습니다. 우물을 파기 위해서였습니다. 토요일과 주일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서울고등학교 학생의 교복을 입고 찬송을 부르면서 아이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결국 천막을 구해다가 천막을 치고 천막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60여명과 어른들 40여명이 모였습니다. 사실 고 3때는 공부에 미쳐야 하는데 저에게 있어서 공부는 둘째 셋째였고 신앙생활과 전도 생활이 첫째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서울대학교에 무난히 합격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도 왕십리에서 전도와 목회를 계속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만 순종하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서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면서” “막가 파”로 교회를 개척하고 철없는 목회를 2년 동안 계속했습니다.  


넷째로, 저는 대학생 시절 군대에 가서 군 생활을 했는데 군대 생활도“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즐겁고” “기쁘게” 했습니다. 저는 논산에서 훈련을 받을 때 밧줄을 타고 높은 곳을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밧줄을 타고 타잔 처럼 공중으로 날아가는 훈련이 있었는데 그것이 너무나 재미가 있어서 저는 한 번 하고 다시 돌아와서 두 번씩 하곤 했습니다. 결국 저는 논산에서 훈련 받는 것도 그리고 7 사단에 가서 군 생활을 하는 것도 “즐겁고” “기쁘게” 했습니다. 저는 제대 후 대학생 시절 4. 19 이후 사회가 혼란할 때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새 생활 운동”을 일으킨 일도 있었습니다. 학생 수백 명이 한 달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울 시내와 외곽 지역의 다방과 극장과 요정과 댄스 홀 등을 찾아 다니면서 커피와 양담배를 마시거나 피우지 말자고 호소했고 요정이나 댄스 홀을 가지 말라고 호소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동조를 했습니다. 행인들로부터 수거한 양담배 더미를 광화문 네 거리까지 메고 가서 쌓아놓고 불 태우며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순수한 마음과 “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갈 때” 어려워 보이는 일도 잘 되는 것을 저는 눈으로 목격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2018년 6월 24일 주일 오후에 여가 와서 한 네 가지 “막가 파” 이야기 설교의 요약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나머지 “막가 파” 이야기 12 가지를 간간하게 추려서 하려고 합니다.





다섯째로, 저는 12년 동안의 미국 유학 생활도 “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즐겁고” “기쁘게” 했습니다. 저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총신에서 1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한 다음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총신의 교수님들이 좋은 목사와 좋은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유학을 가는 것이 좋다는 말을 했는데 저는 본래 듣기를 잘 하는 “듣는 귀”를 가졌기 때문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습니다. 훼이스 신학교에 지원을 했는데 입학허가 통지가 왔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가 어디 있는지 훼이스 신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학비가 얼마인지 장학금을 주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무턱대고 가기로 작정을 한 것이었습니다. “막가 파”의 기질이 발동한 것이었습니다. 비행기 값이 부족해서 한미재단이 주선한 미국 군함을 타고 두 주 반 걸려서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배 삯104불을 내고 단 돈 100불을 주머니에 넣고 조그마한 가방 하나는 가지고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가서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하면서 한국의 어떤 사람이나 어떤 교회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은 일이 없었습니다.


인천에서 배에 올랐는데 배를 탄 사람들은 전부 미국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었고 한국 사람은 서울 문리대를 졸업한 졸업생 네 사람이었습니다. 유학의 길을 떠나는 한국 유학생들 네 사람은 모두 기대에 부풀었지만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가면서부터 세 사람은 모두 배 멀미에 사로잡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못했습니다. 일본에서 하루를 머무는 때에도 하와이에서 하루를 머무는 때에도 세 사람은 구경은커녕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두주 반 동안 배 멀미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처음 먹어보는 양식이 아주 맛이 있어서 음식을 아주 잘 먹었고 군인들의 가족들과 즐거운 대화도 나누었고 밤에는 밤잠을 잘 잤습니다. 하와이에 도착해서는 친구들 세 사람을 해변으로 데리고 가서 수영을 하자고 했는데 아무도 수영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 혼자서 수영을 했습니다. 저는 설프 보트까지 타려고 시도를 했는데 처음 타 보는 것이라 번번이 물 속으로 빠지곤 했지만 아주 즐거웠습니다. “장난꾸러기” 기질과 “막가 파” 기질이 작동했다고 생각합니다. 두 주 반 걸려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저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그레이하운드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서 필라델피아로 가는 버스에 올라 탔습니다. 삼일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달려서 필라델피아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훼이스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교장 매크레이 박사님의 교회사 강의를 들었는데 제가 총신에서 일년 동안 한철하 박사님으로부터 초대교회사 강의를 잘 들었기 때문에 매크레이 박사님이 강의하는 초대교회사 강의를 잘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크레이 박사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 주일 저녁마다 기독교 방송에서 방송하는 빌리 그레함 박사님의 영어 설교를 수년 동안 정성껏 들었기 때문에, 영어 듣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학교 출판사 대표의 신임을 얻게 되어서 제가 원하는 시간에 출판사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까지 벌게 되었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물론 외국 학생들이 저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서 저에게 아르바이트를 하게 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망극하신 은혜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합니다. 제가 훼이스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학생들이 자동차도 없으면서 운전 면허를 따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에 얼마씩 주고 운전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이 보통 몇 주씩 운전을 배운 다음 면허장에 가서 운전 시험을 보곤 했습니다. 저는 평생 운전을 해 본 일이 없었는데 30분 정도 운전을 배운 다음 그만 배우겠다고 하고 30분 값을 지불했습니다. 몇 주씩 배우고 면허장에 간 한국 친구들 중에 면허시험에 불합격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저는 평생 30분 운전을 배우고 가서 합격을 했습니다. 저는 후에 필라델피아 한인교회의 봉고차를 주일마다 운전하는 운전기사가 되었습니다. 물론 사례는 받지 않았습니다. “막가 파”로 달려가는 것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훼이스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예일대학교 신학원과 아이오와 대학교와 아퀴니스 신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신학사, 신학석사, 신학석사, 철학박사 등등의 학위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받게 되었고 예일대학교 신학원을 졸업할 때는 에드워드 흄 휄로우십 상과 함께 상금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상금의 대부분을 총신에 손양원 목사님 기념 장학금으로 보냈고 일부는 한국 농어촌 교회에 후원금으로 보냈습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마지막 두 해 동안에는 예일대학교 신학원에서 “Research Fellow”로 그리고 풀러 신학교 선교신학원에서 “Research Associate”로 역사신학과 선교학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아이오와 대학으로 갈 때의 이야기 하나를 합니다. 제가 아이오와 대학의 박사 과정에 입학이 허락되었지만 장학금이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장학금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저는 여러 가지 요구 조건에 맞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많이 생각하다가 미국 동부에서 저의 헌 자동차에 짐을 모두 싣고 미국 중부 아이오와 시티로 무조건 달려갔습니다. 주임 교수인 포렐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박사 과정에서 공부하도록 입학을 허락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장학금 하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왔는데 그 장학금을 나에게 줄 것이라고 믿고 왔다고 말했습니다. 포렐 박사님이 저를 한 참 바라보다가 그러면 그 장학금을 저에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장학금을 지급받게 되었고 포렐 박사님의 조교까지 되었습니다. “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갈 때” 모든 길이 잘 열리는 것을 또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포렐 박사님이 저에게 어디에서 살려고 하냐고 물었습니다.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포렐 박사님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동물병원의 원장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습니다. 제가 밤에 전화를 잘 받아주면 잘 수 있는 방을 병원에 마련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즉시 동물병원으로 달려 갔습니다. 제가 수년 동안 살 수 있는 방이 무료로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호랑이를 포함한 제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동물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계산하지 않고 그대로 “막 뚫고 나아가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재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섯째로, 저는 12년 동안의 미국 유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 즉 노동을 했는데 노동하는 것을 힘들고 귀찮게 생각하면 힘들고 귀찮지만 재미 있고 즐겁게 생각하면 “재미 있고” “즐거웠습니다.” 마루 청소, 화장실 청소, 인쇄소 일, 도금 공장의 일, 식당의 접시 닦기, 판매원 일, 페인트 칠하기, 정원 가꾸기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을 했는데 “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적극적으로 접근하면 모든 길이 열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뉴욕의 아주 큰 선물 판매 상점에서 물건들을 파는 판매원의 일을 2 년 동안 여름마다 했는데 다양한 국적을 지닌 여성 고객들에게 어떻게 접근하면 물건을 잘 팔 수 있는지를 스스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고객들이 여성들이었는데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들이 미국인인지 스페인인지 독일인인지 프랑스인인지 유대인인지 희랍인인지 중국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로 친절하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면 그들의 마음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을 저는 발견했습니다. 남미 여자에게는 스페인 말로, 독일 여자에게는 독일 말로, 프랑스 여자에게는 프랑스 말로, 유대인 여자에게는 히브리 말로, 그리스 여자에게는 희랍어로, 중국인에게는 중국 말로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면 그들의 마음을 절반은 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대부분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조언을 들으므로 결정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객은 무슨 물건을 사야 할지를 몰라서 함께 온 어린 자녀에게 무엇을 사면 좋겠냐고 물은 다음에 결정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친절하게 고객에게 접근하면서 이 물건은 이래서 좋고 저 물건을 저래서 좋다고 설명을 하면 고객은 제 말을 믿고 즉시 물건을 사곤 했습니다. “소통”이 아주 중요함을 배우게 된 것이었습니다. 2년 동안 손봉호 친구와 마루야마 친구와 함께 판매원의 일을 했는데 제가 판매를 제일 잘해서 상점 주인의 칭찬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판매 술을 터득한 저는 심지어 한국에서 몇 가지 물건들을 수입해서 고객들에게 팔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런 일을 하면 안 되지만 상점 주인이 제가 다른 판매원들보다 판매를 잘해서 그랬는지 그것을 눈 감아 주었습니다. 모두가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 중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일은 뜨거운 여름에 페인트 칠하는 일과 정원 가꾸는 일이었습니다. 뜨거운 여름 날 땡 볕에서 집 안과 밖을 페인트 칠하는 일과 풀을 깎고 화단을 정돈하며 정원을 가꾸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시간 동안 일을 한 다음 땅 바닥에 들어 누어서 잠깐씩 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페인트 칠과 정원 가꾸는 일을 하면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곤 했습니다. 낡은 집이 깨끗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바꾸어 지는 것을 바라볼 때 저는 기분이 아주 좋고 재미가 있었습니다. 흐트러져 있던 정원과 화단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저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노동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페인트 칠을 안 해서 허름하게 된 집을 보면 그 집으로 들어가서 주인에게 이 집을 페인트 하면 멋진 새 집이 되는데 페인트 칠을 하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페인트 칠을 아주 잘 하는 사람인데 돈도 많이 받지 않으니 페인트 칠을 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말을 믿고 페인트 칠을 하게 했습니다. 때로는 일거리가 너무 많아져서 제가 미국 친구들을 고용해서 일을 시키며 일당을 주기도 했습니다. 페인트 칠 회사를 하면 돈을 많이 벌게 될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면” 길이 활짝 열리곤 했습니다.


저는 길 거리를 걸으며 상점들의 진열장을 바라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점 안으로 들어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진열장을 좀 더 멋지고 재미있게 장식하라고 권면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멋지고 재미있게 장식된 진열장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상점 안으로 들어가서 물건들을 구경하다가 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권면을 미국에서도 나중에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가끔씩 했습니다. “막가 파”가 현실적으로 너무 따지고 분석하지 않고 “막 뚫고 나아가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의 관심과 기호가 무엇인지를 전혀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람들의 관심과 기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일을 하면 모든 일이 더 잘 될 것입니다. 저는 나무와 꽃들을 파는 상점을 지나가면서 멋지고 아름다운 꽃들을 매주 바꾸어가면서 진열장이나 상점 앞에 진열하라고 권면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때로는 가끔 아주 분명하고 강한 “막가 파”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미국의 큰 식당에서 접시 닦는 일은 했는데 남미에서 온 한 젊은이가 제 말을 안 듣고 까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젊은이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내가 태권도를 잘 하는데 한방 치면 너는 날아간다고 하면서 까불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젊은이는 까불지 않고 제 말을 아주 잘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태권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공갈을 친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장난은 쳐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분명하고 강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에서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





일곱째로, 제가 십 일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세 개의 학위와 함께 박사 학위까지 받았는데 그 후에 제가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여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기 때문이었습니다(욥 23:10). 제가 예일대학교 신학원에서 “Research Fellow”로 연구하고 있을 때 뉴욕을 방문한 조동진 목사님이라는 분이 저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 분을 처음 만났는데 한국교회 선교의 선구자인 조동진 목사님과의 만 남은 저의 연구와 사역의 방향에 획기적인 영향을 마쳤습니다. 조동진 목사님은 제가 유학을 마친 후 후암교회에 교육 목사로 오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저는 본래 남의 말을 쉽게 잘 듣는 터라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조동진 목사님이 제가 귀국하기 전에 풀러신학교 선교신학원에 가서 선교학을 연구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얼마나 잘 한 일인지 모릅니다. 역사신학과 선교신학을 접목할 수 있는 너무 좋은 기회였습니다. 결국 저는 1974년 1월부터 풀러신학교선교신학원에 가서 “Research Associate”로 8개월을 지내며 선교학 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랄프 윈터 교수님을 비롯한 맥가브란, 글래써, 왜그너 교수님 등의 강의를 들으며 선교의 동향과 문제점들을 보기 시작했고 복음주의 선교의 필요성을 차츰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학과 사역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1974년 가을 귀국하여 후암교회의 교육목사로 목회 사역을 하면서 저의 젊은 정열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부족한 저의 가르침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선교와 목회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또한 귀국하자마자 총신의 김희보 학장님에게 전화를 걸고 저를 소개하면서 저는 공부를 많이 한 훌륭한 사람인데 제가 총신에서 역사신학과 선교신학을 강의하면 좋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김희보 학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저는 1975년 봄부터 총신에서 강사로 그 후에는 조교수로 부교수로 5년 동안 교회사와 선교학을 강의하는 교수 사역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총신에서 선교학을 제가 처음으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막가 파”로 달려갈 때 모든 길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저는 계속해서 경험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여덟째로, 제가 1974년 가을에 귀국해서 목회와 교수 사역에 전념하고 있을 때 주일성수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1975년 말경 주민등록 갱신을 주일에 하라는 통보가 모든 국민들에게 시달되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군사 정부 방침에 반대하면서 크리스천신문 11월 29일 호에 정부 방침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습니다. “나는 주민등록 갱신을 일요일에 하도록 배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겠지만 나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교회의 교육 목사요 신학대학의 강사이기 때문에 보다는 나 개인의 과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중략) … 벌금 낼 각오를 하고 주민등록 갱신을 일요일에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주민등록 갱신을 일요일에 하도록 한 것이 북한에서와 같이 신앙을 침해하고 억압하려는 고의적인 정책으로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이와 같은 일들 (또는 일요일에 입학시험 실시 등)이 일요일에 실시되지 않도록 행정부 책임자들이 고려해 주기를 부탁한다.” 그런데 박정희 군사 정부는 교회를 장악하려는 나머지 주일에 국가고시는 물론 학도 군사훈련까지 실시했다. 총신의 일부 교수는 비상시에는 주일에 학도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이 괜찮다는 입장까지 표명했습니다. 저는 군사 정부정책을 비판하면서 1977년 11월 14일과 24일 한국교회의 지도적 인물 46명에게 주일성수에 대한 앙게이트를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응답은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일부를 소개합니다. “신앙 원리상 절대 교단적으로 교회적으로 반대해야 합니다.”(합동 박목사). “… 등을 주일날 함에 대해서 본인은 절대 반대합니다.”(기장 김목사). “이 문제는 온 교회가 순교적 정신으로 강력하게 시정토록 추진하여야 할 것입니다.”(합동 박목사).


결국 저는 정부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1977년 11월 20일 아침 남산 중앙정보부의 지하실로 붙잡혀 가서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늦은 밤까지 협박적인 심문을 받았지만 그러나 저는 단 한 번도 불안하거나 두려워한 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심문하는 두 사람을 책망하기도 했고 충고하기도 하고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주일 성수를 침해하는 것은 너무너무 어리석은 일이라고 충고했습니다. 반공을 제대로 하려면 하나님을 바로 믿어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심문하던 한 사람은 너무 기가 막혀서 스스로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심문하는 두 사람이 잠시 쉬는 동안 제가 글을 쓰고 있으니까 무슨 글을 쓰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다음 주일 설교를 준비한다고 했더니 한 사람이 기가 막힌 듯이 “당신,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요?”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 한 번 들어오면 언제 나갈지 모르는데 다음 주일 설교 준비를 한다니 말이 되는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나가고 안 나가는 것은 당신들의 소관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고 당신들은 다음 주일 후암교회에 와서 내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그날 밤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책상 두 개만 있는 유리창도 없는 지하실 방이었습니다. 저는 책상을 간이 침대로 삼고 이불도 없이 그 위에서 단잠을 잘 잤습니다. 사실 저는 한 평생 어디서나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밤 잠을 잘 자는 “막가 파” 기질을 지니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저를 깨우면서 집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올 때는 좋은 차에 태워주어서 왔는데 좋은 차에 태워주어야 가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나가서 지나가던 좋은 차 한 대를 세웠습니다. “이 분을 아무데까지 모셔 드리라” 라고 했습니다. 붙잡혀 가서 심문을 받는 것도 아주 유익하고 재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저를 심문하면서 회를 내던 사람은 그 후 10 여 년 동안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저에게 전화를 걸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으면서 조언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 평생 “장난꾸러기”로 “막가 파”로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갈” 때 모든 길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경험하고 또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아홉째로, 도둑맞는 일도 유익하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유익하고” “즐거운” 일로 바꾸어지기도 합니다. 저는 여행을 하면서 두 번 도둑을 맞고도 걱정이나 당황을 하지 않았습니다. 1983년 7월 20일 아침 암스텔담에서 열린 빌리 그래함 국제전도대회를 마치고 미국과 캐나다를 향해서 떠나려고 하던 때 암스텔담 기차역에서 2인조 도둑에 의해서 조그만 손가방을 도둑맞았습니다. 여권, 비자, 비행기표, 여행자수표, 카메라, 성경책, 기행문이 들어있는 가방을 도둑맞았습니다. 저는 순간 놀랐지만 당황하거나 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제일 먼저 한국대사관에 갔습니다. 도둑 맞은 여권을 다시 만들어달라고 했더니 무엇을 믿고 여권을 다시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를 믿고 다시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곧 임시 여권을 다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다음 카나다 대사관으로 가서 도둑 맞은 카나다 비자를 다시 만들어달라고 했더니 무엇을 믿고 비자를 다시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를 믿고 다시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곧 카나다 비자를 다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다음 롯텔담에 있는 미국 대사관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 대사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5시가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몸이 건장한 대사관 직원이 지금은 근무 시간이 지났고 영사도 집으로 갔으니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근무 시간이 지난 것은 압니다. 그러나 만약 미국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 왔다면 즉 장관이나 대통령이 왔다면 영사가 근무시간이 지났다고 오지 않겠습니까? 영사한테 전회를 걸고 매우 중요한 사람이 왔으니 곧 나오라고 말하시오.” 그 직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크게 비웃으면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다시 정색을 하며 영사에게 전화를 걸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 직원은 전화를 걸었습니다. 영사가 한 시간 후에 대사관으로 온다고 했습니다. 저는 영사를 만나서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 내가 매우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지금 카나다뱅쿠버에서 열리는 WCC 총회로 가는 한국의 매우 중요한 목사요 교수인데 도둑 맞은 미국 비자를 곧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영사가 저를 한참 응시하더니 시편 100편의 내용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즉시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 라고 영어로 암송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영사가 틀렸다고 하면서 시편 100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영어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영사에게 정중하게 말을 했습니다. “미국의 영사님께서 시편 100편과 23편을 구별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미국 영사의 일을 하십니까?” 영사는 약간 당황하더니 즉시 미국 비자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모험심과 담력”이 또 다시 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비행기표를 다시 만들었고 여행자 수표를 다시 만든 이야기는 시간상 관계로 생략합니다. 도둑맞은 기행문도 거의 그대로 다시 썼습니다. 도둑 맞은 일이 얼마나 “재미 있는”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경험은 유익하다”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열째로, 하와이 바람 산에서 제가 하늘을 날려고 했던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저는 한평생 하늘을 날아가는 꿈을 꾸면서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아마 고향이 그립고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하늘을 날아가는 꿈으로 나타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꿈에 날려고 할 때는 언제나 필요한 나무 판자나 종이 판자 두 개가 제 옆에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 사각형의 두 개의 판자를 양 손으로 하나씩 잡으면 뒤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러면 저는 두 개의 판자를 비행기 날개로 삼고 하늘을 높이 날아오릅니다. 그러면 산도 바다도 도시도 신나게 날면서 구경을 합니다. 한 번은 오래 전에 아내와 함께 하와이의 바람 산에 올라갔는데 바람이 아주 강하게 불어왔습니다. 제가 바람 산 정상 언덕에 서 있었는데 저는 순간적으로 여기서는 반드시 날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꿈은 아니지만 두 개의 나무 판자나 종이판자가 있으면 한 5 미터나 10미터 정도는 날아갈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동행했던 이창보 집사에게 빨리 어디 가서 직 사각형의 판자 두 개를 구해 오라고 말했습니다. 집 사람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에 이창보 집사가 돌아왔는데 판자를 구해오지 못했습니다. 저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을 못내 아쉽게 생각하며 크게 실망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꿈과 생시를 구분도 못하는 “영 몰라 통 몰라”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모험적인” 기질과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을 주신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근심이나 염려나 두려움 대신 마음에 평안과 여유를 지니고 긍정적으로 “막 뚫고 나아가면서” “낙천적”으로 “즐겁게” 살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도 하늘을 날아가는 꿈을 이따금씩꾸면서 살아오고 있는데 십 수 년 전부터는 직 사각형의 판자 없이 그대로 하늘을 마음껏 날곤 합니다.





열한째로, 이태리 베니스에서 예상치 않던 일이 발생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예상치 않던 엉뚱한 일이 생겨서 당황하기도 합니다. 1985년 여름 저는 아내와 함께 유럽 여행을 한 일이 있었는데 이태리 베니스에서 예상치 않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베니스 바닷가에 멋진 모터 보트들이 있었습니다. 한번 타 보고 싶은 마음으로 제가 모터 보트에 가까이 가서 바라보고 있었는데 보트에 있던 사람이 저 보고 보트에 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니스 시에서 운영하는 보트이므로 무료로 타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터 보트에 탔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모터 보트는 우리를 어느 섬으로 데려가는데 납치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큰 일 났다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섬의 큰 건물 안으로 끌려갔습니다. 마피아 일당에게 붙잡혀온 것이었습니다. 그 건물은 유리 제품들을 만드는 건물이었는데 각종 유리 제품들이 층마다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를 끌고 온 사람은 우리가 그 유리 제품들을 사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리 제품들을 사 가지고 간 유명 인사들의 이름들이 쭉 적혀 있었습니다. 그곳에 끌려 온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유리 제품들을 사고 있었습니다. 저는 각 층마다 진열되어 있는 유리 제품들을 좀더 구경한 다음에 사겠다고 하면서 일층 이층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이층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우리를 데리고 온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아내 보고 빨리 도망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층으로 빨리 내려와서 바닷가를 향해서 죽을 힘을 다해 도망을 쳤습니다. 바닷가로 달려왔을 때 작은 배가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는 배 삯을 주고 배를 타고 베니스까지 무사히 돌아 올 수가 있었습니다. 약간 두렵기도 했지만 스릴 만점인 도망침이었습니다. “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막 달려갈 때” 길이 잘 열리는 것을 또 다시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경험은 유익하고 재미 있습니다.





열두째로, 우리가 1988년 봄과 여름 평생 처음과 마지막으로 학교와 교회로부터 “안식년”을 얻어서 8개월 동안 미국 휘튼 대학교 빌리 그래함 쎈터에 가서 “Scholar in Residence”의 자격으로 “안식년”을 지낸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 휘튼에 도착했지만 어디에서 살지 어떤 자동차를 탈지 몰랐습니다. 도착한 첫 주일 빌리 그래함 쎈터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미국교회에 가서 첫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담임 목사님에게 인사를 하면서 저와 우리 가족들을 소개했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예배 후 광고 시간에 저와 우리 가족들을 소개하면서 우리들이 아직 살 집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예배 후 휘튼에 살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이 자기 집에 빈 집이 한 채가 있는데 와서 살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아주 넓은 정원을 가지고 있었고 정원 안에 집 두 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다음 날부터 그 집에 가서 8개월 동안 집 값을 내지 않고 아주 편안하고 즐겁게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정원 가꾸는 일을 잘 하기 때문에 때때로 정원을 가꾸며 돌보는 일을 하기는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아주 좋아하면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사람이 낡은 자동차를 버리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저는 그 자동차를 가져다가 페인트 칠을 하고 고쳐서 타고 다녔습니다. 제가 페인트 칠도 잘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동차에 에어컨이 없어서 여름에 좀 덥기는 했지만 그리고 오일이 새어서 오일을 늘 가지고 다니면서 넣어야 하는 불편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탈만했습니다. 이형자 권사님이 미국 휘튼에 오셨을 때 제가 그 헌 차에 모시고 다닌 일이 있었는데 이 권사님이 이 차는 왜 이렇게 더우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제가 1988년 봄과 여름에 미국 휘튼에 간 주 목적은 쉬기도 하면서 빌리 그래함 쎈터에서 연구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제에게 예상치 않던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휘튼 대학교 빌리 그래함 쎈터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한인선교대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그 실제 준비를 최일식 목사님과 제가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을 오고 가며 강사님들을 비롯한 참석자들을 모집하기도 했는데 “휘튼 한인선교대회”가 역사적인 선교대회가 되었습니다. 제가 휘튼에 머무는 동안 “월드 릴리프” 총재가 저보고 북 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에 함께 가서 가뭄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자고 해서 함께 다녀온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가뭄으로 죽어가는 현지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저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고 있는 미국과 카나다 교회의 후원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국교회도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부루키나 파소를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호소와 부탁의 글을 써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원 교회들에게 보냈습니다. 좀 긴 글이지만 그 일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뜨거운 대륙 서부 아프리카 부루키나 파소에서 사랑하는 한복협회원님들과 한국교회 성도님들에게 사랑과 문안을 보냅니다. 부루키나 파소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가난한 나라입니다. 1983년 이후의 극심한 가뭄과 기근 때문에 마실 물과 양식이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을과 집을 떠나 남쪽으로 정처 없이 이주하고 있습니다. 부루키나 파소는 한 마디로 가뭄과 기근과 질병으로 메말라 죽어가고 있는 나라라고 하겠습니다……그런데 바로 절망의 땅 이곳에서 소망과 용기를 심어주는 선교의 사역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미국과 카나다의 교회들이 이들에게 우물을 파주고 우물 곁에 채소와 감자와 옥수수를 심어주는 일이 지난 몇 년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월드 릴리프를 통해서 이미 100여 개의 우물을 파주었습니다. 우물은 이들에게 생명의 근원이 되고 있습니다. 3일 동안 이와 같은 마을을 여러 곳을 방문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진로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지만 아직까지 자기들을 살려두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물은 마을 주민들에게 구세주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부루키나 파소 방문에 참여한 사람들이 미국 목사님들 3인과 일본 복음주의협의회와 싱가폴 복음주의협의회와 한국 복음주의협의회에서 온 3인이었는데 동양에서 온 우리 세 사람을 가리켜 “동방에서 온 세 박사들” 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물 한 개 파 주는데 $1,000 정도가 소요됩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금년 안에 최소한 10개의 우물을 파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 복음주의협의회가 금년 초에 홍수와 기근에 허덕이는 방글라데시 난민을 위해 1만 5천 불을 보낸 것이 하나의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 선포의 선교와 함께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구제의 선교도 함께 하여야 할 것입니다. 서울 영동교회를 비롯해서 사랑의 교회, 할렐루야교회, 신촌성결교회, 충현교회, 소망교회, 영암교회, 화성교회, 홍성교회, 충신교회, 화평교회, 대흥교회, 염광교회, 충무교회, 후암교회, 사랑교회, 새순교회, 중앙성결교회, 중앙감리교회, 장충단 성결교회, 동도교회, 강변교회 등등 수 많은 교회들이 마른 땅에 우물 파 주는 사랑의 사역에 동참해 주시기를 호소하며 기도합니다.... 1988년 4월 16일 부르키나 파소에서 김명혁 목사 드림” 결국 한국 복음주의협의회 회원 교회들의 후원으로 일년 안에 15개의 우물을 파 준 일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닥치는 대로 “막 가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막 하는” “막가 파”의 기질을 가지고 달려가면서 살아오고 있는데 그 때마다 길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발견하고 또 발견했습니다.





열 셋째로, 제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소신껏” 말하고 “소신껏” 행동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1999년 1월 19일부터 26일까지 북한의 아태 위원회와 민화협의 초청을 받아 남한의 7명 종교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평양과 북한 일부 지역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평양 공항에 내릴 때부터, 김일성 수령 동상 앞에 갔을 때부터 그리고 가는 곳마다 저는 “소신껏” 말하고 “소신껏” 행동을 했습니다. 김일성 수령 동상 앞에서는 일부러 경의를 표하지 않고 이리 저리 몸을 움직이고 사진을 찍으면서 자유롭게 행동을 했습니다. 비판의 말도 자주 했습니다. 우리 일행 7명은 평양 고려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저는 5일 동안 매일 한번씩 호텔을 혼자서 몰래 빠져 나와서 평양시내를 30분 또는 50분 동안 돌아다녔습니다. 평양 역 안으로 들어가서 시민들의 모습도 살피고 상점과 백화점에 들려서 물건 사는 모습도 보고 (저도 물건 하나를 샀습니다) 뒷길과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과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물론 저는 매일 경고를 받았으나 경고를 무시하고 5일 동안 매일 한번씩 호텔을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혹 잡히면 할 일이 있을 텐데 라고 생각을 하니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일행 중 어떤 목사는 혹 잡히면 어떨까 불안해서 새벽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했는데 저는 매일 단 잠을 푹 자곤 했습니다.


1월 21일에는 애국열사 묘지와 단군릉과 협동 농장을 방문했습니다. 저는 단군릉을 이렇게 웅장하게 너무 크게 지으면 너무 많은 돈이 낭비되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1월 22일에는 황해도의 사리원과 재령을 지나 신천을 방문했습니다. 신천은 1950년 말 미군이 후퇴하면서 신천 지역의 주민 3만 5천여 명을 학살한 곳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북한의 대표적인 반미 사상 교육장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살의 유물들과 사료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 유물들과 사료가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신천 학살 사건은 국제 조사단이 와서 철저하게 조사하여 그 범죄성 여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문제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저들은 그와 같은 질문과 제안을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정식으로 강하게 항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북한 민화협 위원들이 우리들과 말을 할 때마다 “미국 놈들” “일본 놈들” 이라고 해서 저는 미국 사람들 중에는 좋은 사람들도 있고 일본 사람들 중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으니 “놈들” 이라는 말을 삼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월 23일에는 묘향산을 방문했습니다. 가는 길에 안주를 지나게 되었는데 우리 일행 중 세 명의 고향이 안주라 차에서 내려 고향을 바라보면서 망향의 시간을 잠시 가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묘향산 비선 폭포에 올라가고 나서 방명록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겼습니다. “고향의 품에 안긴 기쁨과 동포들의 따뜻하고 순수한 환대에 뜨거운 감사를 표하며 평화 통일의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기원합니다. 1999년 1월 23일 서울에서 온 김명혁 교수(목사)” 저는 가는 곳마다 산의 바위에 “김정일 장군 만세” 와 같은 글들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서 그와 같은 것은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충고의 말도 했습니다. 제가 가는 곳마다 비판도 많이 하고 질문도 많이 하니까 저를 반동적인 요주의 인물로 간주하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북 조선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여기 북 조선에 있어야 할 사람인데 남 조선에서 살고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결국 저들은 겉으로는 항의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저를 이해를 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들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들 편에 서서 마음을 쏟으면서 순수하게 이야기를 하니까 결국 저를 귀찮아 하면서도 저를 이해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저를 지칭하며 “영 몰라 통 몰라” 라고 별명까지 부르며 농담을 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가장 강성인 한 형제는 우리들에 대한 인상이 어떠했느냐고 물었을 때 “이전 사람들과 다르게 아주 솔직하고 순수해서 좋았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나중에 북한에 가서 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스티브 린튼 박사에게 했더니 북한 사정을 너무나 상세하고 정확하게 아는 스티브 린튼 박사는 저에게 이제는 북한에 절대로 다시 갈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3년 후에 저는 다시 종교 지도자로 초청을 받아 북한을 다시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두 번째 북한을 공식으로 방문했을 때 민화협 위원이 제가 경고를 무시하고 5 번이나 고려호텔을 혼자서 몰래 빠져 나와서 평양 시내를 구경하며 돌아 다녔다는 이야기와 여기 다니면서 비판의 소리를 했다는 이야기를 책에다 쓰면 어떻게 하느냐고 제사 쓴 책을 보여주면서 정식으로 저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북조선에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비판을 많이 하고서도 잡히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정치적이 아닌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소신껏” 말하고 “소신껏” 행동하는 것이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저는 확실하게 믿습니다.





열 넷째로, 제가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을 때 “막가 파”의 기질과 “모험심”과 “담력”의 기질을 지니고 “막 뚫고” 들어간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2005년 12월 15일밤 1,400만원 상당의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아프간 쿤두즈 무라취드에 세워준 학교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타직 국경과 아프 간 국경을 넘어 아프간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아프간 방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타직 국경과 아프간 국경이 꽉 막혔습니다. 우리 일행 7명이 비자도 없이 타직 국경에 도착했을 때 국경 통과가 폐쇄되었습니다. 국경 수비 군인들이 우리들 보고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돌아갈 수가 없다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제가 하도 강하게 돌아갈 수 없다고 말을 하니까 멀리서 저를 바라보고 있던 장교 한 사람이 저를 오라고 했습니다. 왜 아프가니스탄에 꼭 가야하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아프간에 세운 학교 준공식에 참여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가지고 온 학용품을 전달하여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타직 국경과 아프간 국경을 넘어가야 한다고 말을 했을 때 그 장교는 저를 자기 사무실로 데리고 가더니 타직 국경을 넘어 갈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었습니다. 결국 저와 일행 7명은 모두 타직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아프간 국경을 넘어서 아프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늦은 밤이고 비자도 없고 아프간 국경도 폐쇄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가 38선 국경도 혼자서 넘었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아프간 국경을 혼자서 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막가 파’의 기질이 발동한 것이었습니다. 캄캄한 밤에 국경 통과의 허락도 받지 않고 3km나 되는 아프간의 국경을 혼자서 넘어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일행을 모두 타직 땅에 남겨두고 저는 조그만 가방 하나를 들고 캄캄한 밤에 혼자서 아프간을 향해 3km나 되는 국경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걷고 또 걸어서 아프간 땅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아프간 경비군인에게 붙잡혔습니다. 저를 잡아서 국경 수비대장인 들라워 장군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저는 들라워 장군과 20여분 동안 그의 사무실에서 대화를 했습니다. 내가 아프간 어린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학교를 하나 지어주었고 학교 준공식에 참여하기 위해서 국경을 넘어왔으니 잘 보아달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는 내 말을 들은 다음 “대우 넘버원, 현대 넘버원, 코리아 넘버원, 노 프로블렘 오케이” 라고 말하면서 국경통과를 허락해주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고 감사한 일이었다. 꽉 막힌 길을 “막가 파”의 기질로 확 뚫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들라워 장군에게 타직에 남아있는 우리 일행과 선물을 가져오기 위해서 트럭 한 대를 타직 국경으로 보내달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는 “노 프로블렘 오케이” 라고 말하더니 트럭 한 대를 타직 국경으로 보냈습니다. 조금 후 정정섭 장로님을 비롯한 기아대책 직원들이 모두 무사히 도착을 했습니다. 모두들 너무 놀아와 했습니다. “모험심과 담력”이 다시 통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물론 모두가 망극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쿤두즈 무라취드에 세워진 학교 준공식에 참석하면서 모슬렘 지도자들 100여명의 뜨거운 감사의 응답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린 학생들 400여명이 함께 모였는데 준공식을 거행하는 중 모슬렘 어린이들이 나와서 한국말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우리들은 모두 놀라움과 충격에 사로잡혔습니다. “막가 파”로 “막 뚫고 나아갈 때” 모든 길이 활짝 열리는 것을 저는 보고 또 보고 또 보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더 합니다. 제가 아프간을 방문한 지 2년 후인 2007년 여름에 “아프간사태”가 일어났을 때 저는 아프간 탈레반에게 억류되어있던 23명의 젊은이들을 생각하면서 한국교회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 아프간으로 달려가서 탈레반에게 호소하든지 대신 잡히든지 하며 억류되어있는 젊은이들을 위로하려고 마음을 정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샘물교회의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고 함께 가자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통일부 장관에게 전회를 걸고 나의 생각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뜻이 통하는 손인웅 이정익 박종화 강승삼 목사님들을 제 사무실로 오라고해서 저의 뜻을 전하며 함께 의논을 했는데 모두 제 뜻에 동의를 하면서 필요한 조언을 해주기도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제가 아프간으로 달려가지는 못했지만 저에게 달려가고자 하는 “모험심과 담력”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앞으로도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어디든지 달려갈 것입니다. 얼마나 즐겁고 재미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망극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열 다섯째로, 밀가루 300톤을 가지고 북한 개성으로 갈 때도 “막가 파”의 기질과 “모험심”과 “담력”의 기질을 지니고 “막 뚫고” 달려간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의 지도자들과 함께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만들어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도모하며 북한동포 돕기 운동을 펴오고 있는데 지난 2010년 8월 27일 5개 종단의 대표들 9명이 25톤의 대형 트럭 13대가 실은 밀가루 300톤을 가지고 북한 개성으로 가서 북한 “민화협” 실무자들에게 전해주고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밀가루를 가지고 북으로 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강력한 대북 폐쇄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통일부의 실무자들과 여러 번 접촉하면서 방북을 허락해 주기를 간절하고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방북 예정 며칠 전 통일부 장관으로부터 방북을 허락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저는 다음날 아침 통일부의 서 호 국장과 40여분 동안 전화로 비판과 충고가 담긴 강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막가 파”의 기질이 발동한 것이었습니다. 저의 평생 그렇게 강하고 비판적인 어조로 정부 당국자와 대화를 나눈 일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동기로 방북을 추진해 온 종교인들의 방북을 불허하는 것이 통일부의 반응이냐?” “통일부가 반 통일부냐?” “이 ( )의 정부와는 상대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정책을 바꾸고 빨리 방북을 허락하도록 하라!” 라는 등 아주 강한 어조로 비판과 충고의 말을 쏟아놓았습니다. 그런데 4 시간 후에 서 호 국장으로부터 전회가 걸려왔습니다. 밀가루 300 톤을 가지고 방북을 하도록 허락한다는 통보였습니다. 저는 급히 우리 종교인들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결국 방북 허락을 받은 8월 25일 이틀 후인 8월 27일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의 종교인들 9명(김대선 교무, 김명혁 목사, 김훈일 신부, 박경조 주교, 박남수 선도사, 박종화 목사, 법 륜 스님, 이정익 목사, 인명진 목사)이 방북의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25톤 트럭 13대가 실은 밀가루 300톤을 가지고 북으로 가서 개성시내 봉동역 하차장에 하역하여 북측 “민화협” 실무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곳 여기 저기서 만난 북측 군인 장교들이 아주 조용하게 다가와서 우리들이 어려운 일을 했다면서 우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말을 했고 언제 또 오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북측 “민화협” 실무자들은 마음으로는 고마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의식적으로 남측 정부정책에 대한 불신과 비판과 분노를 나타내 보였습니다. 우리 종교인들은 몇 시간 동안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남북간에 현존하는 불신과 대결의 골이 깊은 것을 실감하며 서글픈 고민에 빠졌는데 그 서글픈 고민은 서울에 도착한 늦은 밤까지 우리 모두의 가슴을 가득 메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북에 가로놓여있는 불신과 대결의 골을 메울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들의 고민이었고 결국 이것은 우리 종교인들과 우리 국민들과 우리 정부가 풀어가야 할 중대한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열 여섯째로, 1,690톤의 감자를 사서 북한에 보낸 잊을 수 없는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합니다. 제가 북한 동포 돕는 일을 1995년 12월부터 계속해서 해 오는 동안 잊을 수 없는 한가지 일은 1997년 3월 31일 강원도 평창에서 1,690톤의 감자를 사서 99대의 대형 트럭에 실어 4월 3일 인천에서 선적하여 북한으로 보낸 일이었습니다. “막가 파”의 기질이 발동했다고 생각합니다. 3월 15일 토요일 밤 9시 MBC 뉴스를 듣던 중 저는 강원도 고산지의 감자가 지난해 풍작이었던 까닭에 이른 봄에 여러 천 톤이 썩어간다는 소식에 접했습니다. “북한에는 지금 먹을 곡식과 채소가 없어서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남한에서는 감자가 너무 많아서 썩어가다니!” 저는 가슴에 의분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무작정 뉴스를 제공한 춘천 MBC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종성 기자는 저의 관심에 고마워하면서 평창군의 지형근 계장에게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즉시 지형근 계장에게 전화를 걸고 썩어 가는 강원도 감자를 사서 북한에 보내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는 너무 좋아하면서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일이 현 정치 상황에 비추어 보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설명하며 노력해 보자고 했습니다. 3월 16일 주일 저는 “마음을 물 쏟듯 할찌어다”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지금 우리는 북한 동포를 바라보면서 첫째 눈물을 강처럼 흘려야 하고, 둘째 마음을 물 쏟듯이 쏟아야 하며, 셋째 주를 향하여 손을 들고 항복하면서 강원도의 썩어 가는 감자를 아주 썩기 전에 북한으로 보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저는 3월 17일 월요일 아침 통일원 인도지원과장 조명균씨에게 전화를 걸고 강원도의 감자를 사서 북한으로 보내는 일이 성사되도록 노력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의외로 그의 반응이 매우 긍정적이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 저는 이곳 저곳에 연락하며 그 일이 성사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22일 토요일에는 평창 군수 김용욱씨를 서울에서 만났습니다. 24일 월요일 아침에는 북한동포 후원연합회 모임을 갖고 감자를 사서 보내기로 합의했습니다. 결국 기독교에서 1,000톤을, 천주교에서 340톤을, 불교에서 140톤을, 원불교에서 60톤을, 한국적십자사에서 150톤을, 총 1,690톤의 감자를 사서 북한에 보내기로 합의했습니다. 25일 저녁 6시 15분 북한으로부터 감자를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25일 밤부터 평창군에서는 감자 포장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26일 밤 9시 MBC는 그 동안 진행 과정을 다시 한번 보도했습니다. 너무나 단시일 안에 이루어진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1997년 3월 31일 월요일 아침 우리는 평창군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감자를 구입해서 트럭에 실어 인천으로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각 종단에서 마련한 감자 값을 가지고 심군식 목사, 이윤구 박사, 오태순 신부, 법 륜 스님, 박청수 교무, 김경민 부장 등이 동행했습니다. 평창군에 이르렀을 때 군수를 비롯한 군청의 분위기는 고무적이었습니다. 구입비 전달식을 마치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함께 불렀을 때 우리 모두는 감격에 쌓였습니다. 강원도의 남아도는 감자를 사서 북한에 보낸 일은 너무너무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몇 분의 소감을 줄여서 여기 싣습니다. 김준곤 목사: “우리 땅에서 난 감자를 우리의 북녘 동포들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나눔이 국토통일 이전에 마음의 통일을 이루는 물꼬를 트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이번 일을 여러 종교가 연합해서 하게 되어 더욱 기쁩니다. 이번 일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로 승화되기를 바랍니다.” 오태순 신부: “굶어 죽어 가는 북한 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 나라는 우리뿐입니다. 우리 나라의 가난한 농민들이 굶어 죽어 가는 북녘 동포들의 생명을 살리는데 함께 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제는 우리 국민 모두가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돕지 않으면 저들은 죽습니다. 법 륜 스님: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지금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일은 식량난으로 인한 북한동포의 대량아사 문제입니다. 이번에 남은 강원도 감자를 북한동포에게 보내는 것은 강원도 농민도 살리고 북한동포도 살리는 일입니다. 이렇게 모두를 살리는 일이야말로 참다운 종교활동이고 정의로운 사회운동입니다. 박청수 교무: “세계에서 가장 배고픈 북녘의 우리 동포들을 여러 종교가 합력하여 돕게 되어 마음의 위안이 됩니다. 이번의 이 일이 불씨가 되어서 온 국민이 다 함께 식량위기를 맞고 있는 북한동포를 도울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그리고 북한동포들에게 감자 보내기 운동을 계기로 강원도 농민도 돕게 돼서 기쁩니다. 김용욱 평창군수: “우리는 좀 여유가 있는데 우리 북한동포들이 굶어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직접 지은 우리 농산물이 우리 북한 동포들에게 직접 전달된다는 것이 얼마나 뜻 깊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작년 공비 출현으로 인해 수확기가 늦어졌고 관광객도 오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던 차에 기독교 단체와 다른 종교단체들이 힘을 합해서 우리 농민들을 도와주셔서 정말 무엇이라고 고마움을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직접 지은 농산물이 북한 동포들에게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작은 일이었지만 얼마나 귀중하고 아름다운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갈 때” 길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경험하고 또 경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동행했던 이윤규 박사는 “영원히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해”라는 제목의 글을 4월 13일 한국교회신문에 실었는데 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690톤 이라는 적지 않은 감자가 포장되어 20톤짜리 대형트럭 99대에 실려 인천항으로 향해 떠나는 모습을 보는 우리는 생일날 어린이처럼 기뻤고 또 한편 눈물 나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4월 3일에 인천부두를 떠나 몇 시간 안에 남포에 하역되면 지금 굶주림으로 신음하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적어도 그들이 받고 있는 식량배급분량(1일 100그램)으로 치면 1,690만 명에게 하루를 살리는 기적이 가능케 되었습니다. 이번 사업은 불과 세 주일(사순절 막바지와 고난주간, 그리고 이 부활절 주간에)에 일어난 놀라운 기적이어서 우리의 심금을 더욱 울려 줍니다. 참으로 우연한 일련의 사건들이 제2의 오병 이어 같은 이적을 가능케 했습니다. 북한에 아직 생존해 있을지도 모르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금 북한동포 돕기에 앞장을 서 나가고 있는 김명혁 목사님께서 지난 15일 우연히 MBC를 통해 강원도 고산지의 감자가 지난해 풍작이었던 까닭에 이른 봄에 여러 천 톤이 썩어 버리게 된다는 소식에 접했습니다. 이튿날이 주일이어서 김 목사께서는 “눈물을 강처럼 쏟고” “마음을 물 쏟듯 하며” “주님께 손을 들어” 항복하는 마음으로 강원도의 썩어 가는 감자를 아주 썩기 전에 골라서 북한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설교하셨답니다. 그리고 곧 MBC로 평창 군청으로 다시 우리 정부와 북한측으로 시각을 다투며 밤낮을 안 가리고 이 일을 추진하며 뜻 있는 교회지도자, 타 종단의 수장들과 연락을 하여 불과 한 주간 안에 이 위대한 사업이 성취되었습니다. 사람이 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불가능한 요인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유전능, 무소 부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감사할 일이며 하늘에 사무치게 찬송을 드릴뿐입니다. 그 싱싱한 감자가 포장되고 크고 푸른 비니루에 1톤씩 묶이어서 20톤짜리 대형트럭에 실리고 한국적십자사 긴급구호 표식도 선명하게 붙인 가운데 창고를 떠나는 모습은 통일 행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임이 우리 땅 방방곡곡에서 있기만 하면 통일은 벌써 온 것이 분명합니다.”  





열 일곱째로, 앞으로 제가 걸어갈 수도 있는 가난과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도 “막가 파”의 기질과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면서” “즐겁고” “기쁘게” 걸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욥이 고백한 대로 나의 가는 길을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지만 나의 가는 길을 오직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욥 23:10). 베드로가 나중에 울면서 고백한 대로 내가 주님을 사랑 할 수 있는지를 나는 알 수 없지만 오직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므로 그리고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앙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므로 그리고 저들의 회개의 고백과 담력의 신앙 고백을 붙잡고 또 붙잡으므로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허락하시면 가난과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골짜기 길도 얼마든지 당당하게 “기쁘고” “즐겁게” “막 뚫고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담력의 신앙 고백을 너무너무 좋아하며 굳게 붙잡게 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그리고 저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저의 모든 죄악을 주님의 피로 도말시켜 주시옵소서.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들과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찾아가서 어루만지시며 돌아보신 것처럼, 저도 작은 교회들을 찾아가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계속해서 펴게 하시고 그리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펴게 하시옵소서!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사도 바울과 주님의 제자들을 본받아서 그리고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을 본받아서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특히 고통 당하는 북한 동포들과 모슬렘 형제들을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미움과 분노와 증오가 있는 곳에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심고 분열과 갈등과 대결이 있는 곳에 화해와 일치와 평화를 심는 작은 거름과 씨앗이 되게 하시옵소서!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를 하기 전에 주님이 지니셨던 긍휼의 눈물을 지니게 하시고 주님이 품으셨던 사랑의 심장을 지니게 하시고 주님이 지니셨던 죽음의 흔적을 지니게 하시옵소서! 죄인 중의 괴수가 주님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와 순교자들이 흘린 충성의 피를 의지하며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와 인자와 사랑을 의지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국교회와 한국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북한동포들과 일본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멘!”(2011년 3월 29일).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 가는 동안 여러 가지 불행한 일들을 만나게도 됩니다. 병에 걸리는 일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일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일찍 죽는 일도 있습니다. 가난과 고난과 고통과 죽음을 당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절망하며 원망하게도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욥의 인내를 배우라고 말씀합니다(약 5:11). 모든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벧전 5:7).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고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분부합니다(시 37:5,55:22). 주님을 인해서 핍박을 받는 것이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마 5:11,12). 저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어릴 때 이별한 일과 그리고 불치의 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세상을 일찍 떠난 어린 아들 철원이를 일찍 이별한 일 때문에 많은 슬픔과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과 아픔이 보석이 되는 것을 저는 발견했습니다. 제가 경험한 슬픔과 아픔은 저로 하여금 십자가에로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고, 슬픔과 아픔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로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으며, 천국을 사모하며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아픔까지도 아니 핍박과 죽음까지도 감사와 기쁨의 조목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프랜시스는 살았을 때는 “가난은 나의 애처이고 고난은 나의 스승” 이란 고백을 했고 죽을 때는 “나의 자매 죽음이여!” 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꼭 같은 길을 걸으며 꼭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죄인 중의 괴수인 저에게 베풀어주신다면 저도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가난과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도 “막가 파”의 기질과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 뚫고 나아가면서” “즐겁고” “기쁘게” 걸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딤전 1:15,17).





이것으로 “모험심과 담력의 귀중한 신앙” 이란 제목의 긴 간증 설교를 마무리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아무것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고 싶은 마음을 지니고 “사망아 네까짓 것이 무엇이냐?” 라고 외치면서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막가 파”의 기질을 지니고 당당하게 뚫고 나아가는 멋지고 아름다운 십자가의 삶을 살다가 십자가의 죽음을 죽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저와 여러분들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걸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세상이나 세상의 유행을 사랑하지도 따르지도 말고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 바라보고 사랑하고 따르면서 살아가십시다. 성경말씀 두 곳을 읽으면서 설교를 마무리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영천 하나승리교회 성도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기를 바라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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